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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44화 (44/120)

44화

“지금 이야기 중이잖아요. 레이디 탈던과 저는 눈에 안 보이시나요, 레이첼 백작 부인?”

“아. 미안해요. 처음 뵙습니다. 레이디 탈던. 아마 제 언니는 보셨을 텐데.”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리던 탈던 영애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아! 똑 닮으셨네요. 폐하의 시녀인 로드릭 백작 부인의 자매신가요?”

“네. 맞아요. 언니에게 말은 들었는데, 안 그래도 한 번 초대 카드를 보내려고 했었답니다. 작년에 데뷔를 하셨었죠?”

“어머. 그걸 다 아시나요?”

레이첼 백작 부인의 이름은 사교계에서 유명했다. 작년에 데뷔탕트를 치렀지만, 몸이 약해 영지에 머물렀던 베로니카 탈던에게 레이첼 백작 부인의 인정은 중요한 기회였다. 예상외로 따뜻한 관심에 금세 기분이 누그러진 베로니카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제 친구가 아무래도 실수를 한 모양이네요.”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호호 웃은 백작 부인이 로위나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럼 우린 이만 가 봐도 될까요?”

“네. 또 뵈어요.”

잠깐 로위나를 쏘아본 베로니카가 마주 웃으며 상황을 일단락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미안해요. 잠시만요.”

입맛을 다신 구경꾼들이 흩어지고 어느 정도 시선이 떨어졌을 때, 로위나는 바로 데미안이 사라졌던 곳으로 발길을 틀었다. 그때, 목줄이 풀려 달아났던 보보가 그녀 쪽으로 터덜터덜 오고 있었다. 얼어붙은 로위나와 보보의 목줄을 틀어쥔 조앤의 시선이 마주쳤다. 조앤이 말없이 눈으로 제 품을 가리켰다. 그녀의 품에는 잔뜩 울고 기진맥진해진 데미안이 안겨 있었다. 그 뒤로 따라오는 남자가 있었다.

“……제녹 씨?”

모자를 벗은 제녹이 가볍게 묵례했다.

* * *

“아까는 보보 때문에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어떻게든 둘러대고 사냥터에서 나와 타운하우스로 돌아가는 내내, 데미안은 로위나의 품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영문도 모른 채 겁에 질린 아들을 달래 준 로위나는 응접실에 조앤, 그리고 제녹과 마주 앉았다. 손등으로 이마의 식은땀을 훔친 조앤이 말의 물꼬를 트자마자 그녀가 득달같이 물었다.

“큰일이라니, 무슨 소리야?”

“제가 이야기하죠.”

흥분해서 입을 여는 조앤을 한 손을 들어 저지한 제녹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사냥 숲에 위험한 부랑자가 한 명 들어왔었습니다.”

“뭐라고요?”

벼락같은 말에 벌떡 일어난 로위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따졌다.

“지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맞아요. 아마 개방으로 인해 사냥터지기들이 조금 느슨해진 틈을 타 토끼나 잡아먹으려고 들어온 거겠죠. 그러다 도련님을 발견한 거고요.”

찻잔을 내려놓은 제녹이 심각한 표정으로 두 손을 깍지 꼈다.

“하필이면…….”

“하필이면요?”

“…….”

“말해요, 당장!”

새된 목소리로 소리친 로위나가 몸을 덜덜 떨었다. 하마터면 데미안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늘진 얼굴로 눈을 내리깐 제녹이 옆에 앉은 조앤에게 고개를 돌렸다.

“잠시 나가 주겠어요?”

“아. 예.”

조앤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제녹이 본론에 들어갔다. 다음 순간, 로위나는 조금 전과 비교도 안 될 충격에 휩싸였다.

“도련님을 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해하다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마 상상하기도 싫은 장면이 눈앞을 스쳐 지나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맙소사!”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로위나가 몸을 떨었다.

“사고였습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고요. 부랑자가 그곳을 배회하던 때에 하필이면 도련님이 그 자리에 계셨던 겁니다. 어쩔 수 없던 일이에요.”

안타까운 얼굴로 제녹이 위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내가 이곳에 억지로 데려온 거예요. 데미안은!”

새된 목소리로 화를 낸 로위나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등줄기로 오한이 흘렀다.

한참이나 숨을 고른 후에야 겨우 떨리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충격과 분노도 잠시, 원망은 오롯이 이곳으로 그들 모자를 끌고 온 킬리언에게 향했다.

“오늘 데미안을 구해 줘서 감사해요. 이 은혜는 언젠가 꼭 갚을게요. 제녹 씨.”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로위나가 묵례한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하루였다. 원래라면 킬리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지만, 오늘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잠든 아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침실로 올라오자마자 졸음이 밀려들었다.

* * *

차가운 손이 이마를 짚었다. 서늘한 체온에 데미안은 깊은 잠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눈을 뜨니 머리맡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이마에서 손을 거둔 남자가 협탁의 램프 불을 빛 삼아 두꺼운 서류를 읽고 있었다.

