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원망스러울 텐데. 밉고 저주스럽지 않습니까?”
귓가에 속삭이는 건 악마였다. 킬리언 데본셔는, 기어코 그녀를 다시 정부로 만든 이 남자는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에서 손짓하는 악마였다. 그걸 알고 있지만 로위나는 고개를 저을 수가 없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숨죽이고 있던 추적하고 음습한 검은 덩어리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고문 도구는 전부 갖춰 놨으니 말만 하면 됩니다. 시행은 다른 사람이 할 테니.”
유혹은 집요하고 거침없었다. 어깨를 짚던 손이 서서히 내려와 그녀의 손을 덮었다.
“아니면 깔끔하게 총으로 죽여 버리는 편도 괜찮겠죠.”
심장의 박동이 빠르게 뛰었다. 아직도 어제처럼 생생했다. 온몸을 뒤흔들었던 좌절과 절망. 의지할 곳이 없어 싸구려 여관을 전전하고, 그마저도 돈이 동나 눈이 쏟아지던 밤 위태롭게 거리를 전전하던 나날들.
그 밤에 이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
“빚을 갚아요. 로위나.”
그의 얼굴을 똑 닮은 데미안을 떠올리는 순간, 심해 속에 가라앉던 로위나의 의식이 단번에 수면 위로 올라왔다.
“거절할게요.”
“뭐?”
이대로 이 남자가 하라는 대로 하면 다신 되돌릴 수 없는 짓을 저지르게 된다. 어떤 의미로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너고 말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분명 밉고 저주했던 건 사실이에요. 꼭 만나서 한 대 쳐 주리라 원망하고 또 원망했죠. 날 이용하고 배신했으니까.”
고해하듯 마음을 털어놓은 로위나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이런 식의 복수는 하지 않을 거예요. 이건 범죄니까.”
“저 여자가 네게 저지른 건 범죄가 아닌가 보지?”
나직한 물음엔 얕게 분노가 배어 있었다. 눈치채지 못한 로위나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렇다고 똑같은 짓을 하면 똑같은 인간밖에 되지 않아요.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테고요.”
빙 에두른 말이었지만 담고 있는 뜻은 확실했다. 나는 당신과 달라.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킬리언 데본셔. 겁도 없이 내뱉은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손등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등 뒤에서 덮쳐 온 냉기에 로위나는 입술을 떨었다. 그러나 뒤를 도는 대신 묶여 있는 캐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거의 경기를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싫어! 고문은 싫어! 살려 주세요!”
소리를 내지르는 캐롤 앞에 선 로위나가 의자 뒤로 돌아가 그녀의 허리를 묶은 끈을 풀었다. 양발을 묶은 끈도 풀고 다시 앞으로 가 손목을 묶은 끈을 풀려고 손을 뻗었다.
마지막 한 손을 풀어 내리는데 짧은 한숨과 동시에 목덜미에 찌릿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하기도 전에 눈꺼풀이 감겼다.
“로위나!”
팔짱을 낀 채 캐롤을 풀어 주는 걸 보고 있던 킬리언이 의식을 잃은 로위나의 몸을 안아 들었다. 마지막 희망마저 눈앞에서 무너진 캐롤이 핏줄이 터진 눈으로 애걸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요! 뭐든지 다 할 테니까!”
그녀는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에서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을 마주했다. 온몸을 얼어붙게 할 정도의 차가운 동공이 소름 끼칠 정도로 기이한 안광을 뿜고 있었다. 마치 아무 감정 없는 야생동물과 마주친 느낌이었다.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서는 감각에 입술을 떠는데, 무감한 목소리가 대꾸했다.
“죽이진 않을 겁니다. 그녀가 원하지 않으니까.”
“아. 하나님!”
새벽바람에 영문 없이 들이닥친 남자들에게 납치돼 이대로 죽는 줄만 알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캐롤을 바라보던 킬리언이 로위나를 품에 안은 채 뒤를 돌았다.
왼손을 묶은 끈을 허겁지겁 풀어내려는 캐롤의 앞으로 한 남자가 섰다.
“이게 무슨……?”
그의 손에 들린 가위를 보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캐롤이 천천히 문고리를 여는 킬리언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이었다.
“아.”
“…….”
무언가를 깜박 잊은 사람처럼 잠시 멈춰 선 킬리언이 충고하듯 내뱉었다.
“혀 조심해요.”
비유가 아닌 직설이었다. 캐롤의 얼굴이 시체처럼 질렸다. 이윽고 처절한 비명이 오래된 건물에 울려 퍼졌다.
* * *
타운하우스로 돌아오자 비앙카가 주인을 맞았다. 실신한 채 공작의 품에 안긴 로위나를 본 비앙카가 화들짝 놀란 눈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저하?”
“별일 아닙니다.”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서늘했다. 주춤한 비앙카를 지나친 킬리언이 바로 계단 위를 올랐다. 침실로 들어가 넓은 침대 위로 로위나를 눕혔다.
