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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54화 (54/120)

54화

“좀 더 진하게 하는 게 좋겠어.”

“네?”

“립스틱은 붉은색으로 하고 눈두덩도 뭔가 화려하게 강조했으면 해.”

이어진 요구에 휘둥그레진 표정으로 멜리사와 조앤이 얼굴을 마주 봤다. 로위나는 웬만해서는 꾸미는 것에 크게 의견을 내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얼마 전 여우 사냥 모임의 절정인 만찬회에서도 대부분 조앤의 손에 맡길 정도였다.

“혹시 어려울까?”

“아, 아니요. 당연히 되지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개를 저은 멜리사가 그녀의 요구에 따라 화장을 고쳤다. 로위나의 얼굴 위로 슥슥 부드러운 브러쉬가 움직였다. 잠시 후 다 됐다는 말에 눈을 뜨자 찬탄이 쏟아졌다.

“아까도 아름다우셨지만 지금은 또 화려한 게 어울리시네요.”

“그러게요. 하긴 심혈을 기울여 만드는 초상화인데 기왕이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 게 좋지요.”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리는 보람이 특별할 것 같네요.”

이어진 칭찬에도 잠깐 웃고 만 로위나는 조앤에게서 거울을 다시 받았다. 좀 전보다 훨씬 짙어진 화장으로 방금 겹쳐졌던 소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걸로 괜찮겠지.”

“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시작할까요?”

거울을 다시 조앤에게 돌려준 로위나가 멀찍이 선 화가에게 물었다. 뺨을 붉힌 화가가 의욕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 자세를 잡아 주시면 됩니다.”

* * *

초상화 작업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스케치 작업만 하루 두 시간씩 한 달간 이어졌다. 배경은 미리 그려 놓은 상태고 자세도 잡아 놨으나 표정이 문제였다.

화창하고 따스한 자연 배경과 우아한 드레스, 마찬가지로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여자의 초상화엔 얼굴만이 비어 있었다.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킬리언에게 제녹이 슬그머니 설명했다.

“화가가 워낙 예술가로서 자존심이 강하다 보니 고집도 세고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완성하지 않기로 유명해서요. 예약이 향후 5년간은 잡혀 있는지라 섭외도 사실 여기저기 손을 써서 힘들게 하긴 했는데…….”

문제는 이게 약혼식 날 정식으로 가문의 회랑에 올라갈 초상화라는 점이었다. 앞으로 불과 석 달이 남은 시간 동안 저 까다롭고 예민한 화가가 초상화를 완성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좀처럼 마음에 드는 미소가 나오지 않는다고, 그 미소를 보면 바로 그려 넣겠다고 주장 중입니다. 내일이면 섬으로 가는데…… 압력을 넣을까요?”

“아니.”

고개를 저은 킬리언이 옆에 선 하인에게 눈짓해 그림을 치우게 했다.

“섬으로 동행시켜요.”

“네?”

“딱 붙어 따라다니다 보면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나쯤은 건지겠지. 그보다 베네딕트는?”

“아무래도 외국 별장에서 불에 타 죽은 게 맞는 모양입니다. 이게 나왔답니다.”

제녹이 품에서 꺼낸 건 베네딕트 서섹스의 이름이 새겨진 회중시계였다. 장인에게 직접 의뢰하여 주문한 거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시계였다.

“죽어도 품에서 떼어 놓지 않았으니…… 그날 잠자리를 정리하던 하인의 증언도 있고 확실한 것 같습니다. 아마도 돌아오라는 명령서를 받고 저하께서 모든 내막을 알았다는 걸 눈치챘겠지요. 파견한 조사관 세 명도 모두 자살로 결론 내렸습니다. 보고서는 여기 있습니다.”

한때 데본셔 공작가의 오른팔로 막대한 권력을 행사했던 자의 최후치고는 비참한 끝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베네딕트 서섹스를 동정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에 여왕을 좀 더 지켜봤으나 그녀 또한 아니었다. 이는 킬리언 본인이 직접 로위나와의 결혼 허락과 더불어 직접 담판을 지은 부분이니 확실했다.

제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거운 침묵이 집무실에 내려앉았다. 회중시계를 물끄러미 보던 킬리언이 보고서와 함께 그것을 그대로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집사와 마찬가지로 긴 시간을 함께해 온 부하이자 스승이었으나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 버린 자였다. 자비는 없었다.

“남작을 따르는 이들이 있었지. 숨어 있는 잔당들까지 전부 잡아들여요. 한 명도 놓치지 말고.”

“알겠습니다.”

남아 있는 한 톨의 감정마저 모조리 지워 버린 킬리언이 가죽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성의 현관홀 앞에선 일꾼들이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다섯 대의 짐마차에 섬에서는 구할 수 없는 식료품과 목재들을 가득가득 채워 넣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그는 알 수 없는 감정에 눈을 좁혔다.

