57화
“도착했네요.”
상념에 젖은 레이첼 백작 부인을 깨운 건 로위나였다.
“백작 부인?”
“아. 미안해요. 딴생각 좀 하느라.”
“아니에요.”
상냥하게 대답한 로위나가 다가온 하인의 손을 잡고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레이첼 백작 부인도 따라 내리는데, 자갈을 밟는 말굽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하.”
홱 등을 돌린 백작 부인이 먼저 킬리언을 보고 치맛자락을 들어 예를 표했다. 말에서 내린 킬리언이 그제야 그녀를 발견해 고개를 까닥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기꺼이 한달음에 달려와야죠. 누구 초대인데요.”
해사하게 웃은 백작 부인이 슬그머니 물러났다.
“로위나. 나는 좀 피곤해서 씻고 옷도 갈아입고 싶은데.”
“아. 목욕물은 지금 데워 놓으라 말해 놓았어요.”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쉬신 다음에 저녁 식사 때 다이닝 룸에서 뵈어요.”
자연스레 허리를 휘감은 손을 느끼며 로위나가 대기하던 하녀 한 명을 불러 백작 부인을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로위나.”
백작 부인이 별장 안으로 들어가자 킬리언이 그녀를 말 안장 위로 올라타게 했다. 그러고는 등 뒤에 앉아 고삐를 움켜쥐었다. 얼결에 말에 올라탄 로위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 가려는 거예요?”
“보여 줄 게 있어요”
짧게 대답한 킬리언이 등자에 발을 얹고는 발꿈치로 말 옆구리를 찼다.
* * *
쉴 새 없이 달리던 말이 차츰 속도를 줄인 건 흰 백사장 앞에서였다.
먼저 내린 킬리언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허리를 잡으려는 손에 로위나가 고개를 저었다.
“손만 잡아 주세요. 등자에 발을 얹고 내려 볼게요.”
“넘어질 텐데.”
“괜찮아요.”
단호한 말에 쯧, 혀를 찬 킬리언이 손을 내밀었다. 그대로 조심조심 내려오는데 그가 불쑥 손을 거뒀다.
“꺅!”
동시에 중심을 잃은 로위나가 그의 품에 폭 안겼다. 당장이라도 안아 들 듯한 기세에 얼굴을 붉힌 로위나가 그를 밀어냈다.
“왜 손을 놓으신 거예요?”
“자신만만하길래.”
얄밉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 킬리언이 그녀에게 어느 한쪽을 고갯짓했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로위나가 눈을 홉 떴다.
꿈에서나 본 모습이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었다. 물살이 닿는 끝부분에 놓인 동그란 식탁과 두 개의 의자. 레이스 식탁보로 덮인 식탁 위에는 레드 와인과 싱그러운 과일 샐러드, 양파와 버섯을 곁들인 신선한 굴 요리가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었다.
“설마 저하께서 준비하신 거예요?”
대답 대신 킬리언이 식탁 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엉거주춤 그를 따라 식탁으로 다가간 로위나가 웨이터가 끌어 준 의자에 앉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고 바다도 마찬가지로 사파이어처럼 반짝였다. 파도 소리와 멀리서 우는 물새의 울음소리가 고급 레스토랑 악단의 연주처럼 얕게 깔렸다. 경험하고 있어도 믿기지 않는 자리였다. 구두 위로 발등을 간지럽히다 사라지는 시원한 물살에 잠시 정신이 팔린 사이, 킬리언의 담담한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점심 식사를 요새 거른다고 들었습니다. 할 일이 많아 입맛이 없다면서요.”
“그건 그렇지만…….”
초현실적인 상황에 어쩔 줄 모르는 그녀와 달리 킬리언이 태연한 얼굴로 레몬즙을 생굴 위에 뿌렸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그녀에게 내밀었다.
“로위나.”
“킬리언?”
당황한 로위나를 가만히 쳐다보며 킬리언이 제 손을 눈으로 가리켰다. 옆에 선 웨이터를 보기 민망해 몇 번 입만 벙긋거리던 로위나가 결국 상체를 그쪽으로 숙여 생굴을 받아먹었다.
매끄러운 굴 껍데기를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린 물컹한 굴이 그녀의 혀를 지나 목으로 쏙 들어왔다. 딸꾹질하듯 굴을 삼켜 버린 로위나를 보며 입매를 늘린 킬리언이 그녀의 입가를 엄지로 한번 쓸었다.
짙어지는 미소가 농밀한 온도를 머금고 있었다. 그저 굴을 받아먹었을 뿐인데 뭔가 야릇한 행동이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움에 눈을 내리깐 로위나가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이게 대체 다 뭐예요?”
그의 전과 다른 행동에 크게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이 상황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에 눈을 가늘게 뜬 킬리언이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당신이 원하던 거잖아.”
“예?”
생뚱맞은 대답에 눈썹 사이를 좁힌 로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8년 전 기차에서 했던 말, 기억 안 나요?”
대체 언제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이어진 말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된 로위나가 입만 벙긋거렸다.
“언젠가 해변에서 좋아하는 요리를 먹고 싶다고 했잖아요.”
