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약혼?
로위나는 힘없이 떨어진 제 손을 내려다봤다. 제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커다란 손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대체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머릿속에서 모든 게 엉클어지고 뒤죽박죽이 된 기분이었다.
여러 가지 상황을 생각했지만 이런 장면은 생각한 적이 없었다.
“로위나.”
인형처럼 굳어 버린 로위나의 어깨를 다른 손으로 잡은 킬리언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웃어요.”
대답 대신 로위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코와 코가 옆으로 맞닿고 뜨거운 숨이 얽혔다.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떤 로위나가 나직이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예요?”
“뭐가 문젭니까? 당신이 원하는 걸 텐데.”
담담하게 대답한 킬리언이 그녀의 몸을 제게로 돌리게 했다. 검지로 로위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없이 두 사람의 시선이 치열하게 허공에서 줄다리기했다.
충격과 당혹, 분노와 허탈함의 파도가 한차례 로위나를 휩쓸고 지나갔다. 멍해진 가운데 로위나는 가만히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를 노려봤다.
약혼? 결혼? 그래. 분명 원한 적은 있었다. 그의 곁에서 정정당당하게 그의 아이를 낳고 그의 아내로서 살고 싶었었다. 하지만 모두 옛날이야기였다. 해변에 쌓아 올린 모래성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과거의 소원이었다.
존재했다고 믿은 그의 사랑이 모든 게 허상이고 신기루였다는 걸 깨달은 순간 놓아 버린 희망이었다.
“로위나.”
넋이 나간 듯 무표정한 얼굴에 단단한 가면 같던 남자의 얼굴에 금이 갔다. 어딘가 초조한 듯한 얼굴, 그를 알고 나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의아할 새도 없이 사라진 표정에 로위나는 잘못 본 거라고 결론 내렸다. 겨우 마음을 추스른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의 어깨를 짚은 로위나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약혼이 확실시된 상태에서 그녀도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럼 저 소원이 있어요.”
“말해요.”
순순한 대답에 화사하게 웃은 로위나가 입을 열었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품에서 나와 뒤를 돌았다. 숨죽여 두 사람을 바라보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약혼식은 석 달 뒤 로프스 섬에서 열릴 거예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을 초대하겠습니다. 와 주실 거죠?”
다분히 연극적인 어투였다. 로위나는 뜬금없는 선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킬리언이 의도했듯 그들은 증언자가 될 것이다. 다만 그들이 증언해 줄 건 약혼식이 아닌, 그녀의 죽음이겠지만.
돌발적인 모든 상황에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어찌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사람들이 그저 눈빛만 교환했다.
제일 먼저 반응한 건 레이첼 백작 부인이었다.
“어머! 미스 필로…… 아니, 로위나. 정말인가요? 당연히 가야죠. 축하드려요!”
“축하드려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 부인을 시작으로 조금씩 굳은 표정을 푼 사람들이 그들에게 다가와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는 사이 분을 이기지 못한 베로니카가 자리를 떴다. 그녀의 뒷모습을 흘깃 본 백작 부인이 사람들을 헤치고 로위나에게 다가왔지만, 인사를 하기도 전에 로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감사해요. 다만 지금 제가 피곤해서요.”
“그러시겠죠. 들어가서 쉬세요. 미스…… 아니, 로위나 양.”
“그럼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저하.”
멸칭이나 다름없던 호칭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기꺼운 얼굴로 그들을 배웅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로위나는 메슥거림을 겨우 내리눌렀다.
* * *
살얼음을 걷듯 위태로운 공기는 막사 안에 들어가면서 깨졌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를 지나치는 로위나를 킬리언이 뒤따랐다. 등 뒤에서 사신이 쫓아오는 느낌이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익숙한 위압감에 로위나는 목이 졸려 질식할 지경이었다.
“왜 그러셨어요?”
“그 대답은 방금.”
“그래요. 내가 원한 거였죠. 소망했던 일이에요.”
과거에, 뒷말을 삼킨 로위나가 차고 있는 목걸이의 후크를 만졌다. 목줄이라도 찬 듯 답답한 기분에 풀어 버리고 싶었지만 보이지도 않는 데다 흥분한 상태라 헛손질했다. 결국 킬리언이 다가와 목걸이를 풀어 주었다. 씩씩대며 숨을 고르던 로위나가 뒤를 돌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뒤통수치듯 저를 속여 공개적인 자리에서 발표하시진 말았어야죠. 이 목걸이를 주셨을 때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변했다고 생각했던 건 역시 착각이었다. 태도가 조금 부드러워졌다고 이 남자의 본질이 뿌리부터 바뀐 건 아니었다. 여전히 독선적이고 여전히 오만하며 여전히 이기적이었다.
