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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38화 (38/120)

38화

긴 기차 여행을 마치고 수도로 올라온 데미안은 태어나 처음 보는 풍경에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우와! 저건 뭐야?”

“저건 가스등이라는 거예요. 도련님.”

“저 건물은? 사람이 정말 많아!”

“백화점이에요. 안에는 드레스부터 시작해서 신사복, 식료품, 귀금속과 온갖 물건을 팔지요.”

“말도 사람도 정말 많다!”

해맑은 감탄에 유모들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이 같이 안 오셔서 섭섭해하실 줄 알았는데 괜찮으세요?”

“어차피 내일이면 올라오시잖아. 하루인데 뭐.”

데미안이 의젓하게 어깨를 폈다.

“곧 엄마도 보고, 그러니까 괜찮아. 예정보다 이틀이나 빨리 올라왔고!”

“아. 그게 말인데요. 도련님.”

잠시 다른 유모들과 시선을 교환한 큰 유모가 슬쩍 제안했다.

“세상에서 제일 큰 공원에 잠시 들를까 하는데 어떠세요? 저랑만요.”

“음. 좋긴 한데 꼭 지금?”

“그 공원은 오늘처럼 날이 따뜻한 날에 가야 좋거든요. 오리도 볼 수 있고요.”

“정말?”

동물 이야기에 데미안의 머릿속에서 잠시 엄마의 얼굴이 사라졌다.

“좋아!”

마침 주말이라 공원은 여느 때보다 더 활력이 넘쳤다.

황성의 절반 크기에 달하는 드넓은 공원에는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아이와 볕이 넘치는 날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인들, 돗자리를 펴 피크닉을 만끽하는 서민 가족들과 건전한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들로 붐볐다.

운 좋게도 호숫가 근처 긴 벤치를 발견한 유모가 데미안과 나란히 앉았다. 데미안이 호수에 줄지어 둥둥 떠다니는 오리 가족에 정신이 팔린 사이, 유모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배고프시죠? 간식거리를 좀 사 올게요. 여기 가만히 앉아 계세요. 어디 가시면 안 돼요.”

“알았어. 다녀와!”

눈은 여전히 오리 가족에 고정한 채로 데미안이 손을 흔들었다. 어미 오리를 졸졸 따라다니는 새끼 오리들의 수를 세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벌써 돌아왔나 싶어 데미안이 고개를 돌리자 방금 유모가 앉았던 자리에 낯선 남자가 앉아 있었다. 입술을 오므린 데미안이 작게 뇌까렸다.

“거기 자리 있는데…….”

“자리?”

긴 다리를 꼰 채 마찬가지로 호수를 바라보던 신사가 데미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자를 쓴 그의 얼굴은 챙으로 그림자가 져 데미안에게 보이는 건 입술과 날렵한 턱뿐이었다.

“벤치에 주인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군.”

깊게 울리는 저음이 데미안의 귀를 파고들었다. 남자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자 알 수 없는 감각이 데미안을 훑고 지나갔다. 왠지 모르게 그립고 끌리는 느낌이었다. 그림자로 가려진 얼굴을 보고 싶을 정도로.

빤히 올려다보는 눈에 남자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꼬마야. 네 이름이 뭐지?”

“어, 엄마가 모르는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어요.”

넋을 잃은 것도 잠시, 정신을 차린 데미안이 낯선 남자를 경계했다. 낮게 웃은 남자가 먼저 자신의 이름을 댔다.

“네 어머니 이름이 로위나 필로네지?”

“……어머니를 아세요?”

“글쎄.”

애매한 대답이었다. 고개를 갸웃한 데미안이 조심스레 남자를 살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인지 마음이 끌렸다. 전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해치거나 몹쓸 짓을 하지 않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제 이름은… 데미안이에요.”

“그렇구나.”

원하는 대답을 들은 것치고는 싱겁게 대꾸한 킬리언이 두 손을 깍지 껴 무릎 위에 얹었다. 그리고 다시 호수에 옹기종기 모인 오리를 바라봤다. 조금 전 데미안이 뚫어져라 쳐다보던 동물이었다.

“오리를 좋아하니?”

“네……, 동물이라면 사실 다 좋지만 오리가 제일 좋아요.”

흥밋거리가 나오자 소극적이었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그런 소년을 흘깃 본 남자가 다시 물었다.

“왜?”

“오리는 가족이 모여 다니니까요.”

“…….”

“엄마 오리와 아빠 오리는 새끼들을 항상 지켜 주고 사랑해 줘요. 그게 좋아요.”

잠시 품을 뒤지던 킬리언이 그대로 손을 되돌렸다.

“나도 가족이 있어요. 우리 엄마. 아빠는…….”

어울리던 다른 아이들은 다 엄마 아빠가 있었다. 로렌스와 로잘린도, 비록 아빠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일 년에 두 번은 힘껏 안기고 뽀뽀도 많이 받는다고 했다. 잠시 주먹을 쥐었다 편 데미안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빠는 멀리 있댔어요. 그래서 우리를 보러 올 수 없다고.”

시무룩한 말을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가만히 앉아 있던 킬리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에 데미안이 저도 모르게 덩달아 일어나려 할 때였다.

“꺄아악!”