문제 따위는 없었다. 분명 모든 게 그의 계획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약혼 발표에 흥분한 로위나가 반발하긴 했으나 결국 받아들였고, 데미안도 약혼식 날 존재를 발표하고 결혼식 전에 친자로 입적하여 후계로 올릴 생각이었다.

약혼 발표와 친자의 존재를 같이 알리지 않은 건 안 그래도 충격을 받을 그녀를 배려해서였다.

모든 게 그가 원하는 대로 굴러가는데 가슴 한편에 무언가가 계속 걸렸다.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손톱 밑 가시처럼 부지불식간에 느껴져 그를 건드렸다.

한참 창밖을 바라보던 킬리언이 뒤를 돌았다.

“로위나는?”

“어제 늦은 밤까지 행장을 관리하느라 피곤하셨는지 정오 즈음 침실로 드셨답니다. 도련님은 현재 수업 중이시고요.”

“그 선생이라는 작자, 확실하게 신원 조회 한 거겠지?”

“그럼요. 그 부분은 펠릭스 님께서 보증해 주셨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애써 찜찜한 기분을 내리누른 킬리언이 제녹의 옆을 지나쳤다.

“저기…… 저하.”

문고리를 돌리는데 제녹이 어렵게 그를 붙잡았다.

“왼팔, 괜찮으십니까?”

그의 말에 킬리언이 제 왼팔을 내려다봤다.

저번 공원에서 데미안을 감싸다 개에게 물린 뒤로 후유증이 남은 부위였다. 주치의의 필사적인 처치로 살이 아물고 겉으로 보았을 땐 아무 이상이 없으나 종종 팔이 경련하고 끔찍한 통증이 찾아왔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어 증상이 발현할 때마다 진통제를 먹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옆 나라는 더 의학이 발달했답니다. 그곳으로 가셔서 더 정밀하게 검사를 받으시는 게…….”

“그럴 여유가 없어.”

부하의 염려 어린 조언을 끊어 낸 킬리언이 마저 문을 열어젖혔다.

집무실을 나와 그는 깊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하인과 하녀들을 지나쳐 계단을 올라 침실문을 열어젖혔다. 동시에 조심스레 커튼을 치던 멜리사와 조앤이 놀란 토끼처럼 그를 바라봤다.

“저, 저하!”

“쉿.”

예를 갖춰 인사하려는 두 사람에게 말없이 나가라 눈짓한 킬리언이 침대로 다가갔다.

두 사람이 누워도 한참 남는 커다란 매트리스 위에 로위나가 동화 속 공주처럼 잠들어 있었다.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히 걸음을 옮긴 킬리언이 침대 머리맡으로 스툴을 끌어다 앉았다.

열기를 담은 눈이 자고 있는 여자의 구석구석을 관찰했다.

금 실타래처럼 하늘하늘하게 어깨를 덮고 내려온 머리칼과 길게 내려앉은 속눈썹. 높고 오뚝한 코와 적당하게 두툼한 입술.

지난 5년, 아이를 낳고 고생을 했어도 노동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여자였다. 첫 만남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킬리언 씨는 과일 중 뭘 제일 좋아하세요? 전 산딸기를 제일 좋아하는데…….

그는 기차 안,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부끄러워하며 두 손을 꼼지락거렸던 여자를 떠올렸다.

―저는 골짜기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이번에 처음 도시로 가는 거라 정말 기대되고 또 떨려요. 걱정되기도 하구요.

매끈한 도자기 같은 뺨을 붉게 물들이던 수줍은 홍조와 이가 드러날 듯 말 듯 했던 순수한 웃음.

“초상화는…… 그거면 될 것 같은데.”

그 미소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떠올려 봤으나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순간을 영원히 박제해 둘 수만 있다면 기억 속의 웃음을 얼굴만 텅 비어 있는 초상화에 그대로 옮겨 넣고 싶었다.

“으음…….”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무슨 악몽이라도 꾸는지 미간을 찡그린 로위나가 뒤척였다. 반대쪽으로 돌아누우려는 몸을 제게로 돌린 킬리언이 습관처럼 팔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서 눈까지 천천히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남들보다 손이 차가운 그와 달리 로위나는 아이처럼 체온이 높은 편이었다. 그가 반복해서 이마와 눈, 뺨을 쓸어내리자 기분 좋은 서늘함에 표정을 풀었다. 그 모습을 보며 킬리언이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무슨 꿈을 꾸는 중입니까?”

“…….”

“뭐가 나오길래 그런 얼굴을 하지?”

나직한 물음에 대답은 없었다.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은 로위나가 따끈한 목 쪽으로 그의 손을 가져갔다.

“그 꿈에 나는 없습니까?”

깊게 잠든 그녀가 대답할 리 만무하지만 그는 거듭 물었다.

“난 당신에게 악몽일 뿐이겠지.”

5년 전, 그가 잔인하게 그녀를 버렸던 건 무슨 변명으로도 덮을 수 없는 잔인한 과오였다.

그런데 그는 모든 전말을 알고도 그녀에게 이렇다 할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기꺼이 덮는 쪽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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