이별을 통보할 때도 다시 그녀를 찾아왔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당사자인 그녀의 의사 따윈 하나도 반영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이.
“제가 아까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아세요?”
분노가 이성을 이겼다. 화를 못 이겨 주먹으로 킬리언의 가슴을 내려친 로위나가 헐떡였다. 잔뜩 올라온 숨을 가다듬는데 그녀의 손을 커다란 손이 덮었다.
“주었더라면?”
벗어나려는 작은 손을 꽉 쥐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든 킬리언이 제 왼쪽 가슴에 눌렀다.
“그럼 승낙했을 건가?”
이상하게도 매끈한 정장 위로 가파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어쩌면 자기 자신의 심장박동일지도 몰랐다. 조금의 틈도 없이 그녀를 갖고 휘두르려는 남자를 노려보며 로위나는 그들이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육 연발 리볼버에 단 한 알의 총알을 넣고 돌아가며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죽기 전에는 절대 끝나지 않을 지독한 게임이었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격양된 숨소리가 차츰 원래대로 돌아왔다.
로위나는 대답 대신 교묘히 화제를 돌렸다.
“그 전에 왜 청혼할 마음이 들었는지 알려 주세요.”
고분고분해진 말투에 그녀의 손을 풀어 준 킬리언이 옆을 지나쳐 카우치에 앉았다.
“5년 전에 내가 한 가지 오해를 했습니다.”
“어떤…… 오해요?”
“윌리엄 제넌.”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로위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런 그녀를 주시한 킬리언이 긴 다리를 꼬았다.
“그 남자가 당신과 내연 관계라고 하더군요.”
“아니에요! 왜 대체 그런 오해를!”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그에게 다가갔다. 턱짓으로 맞은편에 앉을 것을 지시한 킬리언이 품을 뒤적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궐련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그럼 왜 만났죠?”
“소일거리삼아 책을…… 쓰고 있었어요. 원고를 보냈는데 연락을 주더군요. 그래서 만났던 것뿐이에요.”
“내게는 왜 비밀로 했죠?”
“좋아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기가 막혔다. 5년 전에 왜 그리 그가 잔인하게 굴었는지 이유가 밝혀진 순간이었다. 털썩 카우치에 앉아 마른세수를 한 로위나가 젖은 숨을 삼켰다.
“그래서…… 누가 절 그렇게 모함한 거죠?”
“베네딕트 서섹스 남작.”
얼마 전까진 데미안의 정체를 숨긴 제녹을 의심했으나 뒤로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범인은 명확해졌다.
“아아!”
창백해진 로위나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린 킬리언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경악스럽게도 첫 고발자는 거트루드였습니다.”
“거트루드 부인이…… 그래서 그 밤에 그녀를 내쫓으셨던 건가요?”
킬리언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서섹스 남작이 배후라는 거죠?”
“처음엔 거트루드가 모두 꾸몄다고 생각했습니다. 쫓아낸 후 일부러 잡지 않고 미행을 붙였을 때도, 극한으로 몰린 상황에서도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서섹스 남작은 평소 당신을 두둔하는 편이었고.”
“그런데요?”
“붙잡혀 이어진 심문에도 끝끝내 자신의 계획이라 우겼던 거트루드가 풀려난 뒤 얼마 되지 않아 실종됐습니다.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얼마 전 알아보니 목을 졸린 채 살해됐었더군요. 그리고…….”
생각보다 더 심각한 이야기였다. 로위나는 입 안을 깨물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당신의 직장 동료였던 안나라는 여자.”
“도피했다고 들었어요.”
“살해당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자살로 위장한 타살. 멜리사의 고백에 알아본 거트루드의 최후와 소름 끼치게 똑같았다. 두 여자를 살해한 범인이 같다는 증거였다.
“범인은…… 찾았나요?”
“살인 청부업자더군요. 심문한 결과 베네딕트 서섹스를 지목했습니다.”
그 사실을 알아낸 건 이곳으로 오기 직전 밤이었다. 데미안을 노렸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은연히 시험해 온 제녹에게도 그때가 돼서야 모든 사실을 알렸다.
그 외에도 멜리사의 정체 등 할 말이 많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안 그래도 충격에 쓰러질 것 같은 여자에게 더 큰 배신감을 안겨 줄 수는 없었다.
“세상에.”
감당할 수 없는 진실에 탄식한 로위나가 고개를 떨궜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킬리언이 축 처진 어깨로 손을 뻗는데, 채 닿기도 전에 로위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