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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39화 (39/120)

39화

“여기 물 가져왔습니다.”

“고마워.”

“도련님도 주스 가져왔으니 드세요.”

“와!”

물을 꿀꺽 마신 로위나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맞다. 멜리사.”

갈증을 해소한 뒤 뒤늦게 떠오른 얼굴에 로위나가 목소리를 죽였다. 데미안이 주스를 마시는 사이, 눈치 빠른 멜리사가 허리를 굽혀 그녀의 입에 귀를 갖다 댔다. 로위나가 빠르게 귓속말했다.

“의자에 묶여 있던 여자 말이야. 어떻게 됐어?”

“아.”

혀가 잘려 부두에 내동댕이쳐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어색하게 웃은 멜리사가 적당히 대답했다.

“그냥 돌려보내신 것 같아요. 다시는 똑같은 짓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 내시고요.”

“그랬구나…….”

겁에 질린 얼굴을 떠올린 로위나가 멜리사의 대답에 저도 모르게 올라갔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캐롤 버티머는 어떻게 보면 그녀를 지금 이 상황으로 몰고 간 원흉이었다. 밉고 원망스러운 상대였지만, 불구가 되거나 죽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모진 마음을 먹기란 타고난 성정상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로위나가 미소를 되찾았다.

“맞다. 선생님은?”

“내일 올라오신대요.”

“그렇구나. 저하는?”

“비앙카 님 말로는 오늘 일이 있으셔서 안 들어오신다고 하셨어요. 원한다면 도련님과 함께 침실에서 주무셔도 된다고도요. 일이 바쁘셔서 아마 모레까지도 안 들어오실 수 있대요.”

그 시간 동안은 데미안과 붙어 지내도 괜찮다는 이야기였다. 화색을 한 로위나가 아들의 뺨에 번갈아 입 맞췄다.

“간지럽다니까!”

까르르 웃은 데미안이 뽀뽀를 되돌려 줬다. 사이좋은 모자간을 본 멜리사가 자리를 피했다. 모처럼 만에 생긴 아들과의 시간에 로위나가 들뜬 목소리로 데미안에게 물었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없어?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데려가 줄게.”

그녀의 얼굴이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변장을 하고 삯마차를 타면 괜찮을 것이다. 처음 수도에 올라와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가득한 데미안에게 그동안의 보상을 해 주고 싶었다.

“음…….”

주어진 기회에 잠시 고민하던 데미안이 불쑥 대답했다.

“오늘 간 공원!”

“뭐? 이미 갔잖아. 다른 곳은? 재밌는 곳 많아. 장난감 가게나 사탕 가게나 백화점에는 아이들을 위한 곳도 있고…….”

“거기도 좋겠지만 이번엔 공원에 가고 싶어, 엄마.”

“왜? 오리 때문에?”

“아니.”

고개를 저은 데미안이 해사하게 웃었다.

“그 아저씨 한 번 더 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위험한 순간, 망설임 없이 자신을 끌어안은 큰 손이 가슴에 깊게 박혔다. 제레미 할아버지도 물론 남자고 잘해 주셨지만, 그 아저씨에게 느낀 건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데미안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남몰래 품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소망이 떠올랐다. 아버지란 사람은 어쩌면 그런 아저씨가 아닐까. 왠지 모르게 느껴지던 고동의 이유도 다시 한번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음 날, 같은 시간 공원에 갔지만 어제의 벤치에 앉아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리던 사람은 오지 않았다.

“어쩌면 병원에 계신 건 아닐까? 팔을 다치셨다며.”

시무룩해서 마차에 탄 데미안을 로위나가 달랬다.

“그런 걸까……?”

“깊게 물리신 거라면… 그럴 수도 있어요. 저도 알아볼게요.”

“응…….”

상냥한 멜리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입을 쭉 내밀고 차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 아들의 뒤통수를 보던 로위나 또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데미안이 말하는 ‘아저씨’는 그녀에게도 아들을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었다. 직접 뵙고 감사의 인사를 해야 조금이나마 마음의 짐을 덜 것 같았다.

“멜리사. 혹시 제녹 씨한테도 말해 줄 수 있을까?”

“아. 그럼요. 말씀드릴게요.”

빙긋 웃은 멜리사가 오늘 아침에 발행된 신문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 기사 읽어 보셨어요? 내일부터 왕실 사냥터를 개방한대요. 시민들에게 일주일 동안이요.”

“사냥터?”

언제 풀이 죽었냐는 듯 귀를 쫑긋 세운 데미안이 뒤를 돌았다.

“네. 사냥터요. 아주아주 넓은 숲이에요. 여기서 멀지 않아요.”

“그런 데가 있어?”

로위나 또한 바뀐 화제에 맞장구쳤다. 무거웠던 공기가 조금 가벼워지자 멜리사가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네. 저도 몰랐는데, 사슴이랑 토끼들이 가득한 곳이래요.”

“엄마! 나 가고 싶어. 응?”

금세 흥밋거리를 바꾼 데미안이 흥분해 눈을 반짝였다.

“얌전하게 지내면 데려가 줄게. 밥 잘 먹고 유모들한테 떼쓰지 않고 말 잘 들으면.”

“응! 나 잘할 자신 있어!”

“그럼 먼저 자리에 바르게 앉는 것부터 해 볼까?”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미소를 교환한 멜리사와 로위나가 다시 찾아온 평화에 만족하는 때였다.

