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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55화 (55/120)

55화

잘못은 인정하지만 용서를 바라지 않았다. 인정하고 사과한다면 그녀가 원하는 걸 들어줘야 했고, 그 소원은 아마 그로부터 해방되는 것일 테니까. 순순히 따르는 듯 보이다가도 언뜻언뜻 내비치는 그녀의 진심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발목에 족쇄를 채우기 위해 일방적으로 약혼을 공표한 밤도 그랬었다. 맹렬하게 분노하고 자신을 밀어내던 눈을 떠올리자 가슴이 욱신했다.

그것과 별개로, 그는 로위나의 입장도 이해했다. 분노하는 게 당연했고 밀어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로위나는 반대로 행동했다. 저번엔 이성을 잃고 반항했으나 곧 순종했고 지금도 얌전하게 약혼식을 준비했다. 그게 도리어 불안함이 되어 그를 옥죄였다. 예전에는 얼굴만 봐도 생각이 읽혔던 여자인데 지금은 알 수가 없었다. 겉으론 순종하면서 안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는 잠든 여자의 꿈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 안에 들어가 대체 어떤 감정을 품고 그를 보고 있는지 언제까지 아이의 존재를 숨길 건지 알고 싶었다. 어떻게 해야 5년 전의 과거를 완전히 지워 낼 수 있는지도.

말없이 여자를 바라보는데 로위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반사적으로 귀를 가까이 댄 순간, 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미안해. 데미안…….”

“…….”

“내가……, 나 같은 여자가… 네 엄마라… 미안…….”

서늘한 체온에 안정을 찾은 것도 잠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동시에 알 수 없는 격통에 킬리언이 왼 가슴을 움켜잡았다.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통증이 찾아왔다. 누군가 날카로운 단검으로 심장을 후비는 느낌이었다.

“로위나.”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킬리언은 눈물에 엉겨 붙은 긴 속눈썹과 축축해진 눈동자를 새겨 담았다. 잠에서 완전히 깬 것은 아닌지 몽롱한 초록색 동공이 그를 올려다봤다.

“킬리언.”

“…….”

“당신이 싫어.”

“……나도 알아.”

조금 전보다 더한 격통이 찾아들었다. 킬리언은 가까스로 표정을 정리했다.

“아니. 몰라. 모를 거야.”

“그럼 알려 줘. 얼마나 날 원망하는지.”

“싫어.”

꿈이라 확신했는지 단호하게 거절한 로위나가 눈물을 닦아 내던 그의 손을 치우고 반대로 돌아누웠다.

흐트러진 금발을 쓸어내리는데 킬리언의 왼팔이 잘게 경련했다. 오른손으로 팔을 잡은 그가 밭은 신음을 내뱉었다. 아무렇지 않게 제녹의 말을 무시했으나 점점 주기가 짧아지고 고통도 심해지고 있었다. 숨을 고르며 킬리언은 고통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이 나라를, 이 성을, 이 여자 옆을 떠날 수가 없었다. 법적으로 완전히 옆에 묶어 두기 전까지는.

* * *

섬으로의 여정은 평탄했다. 짧지 않은 여로에도 자잘한 문제 외에 발목이 묶일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날씨는 내내 화창했고 바다도 얌전했다. 배를 처음 타 본 데미안은 뱃멀미는커녕 밤만 되면 갑판을 뛰어다녔다.

“엄마! 로프스 섬은 얼마나 커?”

“글쎄? 수도의 두 배 정도?”

“엄청 크다! 내 또래 친구들도 많을까?”

“그건 모르겠네. 형들은 많을 거야.”

잔잔한 밤 물살을 바라보며 로위나가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나서 한참 발을 구르던 데미안이 유모의 손을 잡고 자러 간 사이, 그녀는 이곳을 떠나던 새벽을 생각했다.

그 어떤 단어로도 형용할 수 없는 새벽이었다. 그녀 인생을 통틀어 절대 잊을 수 없는 새벽.

눈물도 말라붙었고 지난밤 쏟아 낸 감정도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속이 파인 채 껍질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가벼운 짐가방 하나만을 든 채 홀연히 별장을 나왔다. 잡는 이 하나 없이 그대로 첫 배에 올라탔다. 이 배보다 훨씬 작고 초라한 배 위에서 그녀는 바다에 몸을 던질 생각이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사라지고 싶었다. 어느 동화의 인어처럼 그대로 물거품이 되어 산산이 바다에 흡수되고 싶었다. 이름도 육신도 영혼도 샅샅이 흩뿌려져서 사랑했던 기억도, 길고 길었던 밤도 전부 없었던 것처럼 지우고 싶었다.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직전, 데미안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더라면.

그토록 미워하고 원망하는 킬리언의 아이였지만 지우려는 생각은 하늘에 맹세코 하지 않았다. 비록 열 달 동안 배에 품어 낳은 보람도 없이 친부의 얼굴을 빼닮았지만.

“꺅!”

상념에 젖은 사이 등 뒤로 다가온 사람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완연한 봄이지만 바닷바람은 쌀쌀했다. 로위나가 깜짝 놀라 돌아볼 새도 없이 두툼한 숄을 걸쳐 준 킬리언이 긴 금발을 숄 위로 빼내 흘러내리게 했다.

“로위나.”

“놀랐잖아요.”