어디선가 커다란 품종견을 산책시키던 귀부인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돌리자 목줄이 풀린 개가 이쪽을 향해 곧장 뛰어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작은 아이를 향해서.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개를 본 데미안이 공포에 눈을 꼭 감은 순간이었다.

다음 순간, 예상했던 고통은 없었다. 대신 자신을 감싼 커다란 몸이 느껴졌다. 눈을 뜬 데미안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킬리언의 팔을 보곤 눈물을 터뜨렸다.

“아저씨!”

“하…….”

사람들이 달려들어 킬리언의 왼팔을 문 개를 떼어 내 제압했다. 신음 하나 내지 않는 모습에 도리어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데미안이 다친 팔에 손을 뻗었다.

“어, 어떡해…. 아, 아저씨… 흑…….”

“괜찮아.”

다치지 않은 오른손으로 작은 머리를 쓰다듬은 킬리언이 데미안을 안심시켰다.

엉엉 울며 데미안이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모자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모자챙을 잡기도 전에 등 뒤에서 누군가 끌어당겼다.

“맙소사, 도련님!”

“유모…….”

“다친 곳은 없으세요? 제가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새파랗게 변한 얼굴로 데미안을 돌려세운 유모가 곳곳을 살폈다.

“아무 데도 안 다쳤어. 그보다…….”

뒤를 홱 돈 데미안이 킬리언을 찾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유모가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데미안의 손을 잡았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이만 돌아가요. 도련님.”

“으응…….”

* * *

슬럼가 빌라에서 기절한 로위나가 깨어난 건 늦은 밤이었다.

목 안이 타들어 갈 것 같은 갈증에 그녀는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침대 옆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빠른 걸음 소리와 함께 멜리사가 침실로 들어왔다.

“로위나 님!”

“멜리사…, 물… 물 좀…….”

겨우 상체를 일으킨 로위나가 말을 더듬었다.

“아. 네. 잠시만요.”

고개를 끄덕인 멜리사가 다시 나가고 머지않아 금세 문이 열렸다.

“멜리사? 벌써 물을 가져왔…….”

채 오 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로위나가 의아해하는데 쪼르르 다가온 방문자가 그녀의 품에 폭 안겼다.

“엄마!”

“데미안?”

“엄마…….”

“데미안…….”

약 보름만의 재회였다. 오래간만에 끌어안은 몸은 말랑하고 따뜻했다. 한참 아들을 힘주어 끌어안은 로위나가 포옹을 풀었다.

“언제 왔어, 아들? 엄마는 네가 모레에나 오는 줄 알았는데.”

“금방 왔어. 한 한 시간쯤 전에?”

“기차 타고 왔구나.”

“응!”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다시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안심되고 아늑했다.

“보고 싶었어요……. 엄마도 나 보고 싶었어?”

“그럼. 정말 보고 싶었어.”

매달리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은 로위나가 작은 이마에 쪽 입 맞췄다. 애정을 담은 입맞춤에 간지러운 듯 킬킬댄 데미안이 엄마 옆에 풀썩 누웠다.

“엄마, 여긴 되게 신기한 것 같아. 사람도 많고 건물도 많고 재밌는 물건도 많아 보이고.”

“금방 왔다면서 이것저것 봤나 봐?”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로위나의 눈에 데미안은 그새 또 훌쩍 커 버린 느낌이었다. 하루하루가 애틋하고 소중한 나날이었다. 제레미도 있는 데다 유모가 세 명이나 붙어 있다고 하지만 데미안은 아직 누구보다도 엄마의 보살핌이 가장 필요한 나이였다.

떨어져 있는 시간만큼 미안함도 커져 갔다.

“응! 나 오늘 공원도 갔어. 대따 크다? 엄마도 가 봤어?”

“그럼, 거기서 뭐 봤어?”

“호수! 호수에 오리 가족이 막 줄지어서 있었다?”

“우와. 그랬구나. 그런데 성에서 봤었잖아?”

“거기는 강이 너무 커서 잘 안 보였어. 밤이라 더 그랬고.”

“……그랬어?”

“응. 맞다.”

힘껏 고개를 끄덕이던 데미안이 불쑥 진지한 얼굴을 했다.

“나 큰 개한테 물릴 뻔했다?”

“뭐?”

기겁한 로위나가 눈을 크게 떴다. 아들의 어깨를 잡고 다친 곳은 없나 얼굴부터 발끝까지 살폈지만 다행히 상처는 없었다.

“아이, 엄마.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물릴 뻔했다고 했잖아. 물린 게 아니라.”

“다친 건 아닌 거지?”

“응. 다칠 뻔했는데, 어떤 아저씨가 구해 줬어.”

눈을 반짝이며 데미안이 환하게 웃었다.

“아저씨……?”

“모자를 써서 얼굴은 못 봤지만, 키도 막 크고 목소리도 되게 좋았다?”

“하아……, 감사합니다. 하나님.”

데미안은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만약 아들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로위나가 아들을 다시 숨 막히게 끌어안았다. 데미안이 몸부림쳤다.

“엄마! 답답해!”

“미안……. 그나저나 도와준 아저씨 이름은 들었어?”

“아니. 나 때문에 팔을 다쳤는데…….”

걱정스러운 얼굴로 데미안이 웅얼거리는데 열린 문으로 물잔을 든 멜리사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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