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드레스는 어떤 거로 하실까요? 귀걸이와 목걸이는요? 머리는 어떻게 해 드려요?”
“하나씩 물어보면 안 될까? 그리고 아직 시간은 많잖아.”
“로위나 님도. 지금부터 준비해야 해요. 멜리사가 있었다면 모를까, 저 혼자이기도 하고.”
물론 시중을 들 하녀라면 두엇 더 데려오긴 했으나 주로 잡일을 담당했다. 더구나 로위나의 성격상, 잘 모르는 사람에게 몸을 내보이고 머리를 맡기는 건 저어했기에 당장은 조앤뿐이었다.
“일단 식사를 먼저 하고. 그러고 하자. 응?”
“하지만.”
“조앤도 배고플 거 아니야. 밥 먹고 와요.”
뭐라 말하려는 조앤의 말허리를 끊어 낸 로위나가 축객령을 내렸다. 입술만 달싹이던 조앤이 막사를 나가고 나서야 평화가 찾아왔다.
“하아.”
마른세수를 한 로위나가 침실과 이어진 다이닝 룸으로 향했다. 언제 고용인들이 왔다 갔는지 식탁 위에는 벌써 호화로운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그것들을 살펴볼 시간도 없이 자리에 털썩 앉은 로위나가 한숨을 토해 냈다.
“어쩌자고 똑같이 덤볐을까. 애도 아니고.”
어제 여유로운 척 굴었던 게 민망해질 정도였다. 전이라면 그저 못 들은 척 웃으며 넘어갔겠지만, 그냥 당하기는 싫었다. 긴 시간 체득한 진리였다. 상대방의 무례함을 참을수록 상대방은 그녀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 더욱 무시한다는 것. 이 진리는 단지 5년 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마냥 착하게 사는 것이 좋은 건 아니었다.
“뭘 애처럼 굴었습니까?”
식탁에 팔꿈치를 올린 채 손에 턱을 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뒤를 돌지 않아도 누군지 확실했다. 고개를 든 로위나가 어느새 다가와 맞은편 의자에 앉은 킬리언에게 미소했다.
“언제 왔어요?”
“방금.”
좀 전까지 사냥을 하고 왔을 텐데도 어제와 달리 피 냄새는 맡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사냥복 차림도 아니었다. 의아함에 로위나가 눈을 깜박이는데, 생각이라도 읽은 듯 나이프를 든 킬리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씻고 왔어요.”
“어쩐지 차림이 평상복이다 싶었어요. 식사 먼저 하시고 씻으셔도 되는데.”
“당신이 싫어하니까.”
담백한 대답이었다. 기가 막힌 로위나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놨다.
“혹시 쌍둥이 동생이라도 있으신가요?”
“무슨 말입니까?”
“분명 어제 싫어하는 표정이 재밌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뜬금없는 소리에 눈썹을 치켜올린 킬리언이 이어진 질문에 작게 코웃음 쳤다. 아랑곳하지 않고 로위나가 이어 물었다.
“어젯밤 저와 동침한 남자는 누구죠?”
“그런 농담도 할 줄 압니까?”
“진지하게 여쭤보는 거예요.”
“도플갱어 같은 건 없으니 안심해요.”
별 시답잖은 질문을 한다는 얼굴로 대답한 킬리언이 잔에 와인을 따라 마셨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로위나가 대뜸 중얼거렸다.
“많이 변하신 거 같아요.”
“변하면 안 됩니까?”
“네. 안 돼요.”
그때와 같아야 했다. 재회했을 때처럼 뻔뻔하고 오만하고 지독한 남자여야 했다.
의미심장한 대답에 킬리언이 식사를 멈췄다.
“무슨 말이죠?”
“옛날처럼, 5년 전 모습이 좋다는 말이에요.”
“왜.”
평화롭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굳었다. 로위나는 추궁하듯 자신을 쳐다보는 푸른 눈동자를 피했다.
“그냥요. 아무 이유 없어요.”
예상치 못한 때에 예상치 못하게 정곡을 찌르는 남자였다. 더 눈을 마주하면 가슴 깊숙이 숨겨 놓았던 것까지 읽어 낼 것 같았다. 불편한 공기 속에서 꾸역꾸역 식기를 놀리던 로위나에게 킬리언이 불쑥 손을 뻗었다. 주춤하며 뒤로 물러나려는데 긴 손끝이 그녀의 입가를 쓸었다. 붉은 소스를 닦아 준 킬리언이 냅킨에 손을 닦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로위나가 그의 손끝이 스친 입매를 만졌다.
좀 전에 말한 변화라는 게 이런 행동이었다. 전이라면 그저 제 입가만 가리켰을 텐데 지금은 직접 닦아 주는 것.
혼란스러운 마음에 로위나가 눈을 내리깔고 다시 포크를 잡는데, 그가 대화의 물꼬를 텄다.
“오늘 만찬회가 있는 건 알고 있죠.”
“……네.”
“그 목걸이는 벗지 말아요.”
로위나는 저도 모르게 목에 손을 가져갔다. 그가 이곳에 오기 전 직접 채워 준 목걸이였다.
순순하게 따라도 될 일이지만, 그녀가 자신이 주는 걸 걸치고 자신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게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울컥한 로위나가 내리깔았던 눈을 들었다. 말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하는 남자에게 문득 오기가 치밀었다.
“드레스에 맞게 차려고 했는데요.”
“무슨 드레스를 입으려고.”
“그건.”
