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사냥은 잘하셨어요?”
“그럭저럭. 몸은 괜찮나요?”
“사실 귀가 시끄러워서 들어온 거예요.”
장난스레 코를 찡그리며 웃은 로위나가 킬리언의 목에 손을 둘렀다.
“몇 마리나 잡으셨어요? 올해도 손수 잡은 여우로 모피를 만들어 주실 건가요?”
“그럴까 했는데 숲지기 말로는 근방 은여우는 씨가 말랐다더군요.”
“아쉽네요.”
“잔인하다며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알고 계셨어요?”
눈이 화등잔만 해진 로위나가 이어 물었다.
“그런데 계속 안겨 주신 거예요? 너무해.”
“싫어하는 표정이 재밌으니까.”
“악취미!”
미간을 찌푸린 로위나의 입술에 그가 검지를 눌렀다. 눈을 가늘게 뜬 킬리언이 낮게 경고했다.
“예쁘다 예쁘다 하니 날로 건방져지네요. 뒷감당은 생각 안 하지.”
“솔직하게 굴어도 좋다고 하셨잖아요. 이래도 싫다 저래도 싫다 하시면 제가 어느 장단에 발을 맞춰야 해요? 아아!”
거침없는 말대꾸에 비스듬히 입꼬리를 끌어 올린 킬리언이 그녀의 뺨을 살짝 잡아당겼다. 로위나가 과장하며 얼굴을 찌푸리자 뺨을 놓았다.
외투를 벗어 걸이에 대충 얹은 그가 침대에 털썩 앉았다.
“모레 일찍 수도로 돌아갈 겁니다.”
“아침 일찍이요? 내일 밤은 연회잖아요. 무리이지 않을까요?”
“의외네요. 아이 때문에 좋아할 줄 알았는데.”
“예?”
“아닌가요?”
“그게…….”
의외의 말에 놀란 건 도리어 로위나였다. 여전히 데미안을 입에 담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애새끼라고 부르던 호칭은 어느덧 훨씬 유해져 있었다. 다행이긴 했지만, 그게 조금씩 관심이 되고, 그 관심이 자라나 기어이 데미안이 친아들이라는 진실을 향할까 두려웠다.
“저는 엄마기도 하지만 여잔걸요. 예쁘게 꾸미고 재밌게 노는 것도 좋아해요.”
부러 쌀쌀맞게 대꾸한 로위나가 마저 코르셋을 벗고 드로어즈 위에 슬립과 두툼한 가운을 걸쳤다. 그 모습을 누워서 감상하던 킬리언이 불쑥 물었다.
“탈던 영애와 별일 없었습니까?”
“글쎄요.”
긴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내린 로위나가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머리채를 잡히기엔 제 나이가 너무 많죠.”
가벼운 농담조에 킬리언이 잠시 굳었던 입매를 풀었다.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눕게 한 그가 대뜸 물었다.
“잡으면 얌전히 잡혀 주려고?”
“아니요?”
“그럼.”
“저도 같이 잡아야죠.”
당돌한 대답에 기어이 킬리언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으시는 거예요?”
“신기해서.”
눈을 동그랗게 뜬 로위나의 코를 한번 쓱 누른 킬리언이 부드럽게 덧붙였다.
“예전이라면 그냥 입을 꾹 다물고 당하기만 했을 텐데.”
“그래 봤는데 결과가 안 좋았잖아요.”
화기애애하게 이어지던 대화의 맥을 끊은 건 드물게도 로위나였다.
“오늘은 정말 피곤하네요. 이만 자야겠어요.”
“로위나.”
슬쩍 대화를 마무리 지은 그녀가 이불을 어깨까지 끌어 올리는데, 그가 뒤에서 허리를 홱 당겼다.
“왜 요새는 그 말을 하지 않지?”
“무슨 말이요?”
“사랑한다는 말.”
허리를 감싼 손의 힘이 더 들어갔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로위나는 가만히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러기를 한참, 일부러 숨소리를 규칙적으로 들려주자 자는 줄 알았는지 그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당신이 날 보는 눈은 그때와 같은데.”
“…….”
“묘하게 달라진 것 같아.”
속삭이듯 중얼거린 킬리언이 그녀의 정수리에 턱을 받쳤다. 종잇장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밀착한 자세에 로위나는 잠투정인 척 그의 팔을 밀어냈다. 하지만 집요한 손은 끝까지 허리를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로위나는 날이 갈수록 등 뒤 남자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언제는 연기해도 좋다고 하면서 이제는 솔직하게 굴라고 했다. 원망하건 밀어내건 신경도 안 쓰더니 지금은, 말도 안 되는 걸 바라고 있었다.
* * *
밤이 저물고 어느덧 여우 사냥철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예년보다 더 짧은 이틀간의 일정에서도 남자들은 대단한 성과를 냈다.
천막 옆으로 쌓이는 여우들을 보면서 로위나는 야만적인 전통이라고 생각했다. 오 년 전엔 그저 킬리언을 바라보느라 다른 건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부러워요. 미스 필로네.”
로위나가 눈으로 축 늘어진 여우의 수를 세는 사이, 옆에 앉아 있던 레이첼 백작 부인이 말을 걸었다.
“뭐가 부럽다는 말씀이세요?”
“올해 저하께서 가장 많은 여우를 잡으셨잖아요. 가장 많은 여우를 잡은 신사의 파트너는 만찬회 때 가산점을 받거든요.”
“가산점이라 하면, 하룻밤 여왕이 되는 거 말이에요?”
