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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56화 (56/120)

56화

“잘 지냈니? 정말 오랜만이다.”

“……로위나 님.”

모든 시선이 토미에게 고정됐다. 섭정관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들의 등을 툭 밀었다. 엉거주춤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온 토미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인사했다.

“저는 잘 지냈어요. 로위나 님도…….”

말은 점점 흐려졌다. 찌르는 듯 내려다보는 새파란 눈에 겁이 난 토미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5년여 전 기억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린 토미의 눈에도 슬프고 비참해 보였었다. 머뭇거리는 토미에게 다가간 로위나가 그대로 그를 껴안았다. 사람들이 놀란 숨을 들이켰다.

“잘 지냈단다. 종종 네가 보고 싶었어.”

순수하고 솔직한 토미 덕분에 섬 생활도 심심하지 않았었다. 허리춤에 겨우 왔던 아이가 훌쩍 커서 이젠 가슴 언저리까지 온 걸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더불어 데미안 또한 금세 부쩍 자라 이런 소년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재회는 이만하면 됐겠지.”

겨우 열서너 살짜리라 해도 남자는 남자였다.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은 킬리언이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능숙하게 로위나의 허리를 감싸 안은 그가 욕실 쪽으로 그녀를 이끌려는 때였다.

“킬리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드물게 그의 이름을 부른 로위나가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들어주실래요? 섭정관님의 동의도 필요한 문제지만.”

“뭐지?”

“여기 있는 동안 토미가 제 옆에서 잔심부름을 해 주면 좋겠어요. 약혼식 준비로 조앤과 멜리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까요.”

뜻밖의 부탁에 눈썹을 치켜세운 킬리언이 토미를 내려다봤다. 북풍 설한보다도 싸늘한 시선에 토미는 저도 모르게 엄마의 치맛자락에 몸을 숨겼다.

“토미는 이곳 섭정관의 아들입니다. 함부로 잔심부름꾼 따위로 쓸 수는 없어요.”

“안 되나요?”

에두른 거절에 홱 고개를 돌린 로위나가 섭정관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봤다.

“힘들거나 위험한 일은 당연히 시키지 않을 거예요. 그냥 소소하게 말 상대가 되어 주면 그걸로 충분해요. 정말 안 될까요?”

“하하…….”

경직된 공기에 이도 저도 못 한 섭정관이 그녀의 옆에 선 공작의 눈치를 봤다.

곤란하지만 어렵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대신 다른 똘똘하고 발 빠른 아이를 붙여 드리겠다고 내뱉으려던 말은 어느새 다가와 옷깃을 잡아당기는 토미 때문에 저지됐다.

“내가 그러고 싶어요. 아빠.”

“…….”

“우리가 잘못했잖아요. 미안하잖아요.”

속삭이듯 부탁하는 말에 그간 무뎌졌던 양심이 각을 세워 가슴을 콕콕 찔러 댔다. 앞의 미스 필로네가 정식으로 결혼할 상대가 아닌, 정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섬사람들의 눈빛과 태도가 바뀌는 순간을 그 또한 똑똑히 기억했다.

“……그럼 그러죠. 제 아들이 미래 공작 부인의 시중을 들 수 있다니 오히려 영광입니다.”

마른침을 삼킨 섭정관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화사하게 웃은 로위나가 다시 옆에 선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된다고 하시네요. 이제 괜찮죠? 킬리언?”

순식간에 낮아진 온도에 사람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당연히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하거나 무시하리라는 대부분의 예상은, 다음 순간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요. 원한다면.”

드물게 의견을 접은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에 굳어 옴짝달싹 못 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다시 로위나의 허리를 휘감고는 멀어졌다.

* * *

하나둘 약혼식 준비가 이뤄지고 섬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무것도 없던 평지에 기둥이 세워지고 작은 예배당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목재를 나르고 못을 박고 재단하는 과정을 지나 이제는 내부만 남은 상황이었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구슬땀을 흘리는 인부들을 보며 로위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그냥 원래 있던 예배당에서 약혼식을 해도 괜찮은데. 굳이 새로 지을 필요까지 있을까?”

중얼거리는 말에 귀가 밝은 조앤이 멜리사에게 귓속말했다.

“로위나 님도 참. 속이 깊으신 건지 속이 없으신 건지. 남편이 전처와 식을 올린 예배당에서 식을 올릴 생각을 하시다니.”

공감을 바랐으나 돌아온 건 냉정한 대꾸였다.

“네가 로위나 님에 대해 뭘 아는데?”

“뭐?”

“모시는 분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 몰라?”

따끔한 일침에 당황한 조앤이 얼굴을 붉혔다.

“아니, 내가 뭐. 험담을 한 것도 아니고…… 있는 사실이잖아? 넌 이해가 돼?”

“왜 이해를 해? 네가 뭔데.”

도리어 되물은 멜리사가 또다시 쏘아붙였다.

“굳이 이해하려 하지 마. 저분 마음은 저분만 아니까.”

이렇게 말하지만 자신 또한 로위나 님에게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가족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한들 배신은 배신이었다.

진실을 알게 되면 그녀가 뺨을 때리고 당장에 쫓아내도 억울하다 호소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죄송했고 그래서 더 충성을 바쳐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고 그래. 내가 잘못했네. 내 잘못이다. 됐냐.”

