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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46화 (46/120)

46화

아니. 아니었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감정에 이성을 잃었었다. 이 여자를 뼈째 삼키고 우그러뜨려 온전히 갖고 싶다는 욕망뿐이었다. 다음날, 제녹에게 정부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그 자리에서 오 분간 가만히 서 있었을 뿐 예정대로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만약. 여자의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 갈기갈기 찢겼던 5년 전 그 밤에 이 말을 해 주었더라면. 낮의 일은 그가 내뱉은 최악의 실수였으며, 그의 아내가 될 사람은 그녀뿐이라고 말해 주었더라면. 아마 바보같이 그 말에 눈물을 펑펑 흘리며 실컷 원망하다가 결국 마음을 풀었을 것이다. 로위나 필로네는 그런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저 수줍은 꽃봉오리마냥 어여쁘게 사랑을 속삭이며 주인만을 바라보던 그의 여자는 이제 만개해 행동 하나 말 한마디로 그를 홀렸다. 순종하듯 얌전히 눈을 내리깔다가도 지금처럼 부지불식간에 날카로운 가시를 세웠다.

그 가시에 무슨 독이 들어 있을지 모르면서 그는 무작정 그녀의 뒷모습만 좇았다. 겉으로는 우위를 유지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녀의 작은 동작 하나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더 최악인 건, 이런 역전된 상황에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킬리언이 인정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죠.”

“……그렇죠.”

“로위나.”

꾹 누르듯 대답한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손을 잡아 내린 킬리언이 로위나가 벗어 둔 장갑을 그녀의 손에 끼워 주었다.

가만히 제 왼손을 내려다보던 로위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장갑을 낀 손에 제 손을 깍지 낀 킬리언이 그대로 그녀의 손등에 입 맞췄다.

“저번에도 말했었죠. 연기하는 건 상관없다고.”

“…….”

“머리로는 어떤 생각을 하건 이렇게만 행동하라고.”

“……그러셨죠.”

“이제는 솔직해도 됩니다.”

“무슨 말인가요?”

“지금처럼. 얼마든지 내게 건방지게 굴어도 상관없다는 말이에요. 솔직하기만 하다면.”

“제가 안하무인이 되면 어쩌시려고요?”

“예를 들면?”

“레이디 탈던을 못살게 군다거나.”

“통속 소설 속 정부처럼?”

“그게 정석이잖아요.”

“난 그럼 정부에게 눈이 먼 멍청한 남자 역할이군요.”

“해 주실 거예요?”

“기꺼이.”

피식 웃은 킬리언이 그녀의 농담을 맞받았다. 그러나 다음 말에는 도저히 웃을 수 없었다.

“그 통속 소설의 결말처럼 그 정부가 죽게 되면요?”

“…….”

“만약에 말이에요. 대개 권선징악 소설은 그렇게 끝나잖아요. 엉엉 울어 주실 건가요? 착하고 예쁜 공주님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대신 내 죽음에 슬퍼하며 상복을 입어 주실 건가요?”

상상만 해도 뱀의 비늘처럼 선뜩한 감각이 온몸을 훑었다. 깍지 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킬리언이 입술을 뒤틀었다. 그런 말을 하는 저의가 뭔지 반짝거리는 초록 눈동자를 뚫어져라 봤으나 돌아오는 건 채근뿐이었다.

“그래 주실 건가요? 네?”

“그러길 원해요?”

맞잡은 손이 아플 텐데도 로위나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해도 된다고 했으니까요. 킬리언. 난 못된 정부거든요. 그리고 그걸 더 좋아하시는 것 같으니 묻는 거예요.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숨도 못 쉬고 괴로워해 주실 거에요?”

눈이 알 수 없는 야릇한 열망으로 반짝였다. 생기가 도는 듯 도자기 같은 뺨엔 입술처럼 붉은 홍조가 돌았다. 저의를 알아보려 빤히 정부를 주시하던 킬리언이 손을 뿌리치듯 거뒀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시체를 안고 자기 위로를 하는 취미는 없어요.”

“그럼 죽은 태중 약혼녀는요?”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무슨 엉뚱한 말인가 싶어 그가 미간을 찌푸리는데 로위나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하암, 너무 졸려요. 킬리언.”

“…….”

“저 이만 잘래요. 도착하면 깨워 주세요.”

“……그러죠. 이리 와요.”

그대로 앉아 자려는 로위나를 제 쪽 좌석으로 끌어 앉힌 킬리언이 그녀에게 무릎을 내주었다.

“이건 좀…….”

“자요.”

통보한 킬리언이 당황해하는 로위나의 눈꺼풀을 내리 감겼다. 예전에 그녀가 악몽을 꿀 때면 그리했던 것처럼. 어젯밤 그와 그녀의 아이에게도 그리했던 것처럼.

이 작은 머리로 그녀가 무슨 꿍꿍이를 하는지 이젠 중요하지 않았다. 도망을 기획했다 해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고, 주변의 호위들은 물 샐 틈 없이 몸을 숨겨 붙어 있으니까.

