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레이첼 백작가에서의 소동 이후, 공공연히 업신여김 받던 로위나의 평가와 입지는 완전히 탈바꿈했다.
로위나의 마음에 들기 위해 경쟁적이었던 남부만큼은 아니었지만, 공개적으로 그녀에게 호의를 보이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결정적인 계기는 레이첼 백작 부인의 살롱에 들면서였다. 마흔 남짓의 나이로 사교계의 상위에 군림한 백작 부인은 털털하고 솔직한 여성이었다. 예의 바르고 싹싹한 로위나에게 한 번 마음을 열자, 시시콜콜한 소문에서부터 쉽게 얻기 힘든 고급 정보까지 술술 털어놨다.
개중에서 어느 정도 신빙성 있고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로위나는 기억했다. 어쩌면 도망치는 것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연회 날을 떠올리면 지금도 심장이 서늘했다. ‘사생아’라는 단어에 심장이 철렁해 무작정 휴게실로 들이닥친 거였지만, 그 충동적인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냅다 저질러 놓고도 정부가 감히 왕족을 운운한 일이 그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내심 걱정했는데 의외로 킬리언의 반응은 담백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해요.
―예……?
귀를 의심했지만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녀를 침대에 눕힌 킬리언이 그녀 위에 올라탔다.
―머저리처럼 당하고 있지만 말고 지금처럼 하라고. 뒤에서 질질 짤 바엔 그게 나으니까.
―…….
덤덤한 말에 로위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한 번도, 단 한 번도 그의 앞에서 울어 본 적이 없었다. 5년 전 마지막 밤을 빼고는.
―상을 주는 게 좋겠지.
―내가 운 건 어떻게…… 아!
질문은 이어지지 못했다. 능숙하게 다가온 손길과 입술에 이후는 정신이 없었다.
“원래라면 주제넘은 짓을 했다고 했을 텐데…….”
킬리언의 태도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의 완전한 항복에 대한 승자의 관대함이라 해도 요새 그는 지나칠 만큼 부드러웠다. 예나 지금이나 달콤한 사랑의 말을 해 주는 건 아니었다.
알게 모르게 그와 함께 있을 때면 위태로운 줄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던 때와 달리 지금은 어느 정도 긴 시간 같은 공간에 있어도 더 이상 숨통이 막히지는 않았다. 저번엔 책을 읽는 그의 옆에서 저도 모르게 깜박 졸았을 정도로.
그때, 노크 소리가 다이닝 룸에 앉아 생각에 잠긴 로위나를 깨웠다.
“안녕하세요. 미스 필로네. 오늘은 계시는군요.”
화사하게 웃으며 들어선 이는 훤칠한 키의 신사였다.
놀란 것도 잠시, 인사하는 남자를 향해 로위나 또한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펠릭스 경이시죠?”
“그걸 어떻게 아셨죠?”
“저하와 친한 분이라고 언제 제녹 씨가 말해 줬거든요. 그런데 죄송해서 어쩌죠? 저하는 잠시 자리를 비우셨는데…….”
“아. 아닙니다. 죄송하긴요. 미리 약속도 없이 방문한 제 잘못이죠.”
어깨를 으쓱한 펠릭스가 슬그머니 그녀의 맞은편 카우치를 눈짓했다.
“잠시 앉아도 될까요?”
정부로 있었던 지난 3년 동안, 킬리언의 주변 인물 중 측근인 제녹과 베네딕트 외에는 직접 인사하고 대화한 이가 없었다.
타운하우스의 문을 열어 준 건 비앙카지만 단둘이 마주 앉아도 될까 로위나가 주춤하는 동안, 그가 능청스럽게 털썩 앉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녔더니 다리가 아프네요.”
“아……, 네.”
당황한 기색을 숨긴 로위나가 입꼬리를 간신히 올리며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들어온 하녀가 다과를 차리고 나간 뒤, 펠릭스가 본론에 들어갔다.
“사실 킬리언이 없는 시간에 온 건, 먼저 미스 필로네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예요.”
“물어볼 거요?”
일면식도 없는 사이에 뜬금없는 말이었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대뜸 벼락같은 말이 그녀에게 꽂혔다.
“네. 혹시 ‘캐롤 버티머’라는 여자와 아는 사이신가요?”
“캐롤… 버티머…….”
알다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그녀를 수도로 불러낸 뒤 막대한 빚을 떠안긴 옛날 친구. 아무리 찾아도 흔적을 알 수 없어 포기했던 이름이었다.
“그걸 어떻게!”
그 이름이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오자마자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역시 아시는군요.”
경악한 로위나와 달리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입맛을 다신 펠릭스가 이번엔 반대로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으세요.”
“…….”
“어떤 사이인지 물어도 될까요?”
“옛날… 고향 친구였어요.”
털썩 주저앉은 로위나가 반쯤 넋 놓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처참하게 날 배신했지만…….”
애써 기억 뒤로 밀어 놓은 얼굴이 떠오르자 당시의 암담함이 밀려들었다. 마른세수를 한 로위나가 나직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계시죠?”
“그건 나중에 알게 되실 겁니다.”
