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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52화 (52/120)

52화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는데요?”

울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예상과 달리 핏기가 빠져나간 얼굴은 의외로 담담했다. 손을 치운 킬리언이 차분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외국에 보낸 상태이니 돌아오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돌아오는 즉시 붙잡아 처분할 생각입니다.”

로위나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초조한 느낌에 그가 그녀를 불렀다.

“로위나.”

대답 대신 로위나는 시선을 피했다. 분노가 지나고 찾아온 건 환멸이었다. 만약 서섹스 남작이 음모를 꾸미지 않았더라면. 그래도 결과가 달라졌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시간이 늦든 빠르든 킬리언은 그녀를 버렸을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그녀가 베네딕트보다 더 화가 나는 대상은 바로 눈앞의 남자였다.

킬리언 또한 측근에게 교활하고 치밀한 배신을 당한 셈이었지만, 로위나는 그가 전혀 가엾지 않았다.

서섹스 남작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그녀를 모함할 것을 그가 허락해서였다. 그의 밑바닥에 깔린 불신을 읽어낸 남작이 이를 이용한 거니까. 만약 그가 그녀를 믿었더라면 음모는 통하지 않았을 것이고, 5년 전의 비참한 밤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킬리언의 이러한 불신은 뿌리가 깊어 차마 그 근원을 알아보기도 힘든 그의 일부였다. 서섹스 남작은 그 불신을 역이용해서 교묘하게 덫을 놓은 셈이었다.

로위나는 문득 그가 가진 뿌리 깊은 인간 불신의 배경이 궁금했다. 특히 여자를 향한.

그러나 충동적으로 열렸던 입술은 그대로 닫혔다.

“당신이.”

길게 숨을 뱉어 낸 킬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감사해요.”

차갑게 인사한 로위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대로 침실로 가려다 뒤를 돌았다.

“……혹시 더 하실 말씀은 없나요?”

미안하다거나 그때 그러는 게 아니었다거나. 잘못 판단했다거나. 로위나는 사과까진 아니더라도 후회 비슷한 말이라도 나오길 기대했다. 진심으로 후회하고 사과해도 받아 줄 생각은 없었지만, 이 남자가 한 번이라도 그녀에게 꺾여 준다면 단단히 뭉친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릴 것만 같았다.

“할 말?”

오랜만에 궐련을 꺼내 든 킬리언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리어 무슨 말이냐 되묻는 듯 눈썹을 치켜올린 얼굴에 로위나의 입에서 작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 하.”

“…….”

그래. 그는 이렇게 나오는 게 맞았다. 뭘 기대했는지. 오히려 변한 게 없기를 바라지 않았나.

“아니에요. 오늘 저 먼저 잘게요.”

언제 긴장했냐는 듯 느슨해진 얼굴로 로위나가 다시 등을 돌렸다.

그녀가 침실과 다이닝 룸을 나누는 천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킬리언은 침실 쪽으로 오랫동안 시선을 고정했다. 불도 붙이지 않은 궐련을 손에 든 채로.

* * *

“엄마!”

“데미안!”

고작 며칠만의 재회인데도 모자의 상봉은 애틋했다. 쪼르르 다가와 안긴 데미안의 양 뺨에 입을 맞춘 로위나가 연신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아버지랑 잘 있었어?”

“응!”

“공부도 숙제도 잘하고?”

“그럼! 나 완전 똑똑해. 엄마!”

에헴, 있지도 않은 콧수염을 매만지며 가슴을 편 데미안이 자랑스레 말했다.

“다 백 점이다? 특히 언어에서!”

“핏줄은 속일 수 없다더니 누가 지 엄마 아들 아니랄까 봐.”

“외삼촌?”

슬쩍 끼어든 제레미에게 로위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눈을 가늘게 뜬 제레미가 샐쭉 웃었다.

“네가 쓰던 글을 읽었다. 멜리사란 하녀가 내 글 아니냐며 갖다주던데.”

“네에?”

“생각보다 읽을만하더라.”

제레미가 등 뒤에 숨겼던 원고를 흔들었다.

“아이참!”

순식간에 빨개진 얼굴로 로위나가 원고를 그의 손에서 가로챘다.

“멜리사는 이걸 어떻게 찾아서…….”

“출간해도 되겠던걸.”

“무려 5년 전 원고에요. 낮에 틈틈이 보고 고치는 중이라 그나마 좀 볼만해진 거고요.”

한때 출간을 하려 했던 그 원고였다. 지금에야 알았지만, 모든 것의 원인이 된 소설. 하지만 5년 전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글이 싫거나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낼 생각은?”

“모르겠어요. 그냥 쓸 뿐이에요.”

“그러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 제레미가 대뜸 데미안에게 제안했다.

“데미안. 약속했던 숙제도 다 했으니 오늘은 나가서 공 차고 놀까?”

“좋아요!”

“좋아. 그럼 먼저 가서 옷 갈아입고 준비하고 있어.”

방방 뛰던 데미안은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유모들에게 달려갔다. 데미안이 자기 방으로 간 뒤에야 제레미가 진지한 얼굴로 벽난로 앞 스툴에 앉았다.

“대체 이게 뭐냐. 로위나.”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신문을 눈짓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로위나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신문 일 면에 대서특필 된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약혼 소식이었다.

