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왕실 사냥 숲이 개방되는 날, 하늘은 화창하고 날은 포근했다. 저번에 데미안을 레이첼 백작 부인에게 들켰겠다 같이 가자는 제안도 있어 로위나는 그녀와 함께 산책을 나왔다. 넓고 녹음 가득한 숲은 시민들과 귀족들로 가득했다.
뒤에 시녀를 한 명씩 대동한 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눈이 며칠 새 다 녹았네요. 어서 꽃들이 많이 피면 좋겠어요.”
“그러게요. 날이 더 따뜻해지면 좋겠네요.”
맞장구친 로위나가 멀찍이 뒤따라오는 데미안과 조앤을 바라봤다. 데미안의 손에는 새로 키우게 된 강아지의 목줄이 걸려 있었다.
잠시였지만 로위나의 시선을 눈치챈 백작 부인이 슬쩍 물었다.
“공자가 낯을 많이 가리나 봐요?”
“아…… 네. 좀 섬세한 성정인지라…….”
“그렇군요, 그나저나.”
금세 관심을 거둔 백작 부인이 목소리를 줄이더니 그녀에게 팔짱을 꼈다. 로위나가 엉거주춤 끌려가자 귓가에 속삭였다.
“생각보다 더 똑똑하던데요. 미스 필로네.”
“예? 무슨 말이세요?”
뜬금없는 말에 로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피식 웃은 백작 부인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알면서 묻기는.”
“정말 몰라서 드리는 말씀인데.”
“소문 벌써 쫙 퍼졌어요. 백화점에서 저하께서 미스 필로네의 손을 잡았다고.”
“아.”
“전혀 안 그러실 것 같은 분인데 역시 여자에게 푹 빠지면 남자는 변하는 법인가 봐요. 얼마나 놀랐는지. 다들 그 이야기로 떠들썩한 거 알아요?”
백작 부인의 호들갑에 로위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발 없는 말이 제일 빠른 법이었지만 어제 있던 일이 벌써 파다하게 퍼졌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민망해진 로위나가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머뭇거리는 사이, 백작 부인이 후후 웃으며 팔짱을 풀었다.
“잘했어요. 앞으로도 그렇게만 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로위나는 대답 대신 옅게 웃었다.
“후작 가문의 아가씨라 해도 남편이 될 사람의 애정을 못 받으면 아무런 권력도 없어요. 허울뿐이죠. 미스 필로네는 가장 오랜 시간 저하의 옆을 지킨 데다 이리 미인이니 오히려 더 유리해요. 지체니 품위니 지킬 필요도 없고.”
“왜 제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거죠?”
이어진 진솔한 조언에 우뚝 멈춰 선 로위나가 솔직하게 물었다. 잠시 우두커니 로위나를 바라보던 백작 부인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5년 전에는 당신이 겉으로만 똑똑한 척하는 멍청이라고 생각했어요. 온갖 값비싼 귀걸이와 목걸이에 드레스를 걸쳐도 전혀 실권이 없어 보이는 데다 표정은 어찌나 드문드문 우울해 보이는지. 벗어날 생각도 없으면서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으니까요.”
예리한 지적이었다. 당황한 것도 잠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로위나가 순순히 인정했다.
“맞아요. 절… 자세히 보셨군요. 그런데 지금은 저와 왜 어울려 주시는 건가요?”
“다시 돌아온 뒤부터는 많이 달라졌으니까요.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우아하게 에스텔 자작 부인을 깔아뭉개는 모습에 이제까지의 생각이 뒤엎어졌죠. 동시에 변한 이유가 궁금해졌어요.”
로위나는 자작 부인이 입에 담았던 ‘사생아’란 단어를 떠올렸다. 많은 모욕에도 꾹 참던 그녀가 달려든 건 다름 아닌 그녀의 아들 때문이었다. 지금도 눈치를 보며 멀찍이 따라오는 존재 때문에. 떳떳하게 태어나지 못한 아이. 그 사실을 되새길 때마다 가슴이 욱신대며 쓰라린 통증이 밀려들었다.
성큼 다가온 백작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장난스레 추궁했다.
“안 알려 줄 건가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로위나는 가만히 눈앞의 여자를 바라봤다. 어째서인지 의지가 되고 믿음이 간다 싶었는데, 과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레미와 닮은 눈이었다. 진실하고 현명한 눈. 남을 상처 주지 않는 눈이었다.
“네. 안 알려 드릴 거예요. 비밀이거든요.”
좋은 사람인 것 같았지만 그래도 데미안에 대해선 말할 수 없었다. 누구든 마찬가지였다.
산뜻한 거절에 어깨를 으쓱인 백작 부인이 쉽게 포기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가요. 하인에게 양지바른 곳에 돗자리를 펴 놓으라고 했으니까 거기서 점심을 먹죠.”
“완벽한 점심이네요.”
한결 가까워진 두 여자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때였다.
“보보!”
“도련님!”
