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10년 전에 기억 안 나세요? 제가 소녀였을 때 궁정에서 뵈었었는데.”
“미안합니다. 지나치는 사람을 일일이 기억하진 못해서.”
상대가 무안할 정도로 싸늘하게 대답한 킬리언이 예민한 짐승처럼 대뜸 시선을 로위나에게 던졌다.
무방비하게 눈이 마주친 순간, 이리 오라는 듯한 표정에 로위나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뗐다. 하지만 두어 걸음뿐이었다. 그녀는 집요하게 자신을 주시하는 눈을 피했다.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킬리언과 로위나가 두 사람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가운데, 화르르 붉어진 표정을 갈무리한 베로니카가 정적을 가르고 끼어들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오늘 밤부터 기억해 주시면 되니까요.”
그녀로선 최대한의 용기를 낸 발언이었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 이만.”
뜨거운 사람들의 눈빛에 입술을 앙다문 베로니카가 홱 몸을 돌렸다. 흥미진진한 장면에서 당사자가 나가 버리자 잠시 모였던 관심은 금세 흩어졌다.
상황이 끝나고 나서도 킬리언은 끝까지 로위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수풀에 숨어서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집요한 눈빛이었다.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는 순간이었다.
쨍그랑.
누군가와 부딪혔고 은쟁반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쏟아진 잔들이 바닥을 굴렀다. 백작 부인과 부딪힌 웨이터가 동시에 입을 열었다.
“미스 필로네!”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당황해서 허리를 못 드는 웨이터를 안심시킨 로위나가 멀찍이 떨어져 선 조앤에게 손짓했다.
“옷과 숄에 묻은 것 같으니 갈아입고 올게요. 백작 부인.”
“하필이면! 알았어요. 금방 와야 해요. 곧 투표니까.”
“그럴게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와 조금이라도 떨어질 구실이 필요했다.
옷을 갈아입는다는 핑계로 한숨 돌리고 자리로 돌아오니 이미 이 밤의 하이라이트가 진행 중이었다. 간이로 만든 연단 앞에 선 사회자가 만찬회 내내 걷었던 표를 신사, 숙녀들 앞에서 하나씩 발표하고 있었다.
“왜 이제 와요!”
한 표 한 표 발표되는 표에 좌중이 조용한 가운데, 로위나를 잡아끈 백작 부인이 그녀에게 귓속말했다.
“지금 미스 필로네가 앞서가고 있어요. 걱정 안 해도 되겠는걸요?”
“몇 표나요?”
“무려 열 표나요. 대단한데요.”
“저하께서 사냥에서 일등을 하신 덕분이겠죠. 가산점을 준다고 했잖아요. 나머지는 저하께 잘 보이려는 표겠고요”
“참 겸손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었지만, 낮에 한 말도 있고 저도 모르게 올라간 어깨가 내려갔다.
“저하는요?”
“호호. 미스 필로네가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요?”
“아…… 그러네요.”
“농담이에요. 저기 계시네요.”
피식 웃은 백작 부인이 어딘가를 부채로 가리켰다. 킬리언이 제녹과 무슨 심각한 이야기라도 나누는지 사람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표정을 살피러 눈을 가늘게 뜨는데, 백작 부인이 친근하게 팔짱을 끼었다.
“저하께서도 미스 필로네가 오늘 밤 여왕이 되면 어깨가 으쓱하실 거예요.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시겠지만요.”
“그럴까요.”
“그렇고말고요. 자기 여자가 제일 아름답다는 게 증명받는 건데.”
눈을 찡긋한 백작 부인이 다시 연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취했는지 아니면 뭔가를 기대하는 건지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낯빛에 로위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사회자가 마지막 카드를 펼쳤다.
“대망의 마지막 한 표는!”
잠시 뜸을 들인 사회자의 시선이 뒤편에 선 로위나에게 꽂혔다.
“데본셔 공작 저하의 동행인이신 미스 필로네군요! 축하드립니다!”
“와!”
“이리 오시죠!”
박수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이목이 로위나 쪽으로 쏠렸다. 단번에 쏟아진 수십 쌍의 눈동자에 로위나가 어색해하며 연단으로 향하려는 순간이었다.
“폐하!”
손톱을 잘근잘근 뜯으며 로위나를 노려보던 베로니카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뭐? 폐하?”
“어디? 참가하지 않으신다고 하지 않았어?”
순식간에 떠들썩했던 관중들이 조용해졌다. 그때, 두리번거리며 웅성거리던 사람 중 한 명이 다가오는 누군가를 보고는 급하게 무릎을 숙였다.
“폐하!”
수런거림이 멎고 하나둘 시녀들을 끌고 온 여자에게 예를 다해 몸을 숙였다. 행차한 이는 다름 아닌 여왕의 수석 시녀였다.
사람들을 따라 엉거주춤 몸을 낮춘 로위나에게 백작 부인이 설명했다.
“앞을 금실로 장식한 드레스 차림이죠? 왕성의 수석 시녀가 저 차림일 때는 여왕을 대신하여 행차한 거예요. 이럴 때는 그와 다름없는 예로 맞는 게 도리고요.”
“그렇군요.”
“그런데 이상하네요. 왜 갑자기?”
뜬금없는 상황에 백작 부인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엄숙한 목소리가 무릎을 꿇은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일어나도 좋습니다.”
허락과 함께 한둘씩 일어났다. 뒤로 물러난 사회자의 자리에 선 수석 시녀가 촘촘하게 밀봉된 편지를 꺼내 들었다.
“제가 이곳에 온 건, 다름 아니라 심신이 불안정하여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하신 폐하를 위해 그분의 뜻대로 이 특별한 자리에 표를 행사하기 위함입니다.”
