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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45화 (45/120)

45화

“…….”

“아니에요. 못 들은 거로 해요. 세상에 닮은 사람이 세 명은 있다 했으니까, 뭐…….”

“좋아.”

“네?”

혹시나 하는 희망으로 반짝였던 눈은 다음 순간, 돌아온 대답에 무안해졌다.

“친구 해 줄게.”

“해 준다뇨? 친구는 대등한 건데…….”

“세상에 나랑 대등한 사람은 없어.”

“…….”

재수 없는 말이었다. 밥맛 없는 대답인데, 너무 당당하게 말해서 대꾸할 말이 안 떠올랐다.

남자는 고작 몇 살 위 형 같다가도 아득한 어른 같았다. 거기다 다정한 건지 차가운 건지 그저 변덕스러운 건지 도무지 파악이 안 되는 아저씨였다. 당황한 데미안이 어물거리는 사이 킬리언이 나직이 조건을 걸었다.

“그 전에 한 가지 약속해 줘야 하는데.”

“뭐요?”

“나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아무에게도요? 엄마한테도?”

“그 누구에게도.”

“그렇지만 우리 엄마랑 나 사이엔 비밀 같은 건 없기로 했는데…….”

“난 유령이잖아.”

무릎 위에 깍지 낀 손을 얹은 킬리언이 통보했다.

“유령이랑 뭘 하든 상관없는 거야.”

“정말…… 그런 거예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그가 허리까지 내려온 데미안의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늦었어. 이제 그만 자.”

“치, 깨워 놓고서…… 나 잠 안 오는데…… 더 얘기하면 안 돼요?”

“자.”

“이름 물어보면……, 히잉.”

말똥말똥한 눈 위로 커다란 손바닥이 내려왔다. 지그시 눈을 감긴 킬리언이 검지로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반복적인 손길에 믿기지 않게도 서서히 졸음이 찾아왔다. 길게 하품한 데미안이 꿈나라로 빠졌다. 아들이 완전히 잠든 걸 확인하고 나서야 킬리언이 소리 없이 일어났다.

아이의 침실에서 나와 집무실로 들어가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제녹이 일어나 묵례했다. 카우치에 마주 앉자마자 그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공원에서의 일은 정말 예기치 못한 사건이라 쳐도, 이번 일은 누군가 꾸민 고의가 분명합니다. 아무래도 안나라는 여자를 죽인 배후와 관련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슨 근거로?”

“오늘 당직이었던 사냥터지기의 시체가 발견됐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했습니다. 아무래도 불길한 일이고 책임자들이 두려워해서 유야무야 묻히긴 했지만요.”

“여왕은 아닐 거라는 말이군.”

“굳이 자신의 영역에서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없지요. 그런 면에선 결벽적이리만치 확실하신 성정 아닙니까. 무엇보다 미스 필로네가 목적이 아닌, 그녀의 아들이 유일한 타깃이었다는 점도 그렇고요.”

“그건 그렇지.”

습관적으로 재킷 안쪽을 뒤지던 킬리언이 일어나 마호가니 탁상 서랍을 열었다.

얼마 전부터 이름을 음각하여 백금을 입힌 담뱃갑이 아닌,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하나씩 포장된 신맛 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중 한 개를 집어 든 그가 심심한 입을 달랬다. 알싸하게 퍼지는 신맛이 담배 대신 각성제 역할을 했다. 손에 담배 냄새가 밸 일이 없으니 아이를 만지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금연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럴 가치가 있었다.

“전처의 하수인일 가능성은?”

“안 그래도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했습니다만, 제 생각엔 아닐 것 같습니다. 약물 과다로 친정에서도 버려지다시피 한 여자에게 그럴 일을 저지를 여유가 있진 않을 테니까요.”

“그 아비일 가능성도 있지.”

“실마리가 되는 건 일단 전부 모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가 봐요.”

창가에 서서 양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 킬리언이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나 나가는 인기척이 없었다. 뒤를 돈 그가 멀뚱히 서 있는 제녹을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

“더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왜 멜리사의 고백을 들으셨는데도 베네딕트를 처벌하지 않으신 겁니까? 이번 사건에 대해서도요. 저는 그가 제일 유력한 용의자라고 생각합니다만.”

“거트루드가 죽었습니다. 발언할 증인이라곤 시녀 한 명밖에 없는데 어떻게 처벌을 하지?”

“하지만!”

“증거를 더 모아야 한다고 이미 말했을 텐데. 그랬기에 출장이란 명목으로 제일 멀리 보냈지 않았나. 그런데도 이번 일이 일어났지.”

“그게, 사실 어제부로 비밀리에 감시를 붙였던 부하들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뭐?”

갑작스러운 소식에 잠잠하던 킬리언의 표정이 굳어졌다. 고개 숙인 제녹이 침통한 표정으로 보고했다.