빙긋 웃은 펠릭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용건이 끝났으니 전 이만 가 봐야겠군요.”
말릴 새도 없이 그는 갑자기 들이닥쳤다가 갑자기 떠났다. 황망한 눈으로 닫힌 문을 바라보던 로위나에게 멜리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로위나 님. 방금 전 사환이 왔습니다. 저하께서 보내신 것 같아요.”
* * *
멜리사가 건넨 전보에는 짧게 주소 하나가 적혀 있었다. 별생각 없이 주소를 읽어 내리던 로위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멜리사와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주소로 가는 내내 그녀는 말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손님에 이어 갑작스러운 이동에 멜리사 또한 당황한 상태였다.
“로위나 님. 어째 점점 으슥한 곳으로 가는 것 같은데…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요?”
“…이 거리가 맞아.”
한숨을 내쉰 로위나가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차가 들어선 거리는 허름하고 다 쓰러져 가는 건물들이 빼곡한 성냥갑처럼 줄지어 선 슬럼가였다. 깡통을 하나 내놓고 구걸하는 걸인들과 간이 화로로 만든 드럼통 사이로 옹기종기 선 추레한 차림의 남자들이 풍경처럼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얽힌 좁고 복잡한 골목을 지나 마차가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로위나 님. 왠지 이상해요. 이런 곳으로 저하가 로위나 님을 보낼 리가 없는데.”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힐끔힐끔 훔쳐보는 시선들에 잔뜩 어깨를 움츠린 멜리사가 덜덜 떨었다.
“정 무서우면 여기 있어도 돼.”
“로위나 님!”
겁도 없이 뒤를 돈 로위나가 곧장 건물의 문을 열어젖혔다. 머뭇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멜리사 또한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사환이 전달한 전보를 손에 꼭 쥔 채 로위나는 앞장서 끼익 끼익거리는 낡은 계단을 올랐다. 기대 반, 불안 반으로 수도에 도착했던 첫날 올랐던 계단이었다.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 버려 꿋꿋이 계단을 올라가던 순간.
그때 느꼈던 불길함이 다시 재현되는 기분이었다. 그 불길함은 이어 꼭대기 층에 도착해 문고리를 잡았을 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심호흡한 로위나가 결연한 얼굴로 문을 열어젖힌 순간, 울부짖는 목소리가 그녀를 덮쳤다.
“으으으읍!”
의자에 손발이 포박된 여자가 재갈을 물고 울고 있었다.
“캐…롤……?”
“로위나 님!”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알아보기 무섭게 기겁한 멜리사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괜찮아. 물러서 있어.”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그녀를 뒤로 보내고 천천히 캐롤에게 다가갔다. 오래전 빚쟁이들이 한바탕 쓸고 가 폐허가 된 집에서 거의 10년 만에 재회하는 배신자였다.
재갈을 빼주자마자 캐롤이 헐떡이며 애원했다.
“사, 살려 줘…, 살려 줘! 로위나!”
“뭐……?”
“과거 일은… 내가 잘못했어. 그,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난데없는 사과와 애원에 머릿속이 띵했다. 굳은 로위나가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물러서자 캐롤이 절규하듯 빌었다.
“제발! 제발 살려 줘, 응? 네게는 정말 못 할 짓을 했어…, 용서해 줘. 정말 미안해… 흐흐흑…….”
“하…….”
지난 세월 그토록 받길 원했던 최소한의 사과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머리가 어질해 로위나는 한 걸음 더 물러섰다.
“로위나! 제발… 흐흐흑!”
캐롤은 무슨 짓을 당했는지 공포와 충격, 절박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데 반해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없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려 로위나가 다시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어둑하게 가려져 있던 구석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위나.”
“……킬리언.”
그녀를 부른 건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냉담한 모습의 공작이었다. 거뭇한 눈 밑이 조금 피곤해 보였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흥분을 가라앉힌 로위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죠?”
“저번에 말했던 상입니다.”
“…….”
“주기로 했었는데, 기억해요?”
마치 하루 늦은 생일 선물을 건네듯 담담한 어조였다. 밀려드는 두통에 로위나가 숨을 골랐다.
“캐롤은… 어떻게 찾은 거죠? 이름을 말한 적은 없는데.”
“8년 전, 당신 이름을 대고 코르티잔 일을 했던 여자는 한 명뿐이었으니까.”
“뭐…라고요?”
“그것까진 몰랐던 모양이군.”
낮게 혀를 찬 킬리언이 반대편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찬가지로 모서리에 모습을 감췄던 장정 네 명이 밝은 쪽으로 다가왔다.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사정없이 몸을 떨던 캐롤이 비명을 내질렀다.
“잘못했어요! 제발요! 살려 주세요!”
처절하리만치 애처로운 비명에 로위나가 킬리언을 쏘아봤다.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난 빚을 지는 걸 싫어합니다. 로위나.”
“예……?”
뜬금없는 대답에 얼어붙은 로위나의 뒤로 다가온 킬리언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은혜건 배신이건 받은 대로 돌려줘야 남들이 다시는 덤빌 수 없는 법이거든. 당신도 이제 그걸 아는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