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아…….”
그것을 시작으로 사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차례로 똘망똘망한 눈을 한 새끼강아지들을 한 마리씩 데려왔다.
낑낑대는 강아지들이 한두 마리씩 의자에 앉은 로위나의 무릎 위를 채웠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가 킬리언에게 구원의 눈을 보냈지만, 말리기는커녕 부추기는 듯 지켜보는 눈에 기가 찼다.
기어이 강아지가 그녀의 무릎도 모자라 발치까지 점령한 뒤에야 킬리언이 행동을 취했다. 이어진 건 개중 한 마리를 고르겠다는 말이 아니라 잠시 담배를 피우러 발코니에 가겠다는 통보였다.
“예? 지금 이 상황에요?”
어이가 없어 로위나가 힐끔 멀찍이 다른 일행인 듯 선 유모와 데미안을 곁눈질했다. 어쩌려고 이러느냐는 눈빛에 코웃음도 안 친 킬리언이 그녀의 금발을 스치듯 매만졌다.
“돌아오기 전까지 골라. 이 강아지들 죄다 네가 키울 게 아니라면.”
“대체 그런 말이 어딨! 저하!”
황당해 얼굴까지 붉어졌지만, 혹시 강아지들이 다칠까 일어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손을 뻗은 게 무색하게도 뒤돌아선 킬리언이 옷자락조차 닿지 않고 대기하던 제녹과 멀어졌다.
“미스 필로네?”
기대감으로 가득 찬 웃음을 띤 사장이 무릎을 접어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로위나가 데미안 쪽을 다시 한번 바라볼 때였다.
“도련님!”
“하하하! 간지러워!”
명랑한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왈왈거리는 강아지 소리가 이어졌다. 흰털이 덥수룩한 개 한 마리가 달려들어 데미안을 눕히고 뺨을 핥고 있었다. 기겁한 로위나가 상황도 잊고 달려가자, 데미안이 도리어 강아지를 떼놓는 어른들을 말렸다.
“그냥 두세요! 내가 반가워서 그러는 거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데미안을 양갓집 도련님으로, 유모를 그 도련님의 어머니로 착각한 사장이 거듭 고개를 숙였다.
“아이는 다치지 않았나요?”
“아……. 괜찮네요.”
데미안을 꼼꼼하게 살핀 로위나가 대신 대답했다. 이상하다 느낄 틈도 없이 가슴을 쓸어내린 사장이 굽실거리며 구구절절 이야기를 털어놨다.
“정말 다행입니다. 사실 하도 팔리지 않아 오늘 안락사시킬 개였는데 이렇게 기어이 사고를 치는군요.”
“안락사? 그게 뭐야, 엄…… 아니 아줌마?”
말실수를 정정한 데미안이 순진무구한 눈으로 로위나를 올려다봤다. 난감해진 로위나가 말을 고르는데, 등 뒤에서 어느새 다가온 킬리언이 끼어들었다.
“그걸로 하죠.”
“예?”
동시에 놀란 네 사람이 뒤를 돌았다. 개중 제일 당황해하는 건 사장이었다.
“아니. 저하. 이 개는 혈통서도 없고 좀 멍청해서 팔리지 않던 개입니다. 양심상 말씀드리는데, 차라리 저기 모여있는 개 중에 한 마리를 고르심이…….”
“제녹.”
“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양 옆에 선 제녹에게 무언으로 지시한 킬리언이 로위나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주위에서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숨을 참았다.
아무리 공개적인 자리에서 동행한다 한들 정부는 정부였다. 부적절한 관계임에도 공공연히 드러내는 게 관행이 된 사교계에서도, 정부는 신 앞에 맹세한 부인과 달리 결코 떳떳할 수는 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동행은 해도 남들이 보는 앞에서 필요 이상의 접촉은 금기시되어왔다.
5년 전에도 철저히 밖에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던 남자였다. 아마 관습에 얽매인다기보단 구설에 오르는 게 성가셔서.
“놔, 놔주세요…….”
제녹이 하인을 시켜 강아지의 값을 치르고 관련된 용품을 구매하는 사이, 샵을 나온 킬리언이 그녀를 다른 샵으로 이끌었다. 내내 손을 잡은 상태라 지나치는 행인들의 뜨거운 시선이 따라붙었다. 얼굴이 새빨개진 로위나가 몇 번이고 뿌리치려 했지만 턱도 없었다. 정신없이 끌려가 어느 샵에 들어가고 나서야 손이 풀려났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로위나가 고개도 못 들고 입을 열었다.
“역시 어디 아프신 거 같아요. 어젯밤에 본 게 역시.”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 겁니까? 그보다 더한 것도 했으면서.”
“그건!”
밖에서 할 소리가 아니었다. 작은 목소리이긴 해도 누가 들었을까 경악스러웠다. 반박하려 고개를 들자마자 또다시 시선들이 느껴졌다.
“손님……?”
주변은 다행히 한적했지만, 다름 아닌 맞춤 드레스를 제작하는 의상실이었다.
* * *
엉겁결에 끌려간 의상실에서 로위나는 영문 모른 채 치수를 재고 드레스를 맞췄다. 마치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직원들이 척척 그녀의 치수를 재는 동안, 킬리언은 팸플릿을 보며 드레스를 골랐다.
여러모로 기절초풍할 일들이 이어지는 하루였다. 킬리언은 돈을 버는 데는 관심이 있었지만 돈을 어떻게 쓰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부류였다.
