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그럼 그럴까요.”
“옆에 앉아도 될까요? 마땅한 자리가 안 보여서.”
“그래요. 기꺼이.”
로위나를 흘깃 본 부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빈 왼쪽 옆자리를 내줬다. 어수선해진 분위기에서 당당히 자리에 앉은 베로니카가 로위나를 발견했다.
“어머. 미스 필로네도 여기 계셨네요?”
“……레이디 탈던.”
그녀와 달리 상대는 고위 귀족의 여식이었다.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는 시늉을 한 로위나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저번 일을 생각하면 얼굴을 마주하기 껄끄러웠지만, 모두 그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뜻밖에도 베로니카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저번에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그저 부딪혔을 뿐인데 과민반응을 했네요.”
표독하게 쏘아붙였던 건 지워 버리고 눈물이 글썽한 채로 베로니카가 로위나를 바라봤다.
“레이첼 백작 부인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제 잘못을 깨달았어요. 용서해 줄래요? 미스 필로네?”
간절함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경계했던 것이 무색하게 어린 아가씨의 진심 어린 사과에 귀부인들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어쩜 저리 솔직하고 순수할까.”
“그러니까요. 소문과는 다르네요.”
“더구나 오늘은 그 거머리 같은 자작 부인도 옆에 없네요.”
“분명 그 자작 부인이 일방적으로 달라붙은 거겠죠. 이득이 되는 쪽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여자잖아요. 어린 아가씨가 뭘 알겠어요?”
로위나에게 기울었던 분위기가 서서히 베로니카에게 쏠렸다. 눈앞의 아가씨가 여왕이 낙점한 차기 공작 부인 후보라는 건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상대의 속을 알 수가 없어 잠시 말을 고르던 로위나가 마주 웃었다.
“용서라뇨. 레이디 탈던. 가당치도 않아요. 부딪힌 건 제 실수였는 걸요.”
“역시 듣던 대로세요. 미스 필로네. 아름다운 데다 상냥하시네요.”
과장스럽게 감탄한 베로니카가 눈을 반짝였다.
“둘이 화해를 해서 다행이에요.”
가운데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흐뭇하게 듣던 백작 부인이 말머리를 돌렸다.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고 다른 사람들처럼 따라 웃으면서, 로위나는 찜찜함을 감췄다.
“아까는 정말 잘했어요.”
불편한 자리는 다행히 오래가지 않았다. 백작 부인은 잠시 산책을 한다는 명목으로 로위나를 데리고 일어났다. 그리고 둘이 있게 되자 바로 당부했다.
“그 자리에서 얕보였으면 분명 앞으로 더 못살게 굴려고 했겠죠. 왜 갑자기 저자세로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절대 방심하면 안 돼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담담한 대답에 걸음을 멈춘 백작 부인이 로위나를 빤히 바라봤다. 이제 갓 숙녀가 된 아가씨와 사교계의 화젯거리로 3년이란 시간을 보낸 로위나는 경험치가 달랐다. 이전의 화려하기만 하고 유약했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단단해졌으니 그녀의 걱정은 어쩌면 쓸데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태도를 홱 바꾼 탈던 영애의 저의가 궁금했다. 분명 뭔가가 있기에 저자세로 나온 걸 텐데, 알 수가 없었다.
“저하께서는 별다른 말씀 없으셨나요?”
“글쎄요. 특별한 말은 없었어요.”
로위나의 짧은 대답에 백작 부인의 안색이 흐려졌다. 백작 부인의 반응에 로위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녀에게 힘을 실어 주는 만큼, 재혼이란 없을 거라는 말을 기대했던 것 같았지만 섣불리 말할 수가 없었다.
로위나는 킬리언이란 남자를 믿지 않았다. 처절하게 기만당하고 버림받은 기억은 화상처럼 남아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마차 안에서는 절대 재혼이란 없으며 오직 그녀뿐일 것처럼 굴었지만, 만약 재혼에서 오는 이익이 어느 수준을 넘어선다면 가차 없이 정부 따위는 버릴 수 있는 남자였다.
“꽉 쥔 거 같은데, 왜 이렇게 자신 없어 하는 거예요?”
체념한 듯한 로위나의 표정에 눈을 깜박이던 백작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놓고 말해요. 난 다른 여자가 있는 게 싫다고. 당신 옆에는 나만 있어야 한다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차라리.”
“백작 부인.”
더는 듣고 있기 힘들었다. 무례인 줄 알면서도 백작 부인의 말허리를 끊은 로위나가 피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여로가 아직 다 풀리지 않아서요. 실례지만 먼저 들어가 봐도 될까요? 제 숙소로요.”
“많이 피곤한가요?”
“요새 들어 그렇네요.”
“혹시.”
섬광처럼 머리를 스치는 가능성에 백작 부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말을 내뱉기 전에 로위나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
“그럴 일은 없어요. 잘 아시잖아요. 공작님 성정.”
데미안이 생겼던 밤은 그도 그녀도 이성을 모두 놓아 버리고 짐승이 되어 버렸던 유일한 밤이었다. 마치 길을 가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피할 수도 없고 돌이킬 수도 없는 사고였다.
“하긴…… 그렇네요. 그럼 저녁에 봐요.”