찔러도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단단한 태도에 쯧쯧 혀를 찬 조앤이 눈알을 굴렸다. 그사이 멀찍이서 토미가 달려왔다. 그녀들을 지나쳐 로위나에게 다가간 토미가 방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로위나 님!”

“토미.”

“말씀하신 대로 가정교사께 쪽지를 전달 드렸어요.”

“고마워. 달리 하신 말씀은 없고?”

“네. 그냥 알았다고만 하셨어요.”

“그랬구나.”

부드럽게 웃은 로위나가 사탕 하나를 토미에게 내밀었다. 머뭇거리며 토미가 받지 않으려고 하자 작은 손에 쥐여 주었다.

“이 심부름은 비밀인 거 알지?”

“그럼요! 누가 물어보면 대충 얼버무릴 거예요.”

“그래. 맞아. 똑똑하구나.”

토미의 머리를 쓰다듬은 로위나가 조앤과 멜리사에게 다가갔다.

별장으로 돌아가는 내내 조앤이 신나게 떠들었다.

“약혼을 앞둔 기분이 어떠세요? 드레스도 어제 가봉했고 초대장도 다 보냈잖아요.”

5년 전의 일을 직접 겪지 않아 누릴 수 있는 천진함이었다. 멜리사와 토미가 입을 다무는 가운데,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로위나가 대답했다.

“글쎄. 이제 겨우 한숨 돌리겠다는 기분?”

“에이, 그게 전부예요?”

특별할 것 없는 대답에 조앤이 입을 비쭉 내밀었다.

“정말 그래. 너도 나중에 같은 입장이 돼 보면 그럴걸.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저와 로위나 님 입장이 어디 같나요. 로위나 님은 상대가 무려 데본셔 공작 저하시잖아요.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로위나의 걸음이 문득 멈췄다. 혹시 괜히 입을 놀렸나 싶어 조앤이 긴장하는 순간, 기함할 물음이 날아왔다.

“그럼 약혼식 날, 나랑 바꿀래?”

“예……?”

“나 대신에 조앤이 드레스를 입고 참석하는 거지. 저하는 어차피 베일을 써서 못 알아보실 텐데.”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면 당연히 농담이라 여겼겠지만 상대는 다름 아닌 로위나였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어 세 사람이 눈빛만 교환하는 사이, 로위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농담. 뭐 그렇게들 놀라?”

“하…… 하하! 아이, 로위나 님도! 그런 농담도 하실 줄 아셨어요?”

“레이첼 백작 부인의 넉살을 좀 배워 봤어.”

순간 얼어붙었던 공기가 숨통이 트이듯 느슨해졌다. 조마조마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멜리사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슬쩍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백작 부인이 오신다고 하셨던 거 같아요. 로위나 님.”

“정말?”

“예. 저도 아침에 정신없을 때 들은 이야기라 미처 말씀 못 드렸나 봐요. 제가 알기론…… 정오쯤이었는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섬의 등대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 * *

“로위나!”

작은 항구에 발을 내딛자마자 마중 나온 로위나를 발견한 레이첼 백작 부인이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가벼운 포옹을 나눈 뒤 두 사람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이렇게 제일 먼저 와 주셔서 감사해요.”

“당연히 와야죠. 우리 사이에.”

눈을 접어 웃은 백작 부인이 마부석 옆에 타는 한 사람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방금 앞에 탄 사람은 누구예요? 전에 못 보던 사람인데. 하인 같지는 않고.”

“아.”

하도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서 있는 줄도 몰랐던 남자였다. 누군지 잠시 생각나지 않아 대답하지 못하던 로위나가 이내 입을 열었다.

“초상화 화가예요. 아직 그림을 완성하지 못해서요.”

“세상에. 약혼식이 며칠 뒤인데 아직도요? 무능한 거 아닌가요?”

“그게 얼굴 부분만 미완이라서요. 다른 건 이미 만족스럽게 그려 놨거든요.”

“어머, 이 아름다운 얼굴을 아직도 못 그렸다고요? 나라면 이미 백 장은 넘게 그렸겠어요.”

백작 부인의 너스레에 조앤과 멜리사가 키득거렸다. 민망하게 웃은 로위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원하는 표정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계속 절 관찰하고 있어요.”

“하긴 예술가들은 대개 예술혼을 불태울수록 무언갈 완성하기 더 어렵다고 하죠. 데본셔 공작가 초상화를 의뢰받은 화가이니만큼 특별하네요.”

물 흐르듯 화가를 포장한 백작 부인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화려하고 큰 건물들이 늘어선 대도시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5년 전에도 이 섬에 와 본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데본셔 공작의 결혼식 때.

성대하고 사치스럽지만 마치 인형극 같은 결혼식이었다. 아름답게 치장한 신부와 그 누구 앞에 서건 빛이 날 정도로 특출난 신랑. 그린 듯한 미남미녀였으나 멀찍이 하객석에서 봐도 마주 보는 두 사람의 거리는 멀다 못해 끝과 끝 같았다.

주례와 축복, 혼인서약을 진행하는 동안 데본셔 공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네. 라는 말만 반복했다. 마치 그가 선 곳이 자신의 결혼식이 아닌 지긋지긋한 무대 위인 것처럼.

격식 있고 웅장한 예식이었으나 사랑도 낭만도 없었다. 인상 깊었던 결혼식이기에 기억에 박히듯 남았다.

그녀는 이번 결혼식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기억 속 모습과는 완전히 다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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