“네. 들었군요?”
“어제 조앤이 말해 주더라고요.”
“두 가지 가산점을 받을 수 있어요. 하나는 동행한 신사분이 여우 사냥에서 가장 많은 여우를 잡을 경우. 또 하나는 여왕께서 지목한 경우.”
손가락을 하나씩 편 백작 부인이 빙긋 웃으며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여왕께선 이번엔 참여하지 않으셨으니 미스 필로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오늘 밤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제일 유력하죠.”
“저는 그런 것에 별로 흥미가 없어요.”
어색하게 웃은 로위나가 찻잔을 입에 갖다 댔다.
“그런 게 된다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는걸요.”
신사를 지목해 에스코트를 받을 수 있다 해도 딱히 지목할 사람도 없을뿐더러, 지목해서 혹시 모를 후환을 만들기도 싫었다. 여왕으로 군림하며 여러 사람을 부릴 정도로 대담한 성격인 것도 아니었다.
“하긴. 이미 이 나라 최고의 남자가 옆에 있으니 이해가 가요.”
로위나의 대답을 그 나름으로 해석한 백작 부인이 부채를 펼치고는 슬쩍 한곳에 시선을 주며 귓속말했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말이에요, 미스 필로네. 이번엔 욕심부려서 그 자리를 움켜쥐는 게 나을 거에요.”
그녀가 눈짓한 건 무리의 중심에서 화사하게 웃고 있는 베로니카 쪽이었다.
“탈던 영애가 노리는 게 바로 저하일 테니까요. 하룻밤이라도 저하를 뺏길 수는 없잖아요?”
뭐라 대답할지 난감해하며 로위나가 웃는데 때마침 고개를 돌린 베로니카와 눈이 마주쳤다. 이야기를 나누던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일어선 베로니카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레이디 탈던!”
“백작 부인!”
언제 견제를 했냐는 듯 화사하게 웃은 레이첼 백작 부인이 베로니카를 반겼다.
“두 분만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비밀 이야기라도 하고 계시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밝게 인사한 베로니카가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냥 경치가 좋아서 구경하고 있었지요. 베로니카는 여우 사냥에 참여한 게 올해가 처음인데, 잘 만끽하고 있어요?”
“그럼요. 몸이 안 좋아 영지에만 있다가 수도도 구경하고 이렇게 화창한 날에 이런 행사에 참석하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백작 부인의 말에 붙임성 있게 대답한 베로니카가 로위나에게도 말을 걸었다.
“미스 필로네도 오랜만에 참석하신 거죠?”
“네. 그렇죠.”
웃으며 말을 거는 사람에게 정색할 수는 없어 입매를 끌어당긴 로위나가 대답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표정이 굳었다.
“얼마 만인가요? 한…… 5년 만인가?”
일부러 뜸을 들인 베로니카가 아닌 척 비수를 꽂았다. 놀란 백작 부인이 베로니카와 로위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지난 5년. 사교계 사람 누구나 궁금해하는 주제였지만 아무도 본인 앞에서는 말하지 못하던 주제였다. 어느 정도 친분이 쌓인 그녀조차도 함부로 입에 담기가 어려운데, 연적이나 다름없는 베로니카가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하니 당황스러웠다.
그대로 얼어 버린 로위나의 눈치를 살피던 백작 부인이 뭐라 입을 열려는 때였다.
“그렇죠. 잘 아시네요. 저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잠시 베로니카를 빤히 바라보던 로위나가 맞받아쳤다. 생각지도 못한 태연한 대답에 말문이 막힌 건 도리어 상대 쪽이었다.
“뭐. 관심이 많다기보단…… 워낙 유명하시니까.”
베로니카는 데뷔탕트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가씨치곤 빠르게 사교계의 생리를 파악한 편이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로위나를 상대하기에는 모자랐다. 대놓고 견제하냐는 로위나의 에두른 질문에 입술을 말아 문 베로니카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어머. 제가 그 정도로 유명 인사인가요? 정말 몰랐네요.”
놀란 척 짐짓 눈을 크게 뜬 로위나가 백작 부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참에 백작 부인 말대로 욕심을 좀 내볼까 봐요.”
“욕심이라니, 무슨?”
방금 전 로위나가 그랬듯 가까스로 미소를 지은 베로니카가 고개를 갸웃했다. 로위나의 만만치 않은 기세에 속으로 감탄하던 백작 부인이 대신 대답했다.
“오늘 밤, 여왕님 말이에요.”
“아…….”
위장된 평화가 깨졌다. 가면을 벗은 베로니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바뀐 태세에 백작 부인이 흥미로워하며 눈을 반짝였다.
“더 앉아 있다가 가지, 왜 벌써 일어나요?”
“방금 이야기를 나누다 와서요. 그럼 실례할게요. 백작 부인. ……미스 필로네.”
홱 등을 돌린 베로니카가 멀어졌다.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작 부인이 팔꿈치로 로위나의 팔을 툭 쳤다.
“뭐에요. 내숭 떨더니. 꽤 하는데요?”
“욱해서 해 본 말이에요.”
민망하게 웃은 로위나 또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럼 저도 일어날게요. 곧 점심이니까.”
“오늘 식사는 저하와 하는군요. 그럼 밤에 봐요.”
선뜻 고개를 끄덕인 백작 부인이 손을 흔들었다.
귀부인들의 공간에서 나와 개인 막사로 향하는 로위나의 뒤를 조앤이 졸졸 쫓았다. 그리고 그녀가 천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질문을 퍼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