희망에 벅찬 것도 잠시, 아쉽게 입맛을 다신 백작 부인이 멀찍이 서 있던 시녀 조앤을 불러 로위나를 부축하게 했다. 멀어지는 로위나를 말없이 바라보는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레이첼 백작 부인.”
소스라치게 놀란 백작 부인이 뒤를 돌았다. 동시에 두 눈을 의심했다.
“저, 저하?”
언제 다가왔는지 총신이 채 식지도 않은 사냥총을 든 킬리언이 세 걸음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왕실 규모의 연회 때나 드문드문 봤지 이렇게 단둘이 마주한 적은 처음이었다. 예민하며 까칠한 성정이라는 소문은 깡그리 잊힐 정도로 빼어난 미모였다. 연회 때와 달리 이마를 가린 칠흑 같은 머리칼에 정신이 몽롱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얼음 색 눈동자. 거리가 있음에도 훅 끼치는 관능적인 체취에 뺨을 붉힌 백작 부인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미스 필로네는 방금 숙소로…….”
“봤습니다.”
“네?”
“백작 부인께 부탁이 있습니다.”
한걸음 성큼 다가온 킬리언이 돌연 총을 들어 그녀를 겨냥했다.
갑작스러운 위협에 겁에 질린 백작 부인이 주저앉는 순간,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굉음과 함께 멀찍이 기러기들이 날개를 펄럭이며 무리 지어 날아갔다. 총에 맞은 암사슴을 흘깃 본 킬리언이 더러운 흙바닥에 털썩 앉아 버린 백작 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헉…….”
정신을 차린 백작 부인이 차갑고 매끈한 가죽 장갑을 낀 손을 잡았다.
“부, 부탁이라 하시면?”
그녀를 일으킨 뒤 손을 거둔 킬리언이 나직하게 말을 끝맺었다.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 * *
여우 사냥은 드넓은 숲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틀간 귀족들은 각자의 임시 천막에서 머물렀다. 간이 숙소라고는 하나 워낙 천막의 너비가 넓은 데다 바닥엔 푹신한 깔개와 침대, 화장대, 테이블과 의자 등 필요한 가구가 구비되어 있기에 며칠 머물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내일 밤 연회 때 머리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풀어 내리는 편이 좋을까요, 아니면 보석 핀을 군데군데 박아 우아하게 틀어 올릴까요?”
화장대 앞 스툴에 앉아 머리를 빗던 로위나가 흥분한 조앤의 얼굴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 그냥 뒤풀이 같은 개념이잖아.”
“로위나 님!”
눈을 크게 뜬 조앤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작년부터 새로운 전통이 생긴 거 모르시는군요, 그렇죠?”
“새로운 전통?”
귀걸이를 빼내던 로위나가 되물었다.
“무슨 전통?”
“그게, 아무래도 여우 사냥 행사는 신사분들을 위한 자리이다 보니 귀부인들께선 교류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는 지루한 자리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래서 귀부인들의 건의로 여왕께서 한 가지 의식을 만드셨어요. 바로 마지막 날 연회 때, 신사와 숙녀들에게 표를 가장 많이 받은 여성이 그날의 여왕이 되는 거로요.”
“그게 되면 뭐가 좋은 건데?”
“연회가 끝날 때까지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지목한 미혼의 신사분과 마지막 춤을 장식할 수 있고, 얼마나 로맨틱한 전통인데요.”
“미혼자만 포함되겠네?”
“기혼자도 포함이지만 아무래도 아가씨인 편이 유리하겠죠?”
싱긋 웃으며 대꾸하던 조앤이 불쑥 입술을 오므렸다.
“맞다. 그래서였나? 레이디 탈던 있잖아요. 왜 착한 척을 하나 했더니만.”
“표를 얻으려고 했구나.”
드디어 씻겨 나간 찜찜함에 로위나가 후련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웃으실 일이 아니에요!”
정색한 조앤이 진지한 눈으로 충고했다.
“그날의 주인공이 된다니까요? 만약 레이디 탈던이 제일 많은 표를 받는다면 로위나 님께 좋지 않은 일이 있을 수도 있어요.”
“사람들이 보는 앞이잖아. 무슨 짓을 하겠어. 해 봤자 아마.”
장미수로 화장을 지워 내던 로위나가 손을 멈췄다.
“저하와 마지막 춤을 춘다거나 에스코트를 부탁하는 정도겠지.”
“……로위나 님은 질투도 안 나세요?”
잠시 말이 없던 조앤이 슬그머니 물었다. 로위나는 대답 대신 마주한 거울 너머로 웃어 보였다. 졸지에 맥이 빠진 조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로위나 님은 멜리사의 말 그대로네요.”
“무슨 말?”
“욕심이 없는 분이라고요.”
돌아온 말에 로위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욕심이 없는 게 아니었다. 다만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의 가슴에는 태중 약혼녀가 있었다. 나머지는 그저 대용품이거나 그림자일 뿐이었다.
“이제 나 혼자 갈아입을 테니 이만 돌아가도 좋아. 조앤.”
부드럽게 화제를 돌린 로위나가 그녀를 내보냈다. 코르셋의 앞 후크를 하나씩 벗어 내리는데 다가온 누군가가 등 뒤의 끈을 느슨하게 끌어 내렸다. 옅은 피 냄새에 누군지 눈치챈 로위나가 뒤를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