“아……저씨?”

누군지 알아본 데미안이 눈을 의심했다.

“아저씨예요? 저번에 공원에서 봤던?”

서류를 내려놓은 남자가 데미안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데미안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러다 입에 벌레 들어간다.”

“아저씨, 나랑 똑같이 생겼어요! 이거 꿈이에요?”

“어땠으면 좋겠는데?”

“아이!”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 올린 남자가 벌떡 일어나려는 데미안의 이마를 검지로 꾹 눌러 다시 눕혔다. 아등바등 저항하는 것도 잠시 지친 데미안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다시 자.”

“아저씨 때문에 깼어요.”

“눈 감고 자. 애들은 원래 자는 게 일이잖아.”

“안 자면 사라질 거에요?”

“응.”

건조한 대답에 데미안이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아저씨는 아이가 없죠?”

“왜?”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를 기울인 킬리언이 다리를 바꿔 꼬았다. 단지 그뿐인 몸짓인데도 우아함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잠시 넋을 잃은 데미안이 일부러 짓궂게 대꾸했다.

“없을 거 같이 생겼어요.”

“사실 하나 있어.”

두 손을 깍지 낀 킬리언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정말요?”

“응.”

짧은 수긍인데도 어쩐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한껏 들떴던 기분이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풀이 죽은 데미안이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아들이에요, 딸이에요?”

“아들. 딱 너만 한 거로 알아.”

“잘 모르는 것처럼 말하네요.”

“잘 모르니까.”

묘한 위화감에 데미안은 뚫어져라 남자를 쳐다봤다. 상대는 분명 어른인데, 두 눈 씻고 다시 봐도 상대는 성인인데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또래처럼 느껴졌다. 마치 냉담한 소년이 그대로 어른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앉아 있는 것처럼.

“아들 있는 아빠 맞아요?”

“글쎄.”

생각하듯 잠시 허공을 보던 킬리언이 차분히 대답했다.

“난 애가 싫어. 빽빽 울기만 하고 말도 안 통하지. 어느 정도 컸다 싶으면 제멋대로인 데다 귀찮아지니까. 시끄럽고 통제 불능이고 성가시지.”

잠깐이나마 소년처럼 느껴졌던 게 거짓말처럼 남자는 다시 어른으로 돌아왔다. 줄줄이 이어지는 욕 아닌 욕에 잠깐 멍하니 눈만 깜박이던 데미안이 뒤늦게 발끈했다.

“그런데 왜 공원에서 구해 줬어요?”

“그냥.”

“맞다! 팔 다쳤잖아요.”

데미안의 시선이 자신을 감싸 주었던 남자의 왼팔로 향했다. 그 시선에 킬리언이 보란 듯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왼팔인데? 왼팔이었는데?”

“네가 잘못 본 거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어쩐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들어 올리는 동작을 보아 한 번도 다친 적 없어 보였다. 믿기지 않는 모습에 데미안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심각하게 뭔가를 생각하던 데미안이 잠시 후 결론을 내렸다.

“아저씨, 혹시 유령이에요?”

“…….”

“외…… 아니 우리 선생님이 그랬는데, 세상엔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는 유령이 있대요. 뭔가 이 세상에 미련이 남아서 떠도는 영혼이라고.”

확실했다. 피가 흥건했던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이렇게 얼마 안 가 멀쩡해졌고, 갑자기 불쑥 나타난 것도 유령이 아니면 말이 안 됐다. 새록새록 피어난 상상력에 데미안이 흥분해 말을 이어 나갔다.

“아들을 찾으러 온 거죠? 죽었는데 아들을 보려고 아직 하늘에 못 올라간 거죠? 그게 틀림없…….”

“그렇다면?”

자신감 넘치는 추측은 이어지지 못했다. 남자가 조용히 웃었다. 좀 전의 옅은 미소가 아닌 만면 가득한 웃음을 보는 순간, 데미안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세 버렸다. 어딘가 차갑고 서늘하던 겨울 공기는 온데간데없고, 따뜻하고 기분 좋은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느낌이었다. 발밑이 붕 뜨는 것 같고 구름 위를 밟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아저씨를 처음 볼 때부터 이상하게 기분이 그랬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빤히 쳐다보는, 저랑 똑 닮은 얼굴에 긴장해 헛기침을 한 데미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 친구 해요. 내가 아들 찾는 것도 도와줄게요.”

“왜?”

“아저씨가 날 구해 줬으니까요. 아무 의미 없었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지는 않았어.”

“네?”

“애가 싫다고 했지 네가 싫다고는 안 했는데.”

부드러운 대답에 데미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왠지 눈물이 나왔다. 그립고 애달팠다. 동시에 이 아저씨의 아들이 너무 부러웠다. 이렇게 닮았는데, 자신이 아니라니.

“혹시…… 내 아버지는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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