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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40화 (40/120)

40화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무슨…… 뜻인데요?”

곰곰이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자작 부인에게는 구구절절 잘 쏘아붙이던데, 정말 보면 볼수록 순수하네요. 미스 필로네.”

답답한 딸 아이를 보듯 고개를 저은 백작 부인이 무겁게 말을 이었다.

“여왕께서, 차기 데본셔 공작가의 안주인을 탈던 후작가의 영애로 낙점하셨다는 뜻이에요. 그것도 비밀리에.”

생각지도 못한 말에 로위나가 놀란 숨을 들이켰다. 킬리언에게 다른 여자가? 귀를 의심하는데, 동정 어린 눈으로 백작 부인이 쐐기를 박았다.

“저하께 달라진 점 없었어요?”

“그런 건…….”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 어젯밤 멜리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당분간 타운하우스에 오지 않을 거라는…… 자세한 이유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일이 많다고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5년 전과 다를 게 없었다. 킬리언은 그녀가 필요 이상의 것을 아는 걸 싫어했다.

“아아…….”

입을 가린 로위나가 신음을 토해 냈다. 둔중한 충격이 머리를 뒤흔들었다. 도망에만 정신이 팔려 그럴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충분히 있을 만한 일인데도. 가슴을 파고든 통증이 점차 손끝과 발끝까지 번져 나갔다. 이 감정의 이름을 로위나는 배신감으로 정의했다. 그게 아니라면 안 됐다. 인정할 수도 없고.

킬리언의 아내. 공작 부인. 다른 대체품.

“이런, 미스 필로네…….”

덜덜 손을 떠는 로위나의 옆으로 옮겨 앉은 백작 부인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충격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나도 그렇고 귀족들은 자기 의지로 혼사를 결정할 수 없으니까.”

“…….”

“특히 공작 저하 같은 고위 귀족이라면 더더욱 그렇죠.”

연민과 안타까움이 가득 묻은 목소리였다. 로위나는 대답 대신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누군가 가슴을 내리밟는 느낌이었다. 도망치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저하는 미스 필로네를 절대 버리지 않을 거예요. 당신만큼 그의 옆에 오래 있는 사람도 없었고, 당신만큼 총애받은 이도 없었으니까. 나도 최선을 다해 도울게요. 우리는 이미 한배를 탄 사이니까.”

낙심한 로위나의 등을 토닥이면서도 백작 부인의 머릿속은 빠르게 움직였다. 공작 부인이라 한들 공작의 지지와 총애 없이는 허수아비나 마찬가지였다. 반대로, 한낱 정부라 해도 공작의 온전한 애정을 독차지한다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줄을 잘 서야 할 때였다.

“그…분은…….”

한참의 침묵 속에서 깊게 심호흡만 하던 로위나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혹시 금발에 초록 눈이신가요?”

“……당신처럼요?”

뜬금없는 질문에 백작 부인이 미간을 좁혔다. 가까스로 입매를 끌어 올린 로위나가 수긍했다.

“네. 저처럼요. 저와 닮으셨나요?”

“음…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를 듣기로는.”

기억을 되짚는지 잠시 말이 없던 백작 부인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분명 적갈색 머리카락이었다고 들었어요. 눈동자 색은 모르겠지만.”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던 게 무색하게도, 백작 부인의 말을 듣는 순간 전신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마치 전력으로 달리다 탈진을 한 것 같은 묘한 탈력감이 로위나를 감쌌다. 모든 생기가 빠져나간 얼굴로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왜요?”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는 백작 부인을 향해 옅게 웃어 보인 로위나가 이내 양산을 챙겨 일어났다. 덩달아 일어난 백작 부인이 황당한 얼굴을 했다.

“벌써 가게요?”

“네. 곧 약속이 있어서요. 알려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백작 부인.”

“마차 빌려줄 테니 타고 가요.”

“아니에요. 이 이상 신세를 질 수는 없지요. 먼 거리도 아닌데 걸어갈게요. 날씨도 많이 풀렸으니.”

붙잡는 백작 부인을 자연스레 떼어 낸 로위나가 타운하우스를 나왔다. 백작 부인이 창문 너머로 지켜볼 걸 생각해 공작가의 타운하우스로 가는 척하다 골목에서 방향을 꺾었다. 마침 승객을 내려 주던 전세마차가 보였다. 마차를 잡아탄 로위나가 바로 기차역으로 향했다.

“로위나!”

배웅 나온 상대는 제레미였다. 모자를 벗고 마차에 올라탄 제레미가 반가운 조카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안색을 보니 잘 지낸 거 같구나.”

“그럼요. 외삼촌 말마따나 얌전히 지내니 아주 평화로운걸요.”

가볍게 대꾸했지만 조금 전 백작 부인과의 일이 입 안의 가시처럼 걸렸다. 멜리사가 잘 둘러대긴 했지만 데미안의 존재를 들킨 데다…… 킬리언의 재혼 상대 일까지.