“이거 사실 아니지?”

“외삼촌…….”

“그냥 잘못 알려진 거지?”

이어진 질문 세례에 로위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이에요.”

“뭐?”

“……그렇게 됐어요.”

“로위나!”

벌떡 일어난 제레미가 얼굴을 구겼다.

“지금 제정신……!”

“어쩔 수 없었어요. 나도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고요.”

홱 고개를 쳐든 로위나가 그의 말허리를 끊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됐어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마주한 초록색 눈이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결국 무거운 한숨을 내뱉은 제레미가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그냥 개새끼인 줄만 알았는데 미친 개새끼였군.”

신분 경계가 흐릿해졌다 한들 공작은 공작이며 왕족은 왕족이었다. 누가 듣는다면 당장 교수대에 서도 할 말 없는 욕설을 한참 지껄인 제레미가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제 어쩔 생각이냐? 로프스 섬에서 약혼식이라니. 설마 마음이 바뀌었다고는 하지 않겠지.”

“그럴 리가요.”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대꾸했다.

“이 일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어요.”

“뭐?”

“외삼촌, 극작가이기도 하셨잖아요. 모름지기 비극은 관중이 많아야 더 효과적인 거 아닐까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잠시 이해하지 못한 제레미가 눈만 깜박였다.

“너 그, 그 말은.”

“증인이 늘어났잖아요.”

로위나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옅은 광기가 흘러 제레미는 그저 입만 벙긋했다. 미친 건 공작 놈 하나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의 하나뿐인 조카 또한 이상해져 있었다. 하기야 이 관계에서 미치지 않는 게 더 힘든 일이었다.

“많은 사람이 제 죽음을 보고 소문이 퍼져 기사화된다면 아무도 부정할 수 없게 되겠죠.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거고요.”

“……로위나.”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물어봐도 로위나는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조심히 이름을 부르자 로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괜찮아?”

“네?”

“괜찮으냐고.”

“그럼요.”

“그래…….”

본인이 괜찮다 하니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 이상한 성에서 벗어나면 다시 괜찮아지겠지. 잠시 망설이던 제레미가 팔을 벌렸다. 머뭇거리던 로위나가 그의 품에 안기자 등을 쓸어주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로위나.”

“외삼촌…….”

“고생 많았다.”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외삼촌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한참 후에야 진정된 로위나의 어깨를 잡은 제레미가 진지한 얼굴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건 그렇고 계획 말인데. 이제 네게 상세히 말해 줄게.”

* * *

움직이기 편한 활동복으로 갈아입은 데미안은 신난 상태였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기분에 공을 통통 무릎으로 튕겨 올렸다. 그 모습에 유모가 흐뭇해하며 말을 걸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응!”

“공놀이는 종종 저랑 했잖아요.”

“하지만 선생님이랑 하는 건 다른걸.”

“뭐가 달라요?”

“그게…….”

눈을 동그랗게 뜬 데미안이 설명하려고 입을 여는데, 하인용 뒷문으로 나온 누군가가 다가왔다.

“유모님.”

“네?”

“잠시 와 보셔야겠어요. 오늘 밤 출근이었던 보조 유모인 앤지가 다쳤는지 동생이 왔어요.”

“그래요? 알았어요.”

급해 보이는 얼굴에 고개를 끄덕인 유모가 잠시 머뭇거리다 데미안 쪽을 바라봤다. 이야기 중이었던 걸 까먹은 건지 이미 호수 쪽에서 혼자 공을 차고 있었다. 데미안 옆으로 커다란 개 보보가 서성이며 공을 따라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잠깐은 괜찮겠지…… 개도 있고 선생님도 바로 오실 거고.”

중얼거린 유모가 뒤를 돌았다. 혼자 남겨진 데미안이 공을 멀리 찼다.

“가져와, 보보!”

말귀를 알아들은 개가 수풀 쪽으로 뛰어들었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꼬리를 보며 데미안이 아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수풀 속으로 사라졌던 보보가 사람을 한 명 데려왔다.

“어? 유령 아저씨!”

데미안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킬리언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달려간 데미안이 그에게 매달렸다.

“유령인데 낮에도 나와요?”

“그렇다고 치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대꾸한 킬리언이 손에 든 공을 내밀었다. 공을 건네받은 데미안이 대뜸 제안했다.

“저랑 공놀이해요!”

“공놀이?”

“네! 아저씨 어렸을 때 안 해 봤어요?”

“안 해 봤어.”

“왜요? 아저씨도 저처럼 아버지가 없었어요?”

“……응.”

“그럼 친구는요? 친구도 없었어요? 친구랑 공차면 재밌는데.”

다다다 밀려드는 질문에 킬리언이 말없이 아들을 바라봤다.

“그럼 특별히 내가 알려 줄게요! 좋은 아빠가 되려면 공놀이는 알아야 해요!”

모처럼 뽐낼 기회였다.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쳐든 데미안이 선심 쓰듯이 말하자 피식 웃은 킬리언이 작은 이마를 검지로 꾹 밀었다.

“필요 없어.”

“……정말요?”

의기양양한 것도 잠시, 담백한 거절에 언제 당당했냐는 듯 데미안이 입매를 내렸다.

“저랑 공놀이하기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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