익숙한 목소리에 로위나가 홱 등을 돌렸다. 사색이 된 조앤이 어딘가로 급하게 뛰어가고 있었다. 그 앞에는 빼곡히 자리 잡은 나무 사이로 달려가는 데미안이 보였다. 데미안이 향하는 곳은 일반인에게 공개된 외곽 구역이 아닌 어둡고 음습한 안쪽이었다. 목줄 풀린 보보의 꼬리가 언뜻 보였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데미안!”
심상치 않은 상황을 직감한 로위나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들을 쫓았다. 깜짝 놀란 백작 부인을 뒤로하고 허겁지겁 달려가는 때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누군가와 부딪혔다.
“죄송해요!”
상대의 얼굴을 볼 여유도 없었다. 황급히 사과하고 지나치려던 로위나의 팔이 잡혔다.
“제대로 사과해야죠.”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였다. 돌아보니 열아홉이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 아가씨였다. 하인과 하녀들을 줄줄이 대동한 위세가 대단해 보였다. 한시가 급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로위나가 거듭 사과하고 데미안을 쫓아가려는데, 그 아가씨의 옆에 선 여자가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어머, 미스 필로네 아닌가요?”
적의 가득한 목소리에 로위나가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다름 아닌 얼마 전 제대로 무안을 준 에스텔 자작 부인이었다.
“산책을 나왔나 봐요? 당신 같은 여자들은 낮에 자는 줄만 알았어요. 밤에 깨어 있고.”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무 말도 못 했을 때가 언제냐는 듯한 태도였다. 대단한 배경이라도 둔 양 당당하게 어깨를 편 자작 부인이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어딜 그렇게 급하게 뛰어가시죠? 품위 없게.”
조금 전 백작 부인이 한 말과 비슷했으나 그 의미는 확연히 달랐다. 바쁜 상황에 발목을 잡힌 것도 모자라 그 상대가 반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로위나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짜증이 확 치밀었다.
“내 개인 사정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럼 이만.”
“지금 도망치는 건가요? 미스 필로네.”
“잠깐. 미스 필로네라고요?”
화가 끝까지 난 로위나가 자작 부인의 손을 뿌리치려는 때였다. 가만히 두 사람의 옥신각신을 지켜보던 젊은 아가씨가 끼어들었다.
“네. 제가 말했던 여자예요. 레이디 탈던.”
탈던. 귓가를 파고드는 이름에 로위나 또한 멈칫했다. 여왕이 다음 공작 부인으로 생각해 두었다던 탈던 후작가의 여식.
“아. 그렇군요.”
부채를 펴 코와 입을 가린 탈던 영애가 로위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렇게 볼 줄은 몰랐네요.”
“어머, 볼 일이야 있으셨겠어요? 이런 여자들은 레이디 탈던 같은 여성과 원래라면 얼굴도 마주하지 못했을 텐데요.”
마치 서커스단의 신기한 짐승을 구경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다시 수도로 돌아온 이후 오랜만에 느끼는 시선에 로위나는 속으로 크게 심호흡했다. 탈던 후작가의 여식과 어떻게든 마주치리라는 예상은 했지만,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아니었다.
“처음 뵙습니다. 레이디 탈던.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더 말을 나누기가 어렵네요. 그럼.”
탈던 영애가 그녀를 대놓고 아래로 낮춰 보고 있었지만, 도발에 넘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정말 무례하네요!”
고개를 까딱이고 자리를 떠나려는 로위나를 탈던 영애가 다시 한번 잡아 세웠다.
“제대로 사과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보내지 않을 테니까.”
들으란 듯한 큰 목소리에 많은 시선이 꽂혔다. 누군가 그들을 알아보자마자 관중들이 조금씩 몰려들었다. 흥미진진한 소동을 보려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로위나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숲 안에는 토끼와 여우, 사슴 등 초식 동물밖에는 없다고 했지만 데미안은 어린아이이고 혹시 어둑한 숲속에서 넘어져 크게 다칠지도 몰랐다. 조앤이 만약 따라잡지 못하고 놓쳐 버렸다면 미로 같은 숲속에서 엉엉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로위나는 자존심을 접어 두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레이디 탈던. 제가 미처 앞을 못 보고 부딪혔네요.”
기다렸다는 듯 빌미를 잡자마자 몰아세우는 게 화가 나긴 했지만, 주변을 못 보고 무작정 뛰어간 그녀 잘못이었다.
의외의 항복에 탈던 영애와 자작 부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로위나가 결정적인 한마디를 보탰다.
“너그러이 용서해 주신다면 꼭 저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고자질이라도 하겠다는 말이에요?”
킬리언에게 잘 말해 주겠다는 뜻이었지만, 정반대로 알아들은 탈던 영애가 누그러지던 눈에 다시 쌍심지를 켰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게 협박을 해?”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에요, 레이디 탈던. 순경에게 말을 해야…….”
덜미를 잡은 자작 부인이 신이 나서 거드는 가운데, 웅성거리던 주변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졌다. 참다못한 로위나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온 백작 부인이 로위나를 불렀다.
“미스 필로네!”
“백작 부인.”
“기다렸잖아요. 차가 식겠어요. 빨리 가요.”
“잠깐만요! 뭐 하는 짓이죠?”
화들짝 놀란 자작 부인이 잠시 주춤하다 막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