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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53화 (53/120)

53화

“…….”

물에 젖은 강아지가 귀를 내린 채 올려다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말없이 시선을 피한 킬리언이 보보의 머리를 쓰다듬는 사이, 슬쩍 머리를 굴린 데미안이 불쑥 물었다.

“아하. 못하니까 그런 거죠?”

“……뭐?”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는 듯 귀를 의심한 킬리언이 고개를 홱 돌렸다. 월척을 건진 표정으로 데미안이 뻐기듯 말했다.

“못하니까 창피해서 그러는 거 아녜요? 맞죠?”

“꼬마야. 난 못하는 게 없어.”

“거짓말.”

“…….”

킬리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잠시 움츠러든 데미안이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

“엄마가 그랬어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누구나 하나쯤 약점을 가지고 있고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가 있다고.”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데미안은 그가 당연히 그것 또한 아니라고 할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받아칠지 고민하는데 의외로 순순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그럴 수도.”

“네?”

이번에 귀를 의심하는 쪽은 데미안이었다. 절대 자기 의견은 굽히지 않을 것 같은 어른이 도리어 무릎을 접어 앉더니 눈높이를 맞췄다.

“엄마가 또 뭐라고 했는데?”

“그게…….”

밀어붙일 때는 언제고 다가온 얼굴에 슬그머니 시선을 옆으로 돌린 데미안이 두 검지를 비볐다.

“공놀이를 같이 해 주면 기억날 거 같기도 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일어나는 킬리언을 본 데미안이 제 입을 때렸다. 괜한 말을 덧붙인 모양이었다. 또 그대로 가는 건 아닐까 걱정돼서 올망올망한 눈으로 올려다보는데 킬리언이 입매를 늘렸다. 놀라 눈을 깜박이는 데미안에게 뜻밖의 통보가 날아왔다.

“시작.”

“네?”

어안이 벙벙해진 데미안이 되묻기 무섭게 킬리언이 툭 떨어진 공을 성곽 쪽으로 찼다.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공을 벙찐 채 보던 데미안이 뒤늦게 킬리언의 뒤를 쫓았다.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딨어요! 아저씨 반칙!”

* * *

두 사람의 약혼 소식에 멜리사와 더불어 가장 크게 기뻐한 이는 다름 아닌 집사였다. 5년 전 정부와 집사 관계라 데면데면했던 게 거짓말 같게도 그는 로위나에게 많은 걸 의지했다.

“그럼 약혼식 때 오실 초대장 명단은 이쯤으로 마무리 짓는 거로 하죠.”

“네. 그게 좋겠어요. 수고하셨어요.”

“아닙니다. 제 일인 걸요. 그리고 말씀 이제 편하게 하세요. 곧 마님이 되실 텐데.”

스스럼없는 태도에 가만히 웃은 로위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아직 아니잖아요.”

“와인 창고 열쇠도 마다하시고.”

“집사님이 잘하고 계시니까요. 나중에 제가 달라고 할 때 숨기시면 안 돼요.”

“아이고, 숨기다니요. 무슨 그런 말씀을.”

곧 그가 모실 여주인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는 화술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넉살 좋은 농담에 파하하 웃음을 터뜨린 집사가 서류를 품에 안아 들었다. 그대로 집무실을 나서던 그가 불쑥 걸음을 멈췄다.

“로위나 님.”

약혼식 때 쓰일 식자재와 악단 명단을 추리고 있던 로위나가 고개를 들었다.

“네?”

뒤를 돈 집사가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관찰이나 경계의 눈빛이 아닌, 제레미가 조카인 로위나를 바라볼 때의 눈빛이었다. 할 말이라도 더 있느냐고 묻는 얼굴에 집사가 부드럽게 웃었다.

“로위나 님은 참 좋은 분입니다.”

“…….”

“5년 전엔 미처 몰랐지만 마음도 넓고 섬세하고 사려 깊으시죠. 솔직하시고요.”

“과찬이세요.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뜬금없는 칭찬에 얼굴을 붉힌 로위나가 손사래를 쳤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지금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순종의 가면을 쓴 채 킬리언을 대하고 치러지지도 않을 약혼식 준비를 분주히 하고 있지 않은가.

“공작 저하께서는…….”

뭔가 생각하듯 잠시 말이 없던 집사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 그리 좋은 분은 아닙니다.”

벼락 같은 소리였다. 제녹 못지않게 높은 충성심으로 킬리언을 모시던 집사의 입에서 험담 아닌 험담이 나오자 놀란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종이를 구겼다.

“차갑고 잔정이 없으시죠. 끊어 낼 때는 누구보다 칼 같으시고 또.”

“…….”

“남보다 더 감정이 결여되어 있으세요. 그분을 태어날 때부터 모셔 온 제가 봐도 그렇습니다만, 아마 로위나 님께서도 다르지 않겠죠.”