여왕의 한 표는 곧 열 표였다. 놀란 숨을 들이켠 백작 부인이 우려 섞인 눈으로 로위나를 바라봤다.
“폐하께서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한 사람들이 마른 침만 삼키며 연단 위에 집중했다. 그 관심을 즐기듯 잠시 뜸을 들인 수석 시녀가 로위나를 흘깃 보더니 베로니카를 보며 미소 지었다.
“레이디 탈던께 표를 주셨습니다.”
한순간에 결과가 뒤집힌 순간이었다. 동시에 쥐 죽은 듯 침묵이 널찍한 공간을 휘감았다.
정적 속에서 로위나는 저도 모르게 킬리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선 그는 이런 상황에도 아무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럼 이만 돌아가죠.”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수석 시녀가 용건이 끝나자마자 자리를 떠났다. 몰아친 반전에 멀거니 서 있던 사회자가 뒤늦게 선언했다.
“이, 이번 연도 최고 레이디는 레이디 탈던입니다!”
“축하드려요, 레이디 탈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의기양양해진 베로니카가 연단에 올랐다. 한껏 고개를 쳐든 베로니카가 먼저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영광이에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관을 받으세요.”
사회자가 그녀에게 건넨 건 다름 아닌 가시 모양의 은 왕관이었다. 살짝 무릎을 굽힌 베로니카가 은 왕관을 쓰자 박수 소리가 더 커졌다.
“그래서 첫 명령은 무엇이죠, 우리 하룻밤 여왕께선?”
“절 에스코트할 신사분을 지목하고 싶어요.”
“약혼자가 있거나 기혼자는 안 됩니다. 그 점은 아시겠지요?”
“물론이지요.”
사회자의 너스레에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서 능청스러운 신사 한 명이 장난스레 농담을 던졌다.
“불공평하네요! 기혼인 여성분은 여왕이 될 수 있는데 기혼인 남자는 선택받지 못하다니!”
“그러게 여성으로 태어나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니면 한 십 년 정도 늦게 태어나던가.”
사회자의 일침에 사람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자자! 잠시 주목해 주시죠!”
떠들썩한 좌중을 침묵시킨 사회자가 당부했다.
“지목받은 신사분은 앞서 말했듯 약혼녀와 부인이 없는 이상, 절대 우리 하룻밤 여왕님의 명령을 거절할 수 없습니다!”
로위나는 옴짝달싹하지 않은 채 서서 베로니카를 바라봤다. 주변을 휘 눈으로 훑던 베로니카 또한 시선을 느끼고 로위나를 마주 봤다. 두 여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가 오가는 사이, 사회자가 크게 외쳤다.
“그럼 이제 지목해 주실까요? 누군지는 이미 알겠지만 말이죠!”
“네.”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깐 베로니카가 저 멀리 선 킬리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킬리언 데본셔 공작 저하를 지목하겠습니다.”
“역시!”
뭇 사람들의 예상대로 상대를 지목한 베로니카가 덧붙였다.
“오늘 밤, 제 에스코트를 맡아 주세요. 잠자리에 들 때까지요.”
“저하! 물론 받아들이시겠죠?”
다시 찾아온 흥미진진한 상황에 사람들이 킬리언과 로위나, 그리고 베로니카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모두가 입을 다물고 공작의 승낙을 기다리는 가운데, 킬리언이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겼다. 그러나 당연히 연단으로 향하리라는 기대와 다르게, 뒤편에 서 있는 로위나를 향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다들 시선을 교환하는 순간이었다.
“유감이지만 거절하겠습니다.”
깜짝 놀라 굳은 로위나가 물러서려는데, 어깨에 걸친 숄이 스르륵 떨어졌다. 숄을 벗긴 킬리언이 드러난 그녀의 목걸이에 입 맞췄다.
“미스 필로네는 이미 내 약혼녀니까요.”
“예?”
“세상에, 이게 무슨.”
“갑자기?”
벼락처럼 떨어진 선언이 주변을 순식간에 혼란에 빠뜨렸다. 당사자인 로위나 또한 머릿속이 새하얘져 입만 벌리고 있는 때였다.
“말도 안 돼요! 정당한 의식도 거치지 않고 이리 막무가내로!”
연단 아래로 뛰듯이 내려온 베로니카가 달려들 듯 그들에게 다가왔다.
“막무가내라니.”
“백작 부인. 내 말에 어폐가 있었습니까?”
“아니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저은 백작 부인이 앞으로 몇 발자국 나서더니 주변을 향해 큰 목소리로 설명했다.
“약혼의 의식이란, 바로 신사 측 어머니의 약혼 예물을 숙녀가 받아들이고 몸에 걸치는 것이죠. 제 말에 다들 동의하시죠?”
“그, 그건 그렇죠.”
“맞는 말이긴 하죠. 오래된 관습이지만.”
얼어붙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낸 백작 부인이 고개를 돌려 로위나의 목을 가리켰다.
“다들 저 아름다운 목걸이를 봐주시지요.”
로위나와 백작 부인의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로위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안 돼. 말하면 안 돼. 안 돼!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으려 로위나가 손을 뻗을 때였다. 강한 힘으로 팔이 잡히고는 뒤로 돌려세워졌다.
“로위나.”
희번덕거리는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옭아맸다. 동시에, 등 뒤에서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졌다. 백작 부인이 당당한 얼굴로 증언했다.
“제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미스 필로네가 이곳에 오고부터 줄곧 차고 있던 이 목걸이는 틀림없는 선대 공작부인의 약혼 목걸이가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