예나 지금이나 부족할 것 없이 그녀에게 온갖 사치품을 선물했지만, 함께 쇼핑을 한 적은 드물었다. 거기다 직접 선물을 고르기까지.
“오늘 대체 왜 그러셨어요?”
백화점에서 나와 미리 마중 나온 마차에 올라탈 때까지 로위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둘만 남자마자 질문을 쏟아부었다.
“갑자기 개를 사러 가자고 하시더니, 엉뚱한 개를 사시고 손을 잡으신데다 갑자기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맞추다뇨.”
“구구절절 이유가 필요해요?”
사람을 놀래키고 실컷 휘두른 주제에 킬리언의 표정은 여느 때보다도 평온했다. 마치 오랜 숙제를 끝낸 것 같은 그의 얼굴에 로위나는 답답함이 올라왔다.
“정말 필요해요. 모르면 궁금해서 죽을 정도로요.”
어쩐지 관대한 그의 태도에 말 또한 편하게 나왔다. 어차피 변덕일 테니 그녀 또한 맞춰주자는 심보였다.
“곧 재혼하실 거잖아요. 그런데 이런 행동을 하시면 후에 곤란해지시지 않으시겠…….”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던 말은 곧 가차 없이 막혔다. 느슨했던 공기가 금세 팽팽해졌다. 떠들건 말건 창턱에 팔꿈치를 괸 채 밖을 보던 킬리언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
“재혼이니 뭐니. 무슨 말이냐고.”
싸늘한 추궁에 로위나는 아래위 입술을 말아 물었다.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눈을 보아하니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럼 지난 며칠의 부재는 정말 일 때문이란 말이었다. 묘한 후련함과 함께 그녀가 솔직하게 털어놨다.
“소식을 들었어요. 여왕께서 저하의 재혼 상대를 낙점하셨다는.”
“그래요?”
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속에 담긴 건 차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맣고 뜨거운 무엇이었다.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로위나가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듣는 소리군요, 더 말해 봐요. 나도 내 새 아내가 궁금한데.”
“누, 누군지는 저도 몰라요. 그냥 건너건너 들은 소리라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본능이 속삭였다. 말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킬리언은 묶인 캐롤의 앞에서 태연하게 복수를 입에 담던 남자였다. 남들과 다른 시선과 다른 감각을 가지고 다른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려 들어서도 안 되는 사람.
“로위나.”
입술을 떠는데 팔을 뻗은 킬리언이 그녀의 고개를 움켜쥐었다. 힘없이 시선을 옮긴 로위나가 뚫어져라 자신을 주시하는 얼음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숨결이 닿을 거리로 다가온 킬리언이 속삭였다.
“솔직하게 대답해. 기다렸다는 양 말하는 걸 보니 너도 내 재혼을 기다리는 건가?”
“…….”
“내 옆에 다른 여자가 서고 그 여자와 성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길 바라?”
아니라도 대답할 수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심장까지 얼려버릴 듯 색소 옅은 파란 눈과 마주하자마자 하나의 명징한 사실이 로위나의 심장을 꿰뚫었다.
로위나는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남자 옆에 다른 여자가 서 있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죽은 태중 약혼녀를 지금까지 그리며, 그 대체품으로 그녀에게 집착하는 남자였다. 그런데 전혀 태중 약혼녀와 닮지 않은 여자와 결혼해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 건…….
그건 너무 불공평했다. 그녀에게 너무 잔인했다. 어쩌면 제레미는 이런 자신의 마음을 읽었을지도 몰랐다. 이토록 치졸하고 좁은 마음이 그녀 가슴 깊은 곳에 있다는 걸.
그뿐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로위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저는 가문도 없고 신분도 낮아요.”
경계를 누그러뜨리려면 그를 완벽하게 안심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다. 질투가 난다. 당신이 나만 바라봐주었으면 좋겠다. 그리 말하며 눈물 한 방울을 찔끔 흘리면 아무 문제 없을 상황이었다.
그녀는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은 만큼, 딱 그만큼 이 남자를 뒤흔들고 싶었다.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내린 로위나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주제넘다 비웃으시겠지만, 만에 하나 공작 부인의 자리에 앉게 된다 해도 분명 쫓겨…….”
“그만.”
“읍!”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눈썹을 치켜올린 킬리언이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혀 안쪽을 파고든 열기에 눈을 감으며 로위나는 그의 목에 손을 둘렀다.
어차피 엉망진창이 된 관계였다. 제레미를 따라 데미안과 그녀는 킬리언 데본셔의 곁에서, 이 나라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이제 말해 줄게. 우리는 죽어서 탈출할 거야. 로위나,
―무슨 말이에요?
―죽음만큼 완벽한 탈출은 없어. 제일 어렵지만 제일 확실하지.
―어떻게…….
―뱃놀이 중 불의의 사고로 셋 다 죽는 거지. 흔적도 없이. 네가 모은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그저 도망치는 것에 급급했지만, 로위나는 마음을 바꾸었다.
“한가지 소원이 있어요.”
“뭐지?”
얕게 사랑을 연기하는 건 금세 들킬 것이다. 진실이 섞인 거짓은 때론 진실보다 더 진짜 같은 법이었다.
그의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게 목적이었자면, 이제는 그의 가슴이 찢어지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아주 간절하게. 그러기 위해선 증오와 사랑을 섞어 연기해야 했다.
“날 여우사냥에 데려가요. 킬리언.”
“……로위나.”
“오늘처럼 안심시켜줘요. 미래의 약혼녀가 보는 앞에서.”
킬리언 데본셔는 재혼해서는 안 됐다. 마지막 대체품인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