“눈치챈 베네딕트가 제 부하들도 죽이고 잠적을 한 모양입니다. 제 소견으론 과거 일도 그렇고, 그가 범인 같습니다. 각출 된 조직의 우두머리와 접촉했다는 증거도 확보했습니다. 예전부터 탐욕스럽고 재물에 눈이 먼 자니까요.”

“…….”

“5년 전의 일이 과도한 충성심에서 비롯되었다면, 이번엔 미스 필로네를 다시 불러들인 걸 계기로 두려움과 배신감에 사로잡힌 걸지도 모르죠.”

무거운 공기가 집무실에 내려앉았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기 힘들 정도로 긴장감이 방 안을 감도는 가운데, 제녹이 느릿하게 말을 끝맺었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타운하우스 주변 호위를 두 배로 늘리겠습니다.”

* * *

데미안의 불미스러운 사건은 묻히고, 시간이 흘러 날은 금세 5월의 여우 사냥철로 접어들었다. 데미안이 큰일 날 뻔했던 일 이후, 숲이라면 끔찍이도 싫어했던 로위나 또한 사냥에는 빠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데미안을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번엔 조앤 혼자 로위나의 시중을 들고 그녀가 제일 믿는 멜리사가 타운하우스에 데미안과 함께 남기로 했다.

“도련님은 유모들과 제가 잘 보살피고 있을게요. 걱정 마세요. 로위나 님. 이제 선생님도 계시잖아요.”

“부탁할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꼭 전보해 줘.”

“꼭 멀리 여행이라도 가는 듯 말씀하시네요. 사나흘 후엔 돌아오시면서.”

걱정이 눈에 그렁그렁한 로위나에게 밉지 않게 핀잔을 준 멜리사가 그녀의 등을 밀었다.

“그럼 잘 다녀오세요.”

“으응…….”

떠밀린 로위나가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마차에 올라탔다. 좌석에 앉아 표정을 정리하는데 책을 읽고 있던 킬리언이 무심히 물었다.

“아이가 그렇게 걱정됩니까?”

“그게…….”

수도에 함께 올라오게 해 준 데다 같은 타운하우스, 그것도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같은 층의 방을 내준 킬리언이었다. 혹여 데미안의 정체를 알아차릴까 처음엔 노심초사하며 반대도 했었지만, 아예 없는 존재인 양 아이를 신경 쓰지도 않는 태도에 로위나는 몇 번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기껏 관대해졌는데 신경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잠시 핑곗거리를 생각하던 로위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레이디 탈던도 오시잖아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로위나가 창밖을 바라봤다.

“그게 싫어서요.”

뾰로통하게 툭 내민 입술에 검지가 닿았다. 장난스레 툭 치는 손길에 화들짝 놀란 로위나가 홱 고개를 돌려 그를 봤다.

“킬리언?”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장난을 친 사람 또한 제 행동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비스듬히 웃은 킬리언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마치 관찰하는 듯한, 뭔가를 찾아내는 듯한 시선에 로위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목걸이 했네요.”

“예? 아…….”

그가 눈짓한 건 수도로 올라오기 전 그가 몸소 목에 걸어 준 목걸이였다. 목을 더듬은 로위나가 눈을 피했다.

“그냥 예뻐서요.”

작전이 성공할 때까지,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이번 사냥철에 참석한 것도 그 일례였다.

“로위나.”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마자 가까이 다가온 얼굴에 로위나는 숨을 참았다. 상체를 가까이 숙인 킬리언이 둥글게 말린 그녀의 긴 금발을 검지로 꼬았다.

“탈던 영애는 아무 의미 없어.”

“정말 그런가요?”

“그 여자는 당신 발끝에도 못 따라가니까.”

담담하지만 언뜻 다정한 말이었다. 그와 3년 넘게 함께했으나 처음 듣는 말에 가슴이 술렁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동시에 아직도 이 남자에게 감정이 흔들린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복잡한 마음에 정처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숨기려 로위나는 그의 손을 조용히 잡아 내려놓았다. 그리곤 다시 창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말, 너무 늦은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무렇지 않은 척 평탄한 어조였지만 눈 밑이 붉어져 있었다. 그 옆모습을 바라보던 킬리언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재회한 이후, 로위나는 단 한 번도 그의 앞에서 울지 않았다. 그저 꽃처럼 웃고 새처럼 지저귀었다.

그녀가 우는 걸 본 건 5년 전의 밤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예전부터 아이건 여자건 우는 게 싫었다. 나약한 자기방어의 수단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눈물 몇 방울로 상황을 좌지우지하려는 부류를 경멸했다. 그런 부류에게 눈물이란 감정에 호소해 상대를 제 뜻대로 끌고 가려는 수단이니까.

―당신은 악마야. 날 갖고 놀았던 거죠?

그는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 줄줄 눈물을 흘리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도 그런 생각을 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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