숨소리조차 죽이며 뒤따라온 멜리사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하……, 로위나 님 시중은 제가.”
“내가.”
“…….”
“내 앞에서 함부로 입 열지 말라 했었는데.”
차분하지만 서릿발이 치는 것처럼 싸늘한 어조였다. 사색이 된 멜리사가 그의 등 뒤에서 부복했다.
“죄송합니다. 저하. 제가 주제도 모르고…….”
“나가요.”
두 번의 기회는 없었다. 휘청이며 일어난 멜리사가 침실을 나갔다.
머리맡 의자에 앉은 킬리언이 품을 뒤져 궐련을 꺼내 물었다. 커튼이 쳐져 어두운 침실 안에서 실오라기 같은 연기가 희게 피어올랐다.
오늘의 발단은 펠릭스의 말이었다.
―네 말이 맞았어. 정말 로위나 필로네의 이름을 대고 코르티잔 일을 한 여자가 있었어. 시골 촌 동네라 ‘공작가의 옛 정부’로 인기가 많더군.
그 말을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아가씨…… 아니 로위나 님은 모함을 받으셨습니다……. 5년 전의 일은 사실이 아니에요……. 흐흑…….
멜리사란 시녀의 고해로 혹시나 들었던 가정이 들어맞는 순간. 동시에 밀려든 진실에 그는 서서히 압사당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찢어 갈기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는 것만도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 진실의 핵에 누가 서 있는지 알기 전까지는. 베네딕트를 죽여 버리면 쉬운 일이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저 도마뱀의 꼬리를 자르는 격이었다. 뭔가가 더 있었다. 거대한 몸통이. 좋아하지도 않는 사교 시즌에 수도로 올라온 것도 그 일환 중 하나였다.
“로위나.”
손을 뻗은 킬리언이 로위나의 금발을 쓸어내렸다. 손에 감기는 감촉은 5년 전과 다를 것 없이 부드러웠다. 그대로 머리칼을 입술로 가져간 킬리언이 체취를 맡듯 입을 맞췄다.
캐롤 버티머를 납치해 그녀의 옛집에 끌고 가라 지시할 때, 그는 로위나가 하다못해 손 하나를 자르거나 다리를 자르라고 말하기를 기대했다. 그와 똑같아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로위나 필로네는, 그의 여자는 눈앞에 배신자를 갖다 바쳐도 복수를 포기하는 여자였다. 분노로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숨이 차올라도 끝끝내 용서를 택하는, 선량하고 마음 약한 여자.
캐롤 버티머를 묶은 끈을 풀어내는 로위나를 보면서, 그의 안에는 같은 그림자로 끌어내릴 수 없다는 열패감과 동시에 한가지 희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 여자도 용서했잖아.”
그의 시선이 가늘고 긴 목 아래에 걸린 목걸이로 향했다. 얼마 전 수도로 올라가는 날 그가 직접 목에 걸어 준 목걸이였다. 여태까지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던 허다한 귀금속과 달리, 단 하나의 명징한 의미를 가진.
“내 아이를 낳고 키웠잖습니까.”
시녀의 고백을 들었던 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분노가 밀려들었고, 혹시나 하는 가능성에 밤늦게 아무도 몰래 아이의 방을 찾았다.
그리고 잠든 아이를 본 순간, 가빠지는 숨에 가슴을 움켜쥐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얌전히 잠이 든 작은 얼굴을 눈으로 더듬었다.
부정할 수도 없을 만큼 그와 똑 닮은 아이였다. 평생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기대한 적도 없는 그의 자식.
충격과 함께 환희가 밀려들었다. 로위나에게 남자란 평생 한 명, 자신뿐이었다.
―무척 활발하시고 똑똑한 도련님이세요. 조금 주눅 들어 계시긴 하지만요.
이후 비밀리에 매일매일 올라오는 보모의 보고를 들었다. 가슴 안쪽에는 생전 처음으로 따뜻한 기운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었다.
아이가 수도로 올라오는 기간을 보름 뒤로 잡은 건, 그녀의 우선순위가 더는 그가 아니라는 것에서 온 작은 심술이었다.
“모든 게 명백해지면.”
“…….”
“전부 배상하죠. 맞는 자리를 주겠습니다. 당신에게도, 우리 아이에게도.”
차가운 손이 누워 있는 로위나의 반듯한 이마를 훑고 흐트러진 그녀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때까지 기다려요. 지금처럼 얌전히.”
무슨 속내를 감추고 있는 건진 몰라도, 그는 순종하는 로위나의 태도가 만족스러웠다. 인형처럼 웃고 있다가도 가끔 암고양이처럼 발톱을 드러내긴 하지만 애교 수준이었다.
한참을 잠든 여자를 내려다보는 사이, 문밖에서 누군가 노크했다.
“저하.”
조심스럽게 그를 부른 비앙카가 바로 말을 이었다.
“방금 도련님이 올라오셨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