로위나가 어떤 도망을 계획했건 그에게 필요한 건 단지 시간이었다. 배후를 알았으니 더는 지체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에게 모든 걸 보상할 생각이었다. 5년 전의 실수는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릴 만큼, 도망 따윈 감히 생각지도 못할 정도의 보상을.

* * *

5년 만에 참석하는 데본셔 공작을 계기로, 여우 사냥은 예년보다 더 화려하고 큰 규모로 주최됐다. 승마복을 차려입고 명마를 자랑하며 콧수염을 길게 뺀 신사들 사이로 총을 점검하는 킬리언이 보였다. 그 뒤에 그림자처럼 붙은 제녹과 눈인사를 한 로위나가 레이첼 백작 부인에게 다가갔다. 모인 귀부인들과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백작 부인이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 특히 예쁘네요. 미스 필로네.”

“그런가요? 신경을 많이 썼거든요.”

수줍어하며 겸양을 떨던 전과 달리 당당하게 마주 웃은 로위나가 그새 친해진 귀부인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서로서로 한차례 안부를 묻고 나서야 그녀들은 임시 막사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이틀에 걸쳐 개최되는 여우 사냥은 신사들의 축제였다. 부인, 결혼 적령기의 딸들이 할 일은 산새 소리가 울창한 숲에서 우아하게 담소를 나누며 그날 사냥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맞다. 다들 에스텔 자작 부인 소식 들으셨어요?”

별 의미 없는 이야기가 오가던 중, 한 부인이 불쑥 화두를 던졌다. 기다렸다는 듯 다른 부인이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탈던가 아가씨 옆에 꼭 붙어 다닌다던데요?”

“저번에 제가 봤어요. 찰싹 달라붙어서는 무슨 어린 아가씨의 보호자인 샤프롱이라도 된 듯이 굴더라고요. 정작 후작 부인은 부군의 일신상 문제로 참석하지 않았는데요!”

“어머. 자존심도 없나.”

이어진 대화에 얼마 전 일을 떠올린 로위나와 백작 부인이 조용히 눈을 마주쳤다. 따분한 듯 느리게 부채를 펄럭인 어느 부인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사실 나는 이해는 돼요. 그도 그럴 게, 얼마 전 남편인 자작이 중앙은행에 기댔던 대출이 탈락했잖아요. 어느 정도의 돈을 융통해 줘서 겨우 숨통을 트여 준 게 탈던 후작가라더군요.”

“세상에, 내가 듣기로는 거의 승인이 났다고 했었는데. 그럼 중앙은행이 막바지에 갑자기 대출을 거절했다는 이야기에요?”

뜻밖의 결론에 놀란 한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부채를 접은 부인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은밀하게 대답했다.

“내 남편이 은행장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사이라서요. 언뜻 듣기로는…… 외부에서 압력이 들어왔다던데, 그게 어딘지는…….”

중앙은행은 나라의 돈 흐름에 칠 할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중요한 금융기관이자 국내 사업의 목숨줄이었다. 콧대도 높아 대출 신청부터 승인까지 통과가 쉽지 않았지만 한 번 통과되면 향후 십 년간 사업의 번창은 맡아 놓은 당상일 만큼 경제 전반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나도 조르고 졸라 들은 이야기니, 여기 사람들만 아는 거예요. 알았죠?”

“그럼요. 입 싹 닫을게요. 걱정 말아요.”

“비밀로 하고 말고요. 말해 줘서 고마워요.”

대체 그런 중앙은행에 압력을 행사한 존재가 누굴까 궁금해하면서도 그쯤에서 다들 말을 아꼈다. 마찬가지로 중앙은행에 각자 집안 사업의 사활이 걸려 있기도 했거니와 곳곳에 듣는 귀를 의식해서였다.

“그나저나, 폐하께서 오늘은 나오지 않으시다니 놀랐네요. 레이첼 백작 부인께선 언니분께 귀띔받으셨나요?”

자연스레 대화의 물꼬를 튼 부인 하나가 백작 부인을 바라봤다. 동시에 여러 쌍의 시선이 백작 부인에게 꽂혔다.

“아니요. 저도 몰랐네요. 어디 편찮으시거나 그런 게 아닐까요?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면 요새 궁에서 잘 나오지 않으시잖아요.”

백작 부인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하기야, 연세가 올해 여든이 거의 다 되셨죠. 궁정에서 일하는 언니의 말로는 해가 갈수록 쇠약해지신다더라고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누구도 노화를 막을 수는 없죠.”

“우리도 마냥 남 일은 아닌 거죠.”

다들 침울한 표정으로 가라앉은 때였다. 생기 어리고 발랄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던 정적을 깨웠다.

“레이첼 백작 부인?”

다름 아닌 탈던 영애였다. 안 그래도 조금 전 이야기하던 대상이라 모여 앉은 귀부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서로 눈치를 보는 동안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난 백작 부인이 어린 아가씨를 맞았다.

“어서 와요. 레이디 탈던.”

“살롱에서 말씀드렸듯, 편하게 베로니카라고 부르셔도 되는데.”

두 명의 시녀를 달고 온 탈던 영애가 싹싹하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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