바로 어제 있었던 일인 양 또렷이 말하는 킬리언을 로위나는 가만히 쳐다봤다.
그에게 그런 말을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히 그런 게 소원이던 때가 있었긴 했다.
기차에서 우연히 첫사랑에 빠진 스무 살의 그녀는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둘만 있는 객실 안에서 신나게 떠들고는 했다. 그게 실례가 되는 일인지도 몰랐고 그저 태어나 처음으로 가슴 설레는 상대와 길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흥분되고 기뻤으니까.
“그 얘기를…… 제가 했었군요.”
그러니 그 정도는 아마 이야기했으리라. 곰곰이 생각한 끝에 순순히 대답한 로위나가 되물었다.
“그걸 기억하고 계셨나요? 오래전 일인데.”
굴을 좋아한다고 했었는지도 기억에 없었다. 최근 멜리사나 조앤에게 그런 말을 했었지만.
“제가 이런 이벤트도 다 해 보네요.”
지난 5년, 이따금 헤리엇이 굴 요리를 취급하는 식당에 데려가 주긴 했지만 그마저도 월급날 어쩌다 한 번이었다.
“임신했을 때 그렇게 먹고 싶었…….”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뒤늦게 아차 한 로위나가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 훈훈했던 공기는 어디 가고 어색한 분위기가 식탁 위로 내려앉았다.
“방금 그 말은…….”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아무리 요즘 관대해졌다고는 하나 그녀 쪽에서 먼저 임신했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난처한 로위나가 눈앞에 앉은 남자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는 사이, 킬리언의 눈짓을 받은 웨이터가 조용히 물러갔다.
웨이터를 물린 킬리언이 그녀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으르렁대리라 각오한 로위나가 머뭇머뭇 잔을 받았다.
받은 잔을 그대로 입술에 댄 순간이었다. 그녀는 머금은 와인을 그대로 내뱉을 뻔했다.
“또 뭐가 먹고 싶었습니까?”
“……예?”
로위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날카로운 일갈은 아니더라도 까칠한 경고가 날아오리라 생각했다.
“또 뭘 먹고 싶었죠?”
멍해져 있는 로위나에게 킬리언이 보기 드문 인내를 발휘해 거듭 물었다.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고 깍지까지 낀 그가 그녀의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그게 듣고 싶으세요?”
“네.”
“왜요? 데미안은 저하의 아이가 아닌데.”
만에 하나의 확률에 로위나가 슬쩍 그를 떠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눈을 가늘게 뜬 킬리언이 손을 풀고 와인을 벌컥 마셨다.
평소처럼 우아하게 음미하는 게 아니라 과음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 잔을 연달아 마시고 나서야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부정한다고 아이가 당신 배에 다시 들어가는 건 아니니까.”
얄미운 대답에 안도와 함께 긴장이 풀렸다. 뻣뻣하게 굳은 등이 조금 구부정해지자마자 방금 마신 와인이 알코올 농도가 꽤 있었는지 취기가 조금 올랐다. 로위나가 턱을 팔에 괬다.
“치즈를 얹은 수란 요리요.”
“수란?”
“네. 아침에 잘 먹는 수란이요. 치즈를 얹는 건 옛날에 유모가 종종 해 줬었는데…….”
“유모가 있었군요.”
이채를 띈 눈으로 킬리언이 빈 그녀의 잔을 다시 채웠다.
“네…….”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잔을 기울였다. 어릴 때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가까운 친척 집에서 살았다는 것 외에 킬리언에게 털어놓은 과거는 없었다.
“정말 맛있었어요. 그때 그 수란에 뭔가를 더 넣었던 거 같아요……. 이후에는 똑같이 해 먹으려 해도 그 맛이 안 났거든요. 뭐 특별한 건 없었던 거 같은데.”
데미안에서 대화 주제가 바뀌었으니 이 정도는 말해도 상관없었다. 식사를 하며 술술 이야기를 이어 나가던 로위나가 서서히 무거워진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그대로 잠깐 눈을 감았다 뜨니 흔들리는 안장 위였다. 몽롱하게 아래를 내려다본 로위나의 눈에 말의 갈기가 보였다. 고삐를 잡은 길고 단정한 손도 보였다.
축 늘어져 잠든 그녀를 제게 기대게 한 채 고삐를 쥐고 있던 킬리언이 등 뒤에서 불쑥 물었다.
“깼습니까?”
“네에.”
“더 자요.”
귓가에 속삭인 킬리언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는 더 안정적으로 그에게 기대게 했다. 다정한 손길에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로위나가 중얼거렸다.
“바다가 너무 예뻤어요. 음식도 맛있었고요.”
“잘됐네요.”
귀가 잘못된 건지 목소리에 약간의 웃음기가 섞인 것 같았다. 마치 작은 동물을 귀여워하듯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술에 취해 귀가 이상해진 모양인 듯했다. 지금이 기회였다. 쉽게 결론지은 로위나가 불쑥 떠오른 제레미의 얼굴에 고삐를 쥔 커다란 손에 제 손을 올렸다.
무언가 참는 듯 그가 짧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입술을 말아 문 로위나가 용기를 끌어모았다.
“기왕 소원을 들어주셨으니 말인데…… 한 가지 소원이 더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