가슴을 쓸어내린 로위나가 밉지 않게 그를 흘겼다. 난간을 짚은 로위나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친 킬리언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 맞췄다.

숄을 둘러 주는 배려도 이런 스킨십도 어느덧 익숙해진 로위나가 가만히 긴장했던 몸에 힘을 뺐다.

“뭘 보고 있죠?”

“아무것도요.”

“당신, 뭔가 생각할 때 아랫입술을 말아 물잖아.”

“예?”

처음 듣는 소리였다. 홱 몸을 돌려 킬리언을 마주한 로위나가 안 믿긴다는 얼굴로 거듭 물었다.

“정말이에요? 제가 그런 습관이 있다고요?”

“몰랐군요.”

“거짓말.”

“정말인데.”

피식 웃은 킬리언이 허전한 그녀의 목으로 시선을 내렸다.

“목걸이는 요새 안 하는군요.”

“그게…….”

방심한 사이 날카롭게 치고 들어오는 말에 어색하게 웃은 로위나가 변명했다.

“당신이 준 약혼 목걸이는 귀한 거잖아요. 잃어버릴까 무서워서요.”

사실은 의미를 알게 된 이후 도저히 목에 걸칠 수가 없었다. 견고한 목줄처럼 느껴져 숨이 막혔다.

“당일에는 꼭 할게요. 그나저나 섬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대요?”

슬그머니 화제를 돌린 로위나가 그의 가슴에 살포시 뺨을 묻었다.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킬리언이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줬다.

“……궁금합니까?”

그녀의 비참한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로위나가 왜 하필 이 섬을 골랐는지 알 수 없지만, 섭정관을 비롯해서 섬사람들의 거처를 별장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옮기게 한 상태였다.

“그럼요. 궁금하죠. 나한테 잘해 준 사람들인데.”

긴장한 킬리언과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꾸한 로위나가 대답을 재촉했다.

“잘 지내고 있대요? 토미는요? 건강하고요?”

이번만은 연기가 아닌 진심이었다. 비록 정부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그녀를 멀리하고 다른 눈으로 보던 사람들이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섬에 홀로 머무는 동안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기억은 따스하게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어린 토미는 더더욱.

“궁금하면.”

생각이라도 읽어 내려는지 새파란 눈동자가 빤히 그녀를 응시했다.

“직접 봐요.”

“역시 모르시는군요. 잘 지내고 있다면 좋겠는데. 알았어요.”

입술을 비죽 내민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허리를 고쳐 안으며 킬리언은 잔잔한 밤바다를 바라봤다. 낮은 파도가 뱃전에 닿아 철썩이고 새카만 하늘에는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달이 은은하게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너무 추워요. 저는 이제 들어갈래요.”

바람이 더 쌀쌀해지자 숄을 여민 로위나가 그의 가슴을 슬쩍 밀었다. 그대로 뒤돌아 멀어지는 로위나의 발목을 나직한 목소리가 붙잡았다.

“왜.”

“…….”

“왜 이 섬입니까?”

질문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간 두 사람 사이에 암묵적으로 피해 왔던 5년 전의 일을 불러일으켰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기억에 기억을 덧씌우고 싶다고요.”

로위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뒤를 돌지는 않았다. 어둡다 해도 표정을 들킬까 무서웠다.

“그럼 들어갈게요. 저하도 어서 들어오세요. 밤바람이 정말 쌀쌀하네요.”

빠르게 말을 끝맺은 로위나가 도망치듯 잰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 * *

킬리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로위나가 두 눈을 비볐다.

“많이 변했네요.”

별장은 5년 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조리 재건축된 모습이었다. 하다못해 뜰에 만개했던 꽃들도 전부 바뀌어 있었다.

“오시기 전에 다 바꾸었대요. 마음에 드세요?”

“응. 예쁘네. 좀 더 밝아진 느낌이야.”

멜리사의 귀띔에 빙긋 웃은 로위나가 킬리언의 손을 잡고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섭정관 가족이 하인들의 맨 앞에서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저하. 어서 오세요. 로위나 님.”

깍듯하게 허리를 숙인 섭정관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장갑을 벗은 킬리언이 꼼꼼히 홀을 살폈다. 식은땀을 몰래 닦으며 섭정관이 그의 말을 기다렸다.

두 달 전, 이 별장에 예전의 흔적은 하나도 남기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졌었다. 지원 온 건축가와 일꾼들이 들이닥쳐 공문을 읽었던 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선뜩했다. 어떻게든 기한에 맞추기 위해 하인들은 물론이고 섬사람들까지 동원해 별장 공사와 일대 미화까지 마치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수고했습니다.”

계단 난간의 작은 장식까지 매의 눈으로 살핀 후에야 킬리언의 입에서 합격이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잔뜩 긴장한 채 그의 입만 바라보던 섭정관과 하인들이 거의 동시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훨씬 밝아진 얼굴로 섭정관이 입을 열었다.

“피곤하실 것 같아 욕실에 미리 물을 데워 놓았습니다.”

바로 하녀에게 안내하라 지시하려 고개를 돌리는데, 로위나가 반가운 얼굴로 쭈뼛쭈뼛 선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토미.”

어느새 훌쩍 자란 토미를 보니 지나간 세월을 체감했다. 반가운 얼굴로 로위나가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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