클로에란 여자. 그리고 자신. 금발에 초록 눈이 아니라는 대답에 밀려들던 복잡한 감정이 아직 잔재처럼 가슴에 남아 있었다.

어쩐지 흐릿해진 로위나의 표정에 제레미가 미간을 좁혔다.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외삼촌. 어쩌면.”

어설프게 속여 봤자 더 걱정을 끼칠 뿐이었다. 입술을 말아 문 로위나가 순순히 털어놨다.

“우리 도망칠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말이지?”

“공식적인 소식은 아니지만……. 공작 저하의 재혼 상대가 정해진 모양이에요.”

“뭐?”

“이번엔 지체 높은 후작가의 아가씨라고 하더군요. 나와 아예 격이 다른.”

자조한 로위나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성혼이 정식으로 오고 가면 난 또 버려지겠죠.”

더군다나 이번 상대는 ‘대체품’이 아니었다. 질리면 거침없이 버릴 장난감이 아니라, 정말 존중하고 사랑할 고결한 여자.

“로위나.”

“그때까지 데미안만 잘 숨기면 될 거 같아요. 애초에 아이에게 아무 관심도 없어 보이지만.”

“로위나.”

“성혼을 앞두고 버려지겠죠. 이제껏 노심초사한 게 바보 같아요. 하하…….”

“로위나!”

넋을 잃은 듯 중얼거리는 조카의 어깨를 움켜쥔 제레미가 침착하게 말했다.

“진정해.”

“외삼촌…….죽여 버리고 싶어요.”

“…….”

“정말 날 너무 비참하게… 흑……. 너무 끔찍하게 만들어.”

오기로 참은 눈물이 기어이 터졌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 로위나는 외삼촌의 품에 안겨 울었다. 한참을 운 다음에야 제레미가 그녀의 고개를 들게 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로위나.”

“무슨 말이에요?”

“공작은 널 놔줄 생각이 없어. 절대로. 결혼한다 해도.”

무심한 척 굴지만 온 신경이 로위나에게 향한 남자였다. 성에 오고 한 달간은 나이 차이가 꽤 남에도 로위나와 말을 섞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했을 정도로.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도 없었지만, 로위나와 함께 있는 남자의 시선은 언제나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음습하고 질척한 집착이 서려 있었다. 차라리 상대의 목을 꺾을지언정 버려지지는 않을 남자였다.

그래서 더 도망 준비에 공을 들였고 생각보다 훨씬 애를 먹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이야. 내 직감이 언제 틀린 적이 있었어?”

“……아니요.”

순순히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두 손으로 제 뺨을 쓸어올렸다.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올리고 나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제레미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로위나, 너…….”

“네?”

“……아니다.”

말할 듯 말 듯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제레미가 시선을 창 쪽으로 돌렸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던 로위나 또한 덩달아 창밖을 바라봤다.

추위는 날로 줄어들었다. 초봄에 들기 시작해 소생하는 온갖 생명으로 활기가 돌기 시작한 4월이었다. 눈이 전부 녹고 봄을 지나 여름이 되면 아마 볼 수 없게 될 모습들을 로위나는 눈에 새겨넣었다.

* * *

갑자기 주어진 자유는 짧게 끝났다. 사흘이나 얼굴을 안 비치던 킬리언은 어느 밤 불쑥 돌아왔다. 전보를 듣자마자 다급하게 데미안을 내보낸 로위나는 정숙한 아내처럼 현관에 서서 그를 맞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다녀오셨어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한 킬리언이 모자와 장갑을 벗었다. 그것을 받아 비앙카에게 건넨 로위나가 침실로 올라가는 킬리언의 뒤를 졸졸 쫓았다.

“별 연락이 없으시길래 걱정했어요. 급한 일은 잘 끝나셨어요?”

“그게 그렇게 궁금해요?”

“그럼요. 언제나 그랬는걸요.”

부드럽게 대답한 로위나가 등 뒤로 침실 문을 닫았다. 넥타이를 풀고 웃옷까지 벗어 그녀에게 건넨 킬리언이 벽난로 앞 카우치에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로위나가 미리 준비해 둔 양주잔을 든 그를 관찰하듯 바라봤다. 결벽적이리만치 완벽을 추구하는 남자였다. 오랜 시간 일을 하고 돌아오고도 옷자락 한 번 흐트러뜨린 적 없는.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 밤의 그는 조금 낯설었다. 몇 달 전 재회했을 때 그녀를 휘감았던 느낌이 다시 한번 로위나를 덮쳤다. 이어진 침묵 속에 침을 삼킨 로위나가 슬그머니 운을 뗐다.

“어디 몸이 안 좋으신가요? 뭔 일이라도 있었다던가.”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어딘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안 그래도 흰 편인 얼굴이 파리해 보였고 뺨도 약간 핼쑥해진 느낌이었다. 마치 큰 병이나 깊은 부상을 입어 앓고 온 사람마냥.

그러나 조심스러운 걱정에 돌아온 건 차가운 비아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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