아직 정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던 로위나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등 뒤가 파인 이브닝드레스요. 검은 새틴 원단의.”
“그건 노출이 너무 심한데. 숲이라 저녁엔 아직 쌀쌀하고.”
“전에는 더한 것도 입었었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로위나.”
이어진 말대꾸에 결국 킬리언이 낮게 목소리를 깔았다. 돌변하는 목소리에 로위나는 차라리 안도했다.
그가 화를 내고 밀어붙이며 제 뜻대로 행동했으면 했다. 그래서 조금씩 변하고 있는 걸 스스로 부정했으면 했다.
태연한 얼굴로 샐러드를 먹으며 차가운 일갈을 기다리는데, 대신 의자를 뒤로 끄는 소리가 났다.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옆을 스친 킬리언이 다이닝 룸을 나가더니 다시 돌아왔다. 등 뒤로 다가온 인기척에 로위나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도톰하고 푹신한 무언가가 그녀의 어깨에 얹혔다.
“이건…….”
은여우 털로 만든 숄이었다. 손에 잡히는 촉감이 보들보들하고 은은한 광택이 흘렀다. 잠시 넋을 잃고 숄을 쓰다듬던 로위나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이미 담비 목도리가 있는데요.”
“그것과 이건 다르니까.”
“…….”
“드레스는 원하는 거로 입어요. 대신 위에 이 숄을 걸치는 거로 하죠. 목걸이도 내가 말한 대로.”
로위나는 귀를 의심했다. 화를 내거나 무시하며 자리를 뜰 거라 생각했는데 까칠하고 독선적인 성격에 이만하면 큰 양보였다.
의외의 반응에 멈춰 있는데, 숄 위로 그가 로위나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고개를 숙인 그가 귓가에 속삭이듯 물었다.
“아니면, 숄도 없이 헐벗고 나가고 싶은 건가요?”
“그, 그건 아니에요.”
차가운 말투와 달리 뜨거운 숨이 귓바퀴를 간질였다. 이 이상 오기를 부리면 큰일 나리라는 직감에 로위나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말씀하신 대로 할게요. 숄도 감사해요.”
“잘됐네요.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우고 막사에 가둬 놓을 뻔했는데.”
어깨를 움켜쥐던 손이 멀어졌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로위나는 대답 대신 소름 돋은 살갗을 숨기려 숄을 여몄다.
막사 밖에서 그 모습을 적의 어린 눈으로 훔쳐보던 시선 하나가 재빨리 모습을 감췄다.
* * *
야외에서 열린 만찬회는 색다르게 화려했다. 날씨도 조금 쌀쌀할 뿐 구름 한 점 없이 달이 밝은 밤이라 별다른 불빛 없이도 주변이 환했다.
혹시 모를 기대감에 짙게 화장하고 아름답게 꾸민 여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진 건 단연 두 사람이었다. 미스 필로네와 탈던 영애.
고혹적인 검은 드레스에 우아한 은여우 숄을 걸친 로위나가 퇴폐적인 분위기의 미인이라면, 베로니카는 숲속의 요정처럼 산뜻한 개나리색 드레스를 입고 땋아 내린 머리칼에 꽃을 장식해 청초함을 뽐냈다.
신사들은 아닌 척 두 사람을 흘깃흘깃 곁눈질했다. 슬쩍슬쩍 비교하며 점수를 매기는 듯한 시선을 모르는 척 로위나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너무 아름다워요. 미스 필로네!”
“그리 말해 주시니 감사해요. 레이첼 백작 부인께서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호호, 입바른 소리는.”
애정 어린 인사를 나눈 레이첼 백작 부인이 살갑게 물었다.
“저하는요?”
“같이 오셨는데 잠시 다른 신사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가셨어요.”
“어쩜, 공작께선 불안하지도 않으신가 봐요. 그러다 누가 아름다운 파트너를 채가면 어쩌시려고.”
“채가도 되찾을 자신이 있으니 그러시겠죠?”
백작 부인의 너스레를 능청스럽게 받아친 로위나가 지나가던 웨이터의 은쟁반 위에서 샴페인이 담긴 잔을 들었다. 서슴없이 꿀꺽꿀꺽 마시는 모습에 백작 부인이 놀란 눈을 했다.
“원래 그렇게 술을 잘 마셔요?”
“잘 마시고 싶을 때는요.”
“5년 전엔 내숭이었던 거네요?”
“음. 그땐 잘 안 마시고 싶었나 보죠.”
어깨를 으쓱한 로위나가 빈 잔을 다시 다른 웨이터에게 건넸다.
“말해 봐요. 정말 어디 상인이라도 했었어요? 그사이 말재주가 왜 이리 늘었어요?”
“착하게 굴어 봤자 돌아오는 게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걸렸거든요.”
로위나의 냉소적인 대답에 백작 부인이 귀를 의심하는 때였다.
“저하!”
명랑한 베로니카의 목소리가 북적대는 주변을 뚫고 높게 울렸다.
“정말 오랜만에 뵈어요.”
갑작스러운 수런거림에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베로니카 쪽을 쳐다봤다. 양 치맛자락을 잡고 조신하게 인사한 베로니카가 반짝이는 눈으로 킬리언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 중이었는지 한 손에 잔을 든 채 그녀 쪽으로 고개만 돌린 킬리언이 무심하게 반응했다.
“레이디 탈던. 어제도 보지 않았나요? 인사는 못 했지만.”
“어제가 아니에요.”
서운하다는 듯 입꼬리를 내린 베로니카가 애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