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내 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 줄 몰랐네요.”
“…….”
“오지랖이 넓은 건 5년 전에도 그랬나요? 아니면 새로 생긴 취미?”
대답은커녕 까칠하게 받아친 킬리언이 빈 잔을 내려놨다. 거의 다 알 것 같은 순간에도 변덕스레 뒤돌아 수수께끼처럼 구는 남자였다. 무안함과 치미는 화에 입술을 말아 문 로위나가 애꿎은 잠옷 자락을 움켜쥐었다.
“오늘은 아무래도 심기가 안 좋으신 모양이네요. 전 옆방에서 잘까요?”
대답은 없었다. 화를 삭인 로위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침실을 나가려 지나치는데 손목이 잡혔다.
“로위나.”
“……네.”
놀란 것도 잠시, 제 손목을 잡은 손을 내려다본 로위나가 멈춰 섰다.
역시 뭔가 이상했다. 절대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러나 멍은 들지 않게 요령있게 잘도 그녀를 잡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은 마음만 먹으면 금세 뿌리칠 수 있을 정도였다.
로위나는 만약 이 손을 뿌리치고 문을 열고 뛰쳐나간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했다. 킬리언이 미약한 반항을 비웃으며 그녀를 다시 잡으러 올지, 아니면 그대로 놓아 줄지.
동시에 얼굴도 본 적 없는 탈던 후작가의 아가씨가 생각났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미처럼 많았다. 알고 싶지 않은 건 그보다 더 많았다.
머릿속을 채우는 생각이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으로 뒤섞였다. 그 안에서 한가지 가닥을 짚어내려는 순간, 나직한 물음이 그녀를 막았다.
“지난 5년간.”
로위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지냈습니까?”
“네?”
“내가 전 아내와 외국으로 떠나고 난 뒤, 어떻게 지냈습니까?”
건조하게 되풀이한 킬리언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푸른 눈동자와 마주하자 심장이 철렁했다. 로위나는 저도 모르게 왼 가슴에 손을 올렸다.
5년 동안의 생활.
지난 4개월 동안 단 한 번도 묻지 않은 질문이었다. 재회 후 지난 세월을 그녀가 무심코 입에 올리기만 했다 하면 킬리언은 어느 때보다 예민하게 반응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 기간을 그녀의 머릿속에서 도려내고 싶다는 듯 굴었던 남자였다.
그 안에 다른 남자와의 자식이라고 생각했을 데미안이 있으리라는 걸 알기에, 그녀 또한 피해온 화제였다.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입 안이 바짝 마르고 잡힌 손에 땀이 찼다. 대답을 기다리는 상대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요?”
“그냥 궁금해져서요.”
손을 거둔 킬리언이 두 손가락을 깍지껴 배 위에 올렸다. 서재의 의자나 카우치에서 잠이 들 때 그의 습관이었다. 내리깐 긴 속눈썹을 바라보며 로위나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평범……했어요.”
“평범?”
“당신 말마따나 어떻게 보면 구질구질해 보일 수 있었겠지만.”
쓰레기통 안이라도 본 듯 그녀의 보금자리를 구둣발로 쳐들어오던 킬리언의 말이 대못처럼 다시 되풀이됐다. 울컥하는 바람에 중간에 입을 다문 로위나가 다시 차분하게 말을 끝맺었다.
“그래도 나에겐 평범하고 평화로운 나날이었어요.”
최대한 태연하게 말하려고 했으나 말끝이 떨리는 건 감출 수 없었다. 만삭의 몸으로 홀로 남아 울었던 지난 날들을 생각하니 눈물샘이 터져 버렸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로위나는 입술을 두 손으로 막았다. 그의 앞에서 울지 않는 것이 그녀가 지키고 싶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있는 힘을 끌어모아 숨을 참고 뺨으로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그러는 동안 무거운 정적이 이어졌다.
그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거나 이야기에 그새 흥미가 떨어졌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안도한 로위나가 성큼 문으로 걸어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럼 이만 가 볼,”
“출산은 어땠습니까?”
조용히 나가려는데 또 다른 질문이 그녀를 붙잡았다.
“난산? 순산?”
정수리 위로 누군가 찬물을 퍼부은 것 같았다. 놀랍다 못해 얼얼한 충격에 로위나가 몸을 돌렸다. 이 남자는 데미안에 대해 묻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손끝에서부터 얼어붙음과 동시에 온몸의 피가 맹렬하게 솟구쳤다.
“그걸 왜 궁금해하시는 거예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로위나가 쏘아붙이듯 말을 다다다 이었다.
“난산도, 순산도 아니었어요. 몇 시간 동안 진통을 했고 아이를 낳았죠. 그게 다예요.”
거짓말이었다. 추운 겨울, 북풍에 낡은 빌라의 창문이 요란하게 흔들리던 밤, 열 시간이 넘게 진통했고 죽을 고비를 넘겨서야 데미안을 낳았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그녀는 이 남자와 아들에 관한 그 어떤 작은 접점이나 연관성을 주고 싶지 않았다.
비록 킬리언 데본셔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데미안은 그저 데미안이었다. 그녀가 목숨 바쳐 낳았고,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그녀만의 아들.