별안간 교차로에서 마차가 멈춰서더니 조금 앞서가던 다른 마차에서 웬 귀부인이 내려 다가왔다. 그리고는 뒤따르던 하인을 시켜 차창을 두드렸다.

“미스 필로네!”

“레이첼 백작 부인……?”

가발을 쓰고 삯마차를 타서 설마 알아볼 줄 몰랐던 로위나가 얼어붙었다. 멜리사가 데미안을 뒤로 숨긴 뒤에서야 로위나가 느릿하게 마차 문을 열었다.

“역시 맞네요. 방금 스쳐 지나가다 본 것 같아서. 내가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거든요.”

“아. 그러셨군요.”

“어디 갔다 오는 길이었어요? 오전에 내 살롱도 안 오고. 중요하게 할 이야기도 있었는데. 어머, 가발도 썼네요?”

“그게…… 오늘은 좀 답답한 기분이라, 잠시 산책을 하고 싶어서요. 공원에 다녀왔어요. 가발은 그냥 기분전환으로 썼고요.”

“그랬구나…… 뭐, 그런 날이 있죠.”

별다를 것 없는 대화였지만 백작 부인의 눈이 예리하게 마차 안을 탐색했다. 잔뜩 긴장한 로위나가 어떻게 대화를 마무리 지을까 고민하는 동안, 엣취 하는 기침 소리가 끼어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백작 부인이 바로 물었다.

“누가 더 있나요?”

“아. 그게…… 제가 기침 한 거예요.”

“거짓말. 어린애 기침 소리 같던데? 내가 애를 넷이나 낳았는데 그걸 모를까.”

멜리사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뜬 백작 부인의 시야에 꼼꼼하게 숨겨져 있던 작은 발이 들어왔다.

“어머. 작은 신사분이네?”

동시에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레이첼 백작 부인은 그녀에게 잘 대해 주고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데미안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친부인 킬리언도 모르는 아들의 존재를 소수의 몇 명을 제외하고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됐다.

“저하의!”

옥죄여 오는 공기에 옴짝달싹 못 하던 멜리사가 임기응변을 발휘했다.

“저하의 외가 쪽 먼 친척 조카세요. 외국의 귀족 자제분이신데 우리나라 말도 잘 모르시고 수줍음이 많으셔서요.”

“어머. 그래?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시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백작 부인이 로위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어제 오기도 했고, 며칠 안 있다가 바로 돌아갈 거라서요. 워낙 낯을 많이 가리셔서…….”

“그랬군요…….”

뭔가 미심쩍긴 하지만 공작의 먼 친척의 얼굴을 억지로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쉽게 입맛을 다신 백작 부인이 관심사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잠시 시간 낼 수 있어요?”

“갑자기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아들과 함께 하는 천금 같은 시간이었다. 로위나의 안색이 흐려지자 백작 부인이 힘주어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라서요. 안 들으면 후회할 텐데?”

은근한 어조가 어쩐지 반드시 들어야 할 것 같다는 압박감을 줬다. 백작 부인에게 밉보이면 나중에 골치가 아플 수도 있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로위나가 멜리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잠깐 살롱에 다녀올게. 도련님을 부탁해.”

“혼자 가시게요? 오늘 비번이긴 하지만 조앤을 부르시는 게…….”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자주 가던 살롱인걸. 쉬고 있는 사람 부르는 것도 마음 안 내키고.”

부드럽게 거절한 로위나가 마차에서 내려 백작 부인의 마차로 갈아탔다.

* * *

교류하는 다른 귀부인들이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레이첼 백작가의 타운하우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소엔 두세 명의 손님이 늘 있었던 넓은 응접실에서 백작 부인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하녀가 차를 내오자마자 백작 부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본인이 굉장히 위기인 거 알고 있나요, 미스 필로네?”

“……예?”

“태연한 걸 보니 역시 모르는 모양이네요. 혹시 알고 있나 했는데. 역시나.”

순진한 얼굴에 작게 혀를 찬 백작 부인이 차로 목을 축였다.

“전에 말했죠? 내 언니가 여왕 폐하의 시녀라는 거.”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절대 왕정 시대가 지나 귀족 공의회가 생기고 여왕의 위세는 예전 같지 않았지만, 이 나라에서 왕관이 갖는 의미는 아직 다른 어느 것보다 더 중요하고 무거웠다.

그 일례로 허드렛일을 도맡는 하녀와 달리, 여왕의 측근에서 그녀의 말벗을 하며 자잘한 시중을 드는 시녀의 위상 또한 높은 편이었다. 보수가 높지 않는대도 앞다투어 지원할 만큼 가문의 영광이고 명예로운 일이었다. 백작 부인 또한 친언니가 그 자리에 있다며 그 사실을 입이 닳도록 자랑하고 다녔기에 모를 리가 없었다.

잠시 목을 가다듬던 백작 부인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건 언니가 비밀리에 전보로 알려 준 기밀 정보인데, 어제 여왕께서 왕성으로 탈던 후작가의 아가씨를 초대하셨어요. 정문이 아닌, 뒷문으로요.”

사형선고라도 읽어 내리듯 비장하게 내뱉은 말치고는 내용은 평범했다. 정적이 깔리고 눈만 깜빡이는 로위나를 향해 백작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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