구구절절 옳은 소리였다. 로위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그분은 특히 한 가지 감정을 모르십니다. 선망과 존경, 두려움은 많이 받아 봤으나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애정, 연인이 연인에게 주는 애정. 인간이 인간에게 가장 흔하게 주는 애정을 받아 보신 적이 없으니까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밀랍 인형이라도 된 듯 굳어 버린 로위나를 향해 집사가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사고로 돌아가시고 얼마 뒤엔 어머니께서 정양을 하러 가신다고 먼 외국의 친정으로 가셨죠. 그리고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들은 적 있어요.”

작은 목소리로 로위나가 중얼거렸다. 용케 대답을 들었는지 집사가 옅게 미소 지었다.

“명민하신 분이라 홀로 되셨을 때도 의젓하게 잘 자라 주셨지만, 어린 상속자를 노리는 이는 많았습니다. 환심을 사 이용하려 드는 이도 파다했고, 몇 번이고 살해 위협을 받으시며 죽을 고비를 넘겨 오셨죠. 그 과정에서 점점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정이 되신 걸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그분이 더 안타깝고…… 또 안타깝습니다. 모두가 그분을 부러워한다 해도요.”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심이 깊게 담긴 목소리였다. 로위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서 로위나 님을 모셔 오셨을 때 전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로위나 님과 마주할 일도 없었고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일도 없었죠.”

“집사님…….”

“하지만.”

목소리에 힘을 준 집사가 밝은 얼굴을 했다.

“지금은 희망이 보입니다. 한걸음 뒤에서 두 분을 바라보면 분명 멋진 변화가 일어날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공작님도 점차 바뀌고 계시고요.”

바뀌고 있다? 킬리언이?

처음 듣는 깊은 과거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던 로위나가 고개를 젓는 대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집사가 조근조근 말을 끝맺었다.

“로위나 님을 보실 때면 눈빛이 얼마나 부드러우신지, 오랜 기간 모셨던 저조차 믿기지 않을 정도랍니다. 그래서 그분의 변화를 만드신 로위나 님께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쑥스럽게 웃은 집사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훌쩍 서재를 나갔다.

그 뒤로도 로위나는 한참이나 남은 일을 처리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 읽히던 활자가 머릿속에서 춤을 추며 저들끼리 얽히고설키고 있었다. 이제 와 결심이 흔들리거나 마음이 흐려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들은 이야기에 속이 술렁거렸다.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아 이만 일어나는데 누군가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로위나 님.”

제녹이었다. 허락을 받은 제녹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오늘 치수 재는 날이던가요?”

“그것도 있지만…….”

제녹이 안내한 곳은 볕이 잘 드는 중정이었다. 커다란 느릅나무 아래 장미목 의자와 까치발 테이블, 그 위로 레이스 천과 과일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뭔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에 의아해하던 로위나에게 이젤 앞에 앉아 있던 화가가 일어나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저쪽으로 앉으시면 됩니다.”

“이게 무슨…….”

두 눈을 홉뜬 로위나가 제녹을 바라봤다. 제녹이 의자 쪽을 공손히 가리켰다.

“오늘부터 로위나 님의 초상화 작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데본셔 공작 가문은 회랑에 가문 사람의 초상화를 걸어 두는 오랜 전통이 있어서요.”

회랑 하니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베네딕트가 보여 주었던 초상화들. 그녀와 닮았던 태중 약혼녀의 초상화.

“왜 그러십니까? 속이 안 좋으세요?”

로위나의 얼굴이 창백해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멜리사와 조앤이 다가왔다.

“너무 힘드시면 내일부터 하신다고 해도…….”

“아니. 난 괜찮아.”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의자에 앉았다. 좋은 날씨였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나부끼며 솨아아 듣기 좋은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일단 화장을 고쳐 드리려고 하는데.”

로위나 앞에 무릎을 꿇어앉은 멜리사가 옆에 화장품이 든 박스를 내려놨다.

“괜찮아. 정말이야.”

“그럼 잠시만 계세요.”

부드러운 미소에 안심한 멜리사가 옅은 색의 립스틱을 그녀의 입술에 덧발랐다. 마찬가지로 생기를 더하기 위해 뺨에 블러셔를 바르자 파리했던 얼굴은 금세 활기 넘치는 얼굴로 탈바꿈했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이상, 화장은 진하게 하시는 편이 아니라 조금만 고쳤어요.”

멜리사가 설명하는 동안 조앤이 손거울을 그녀에게 가져다줬다. 로위나는 거울 너머로 비친 여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소름 끼칠 정도로 초상화 속 소녀와 비슷했다. 로위나는 속이 거북할 정도로 불쾌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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