그의 앞에 서면 절로 움츠러들고 순종적이었던 여자는 사라지고 자식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무장한 어미가 빈자리에 자리 잡았다. 두려움은 꼬리를 말고 사라지고 오롯이 분노와 약간의 슬픔만이 로위나를 사로잡았다.
“혹시나 더 궁금하실까 말씀드리는 건데, 그 이후로도 별건 없었어요. 그냥 평범하게 일하고 그럭저럭 잘 먹고 잘 살았어요. 그게 다예요. 맹세코.”
숨이 가쁠 정도로 빠르게 말을 이어 나가던 것도 잠시, 아무 반응 없는 뒷모습에 맹렬하게 불타던 적대감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벅찬 숨을 고르던 로위나가 이내 탈진한 사람처럼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끝맺었다.
“호기심이 충족되셨으면 전 이만 나가도 될까요?”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이미 자고 있는지 미동도 없는 남자에게서 다시 등을 돌린 로위나가 침실 밖으로 발을 내미는 때였다.
“개를 한 마리 키울까 해요.”
“……네?”
동문서답을 넘어 외국어처럼 들리는 말에 로위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머지않아 여우 사냥철이니까. 적당히 말 잘 듣는 사냥견이면 적당할 겁니다. 새끼를 데려와 키우면 커서도 복종하겠죠.”
“지금 무슨 말씀인지…….”
제녹 씨나 베네딕트 경에게 할만할 말을 그녀에게 하고 있었다. 대체 뭘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그대로 굳어 있는데 청천벽력 같은 말이 떨어졌다.
“내일 같이 개를 보러 가죠. 아이도 데리고.”
“그건!”
“물론 애는 유모가 안게 할 겁니다. 내 시야에 들지 않도록 멀찍이 거리를 두고.”
“그런데 왜 굳이 데미안을 데려가자고 하시는 거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위나가 묻자, 기다렸다는 듯 더 수수께끼 같은 말이 돌아왔다.
“동물은 어른보다 아이가 더 잘 알아보는 법이니까.”
* * *
주말의 백화점은 사람들로 호황이었다. 연이어 새로운 항구가 열리고 상의원에서 수입품 관세와 기준을 낮춘 덕분이었다.
문턱을 낮춘 뒤 백화점은 외국의 물건들을 더 폭넓게 수입했다. 따라서 사치품 시장은 여느 때보다 호황이었다. 상류층과 중산층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짐을 들 심부름꾼을 대동한 채 쇼핑에 매진했다.
애완동물 샵은 그중에 그나마 여유가 있는 편인 삼 층에 있었다. 하인들을 줄줄이 셋이나 거느린 귀족이 들어오자 샵에는 비상등이 켜졌다.
“이 개는 요새 제일 인기가 많은 품종이랍니다. 혈통서도 있고 훈련도 아주 잘 되어 있죠. 사냥개답게 맹렬하기도 해서 제 몸의 열 배도 넘는 상대에게도 달려든답니다. 여왕께서도 형제를 한 마리 데려가셨어요. 시종장님도 인정한 개랍니다.”
특별히 관리하던 강아지를 내보인 사장이 빙긋 웃으며 킬리언에게 설명했다. 기대를 가득 품으며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었지만 돌아오는 건 뒤통수를 후리는 질문이었다.
“제 몸의 열 배가 넘는 상대에게 달려드는 건 맹렬한 게 아니라 멍청한 게 아닌가?”
“아니… 그게. 그렇게 보시면…… 그렇게 보이실 수도 있지만.”
상대가 데본셔 공작이라기에 만만의 준비를 다 했건만, 예상보다도 여간 까다로운 손님이 아니었다.
앞선 세 마리의 강아지가 얼마나 가차 없이 밀려났는지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그런데다 마지막까지 아껴놨던 회심의 카드까지 거절당하니 정신이 아찔했다.
“그…… 정확하게 원하시는 게…….”
암담함에 우물거리던 사장의 눈에 그의 옆에 선 여자가 들어왔다. 인형처럼 아름답게 차려입고 공작의 팔에 팔짱을 낀 미인은 그 유명한 로위나 필로네였다. 햇수로 따지자면 벌써 4년째 공작의 옆자리를 차지한 정부.
동시에 한가지 깨달음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를 확신한 사장이 돌연 정반대의 강아지를 데려와 물었다.
“숙녀분은요?”
“예?”
갑작스런 물음에 놀란 로위나가 큰 눈을 깜박였다.
“숙녀분이 보시기에 이 강아지는 어떻습니까?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지 않나요?”
물 흐르듯 품에 안은 개를 들이민 사장이 절박함에 눈을 반짝였다. 이제야 깨닫다니 멍청했다. 사낭개를 구한다고는 했지만, 이 개의 주인은 데본셔 공작이 아니었다.
이 나라는 높은 귀족이라면 정부 한두 명쯤이야 큰 흠이 아니지만, 정부건 부인이건 여자에게 깊게 빠진 걸 드러내는 건 치부로 여기는 곳이었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공작은 사냥개를 찾는 게 아니었다. 정부를 위해 애완견까지 사러 온 걸 숨기기 위한 방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