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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35화 (35/120)

35화

“왜 웃으시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다들 흥미를 가지는 게 웃겨서요.”

“네?”

“그렇잖아요. 그 말이 맞다고 쳐요. 공작 저하가 그 여자를 다시 앉힌 지 벌써 4개월이나 지났어요. 사생아가 정말 있다면 공작님 성정에 진즉 후계를 발표하지 않았을까요?”

“그, 그건…….”

“그리고.”

반박하려는 자작 부인의 말을 가로막은 백작 부인이 결정적인 말을 내뱉었다.

“무엇보다 내가 공작님이라면, 사생아를 후계로 삼을 생각이 있었다면 미스 필로네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고 억지스럽더라도 전처의 아이로 잘 포장하겠어요. 그 이후 이혼을 하던가 하고요. 정식 성혼으로 태어난 아이니 종교적으로도 신분적으로도 문제가 없고 나중에 잡음도 없겠고요.”

논리적인 이야기에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무안을 당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자작 부인을 제쳐두고 다른 부인이 상황을 정리했다.

“자자. 그 여자 이야기는 그쯤 하죠. 애초에 이해하려 들면 안 돼요. 저런 덜떨어진 여자들의 생각을 우리 같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겠어요? 말해 봤자 입만 더럽죠.”

“하긴. 그렇네요. 말씀 잘하셨어요. 호호호.”

누군가의 한마디에 옹기종기 앉은 여자들이 웃음을 터뜨린 때였다. 문 쪽을 바라보는 곳에 앉은 한 여자가 돌연 웃음을 멈추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 모습을 의아하게 보던 다른 여자들도 다음 순간, 귀를 파고든 목소리에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

“모두 오랜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나요?”

언제 들어왔는지 인기척도 없이 널찍한 휴게실로 들어온 로위나가 사뿐사뿐한 걸음으로 그녀들에게 다가왔다. 귀부인들은 뒷담을 하다 걸린 무리답게 대개 헛기침을 하거나 시선을 피하기 급급했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레이첼 백작 부인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들어온 줄 몰랐네요. 미스 필로네. 노크라도 하지.”

“아. 죄송해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시는지 궁금해서 저도 모르게 그만.”

싱긋 웃은 로위나가 아무 이야기도 못 들었다는 듯 예의 바르게 대답하자 안심했는지 다들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랬군요. 여기 빈 자리에 앉아요.”

유일하게 호의적인 레이첼 백작 부인이 비어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묵례한 로위나가 빈 의자에 앉으려는데 그 옆에 앉아 있던 에스텔 자작 부인이 날카롭게 입을 열었다.

“여긴 정숙한 귀부인들의 공간이 아닌가요?”

“…….”

“그렇지 않은 여성이 이 자리에 있으면 평판이 나빠질까 걱정되네요.”

명백한 적의를 드러낸 말에 간신히 풀렸던 분위기가 다시 얼어붙었다. 부인들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서로 눈치만 보는 가운데, 보다 못한 레이첼 백작 부인이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제일 불쾌하고 모욕감에 떨어야 할 로위나가 오히려 감탄스러운 듯 눈을 깜박였다.

“대담하시네요. 에스텔 자작 부인.”

“……네?”

“지금 그 발언은 절 초대하신 레이첼 백작 부인뿐만 아니라 절 이곳으로 데려오신 공작 저하를 모욕하신 건데, 책임지실 수 있으신가요?”

“흠흠… 그게 무슨 말이죠? 나는 그저 이 자리에 적절하지 않은 사람을 지적했을 뿐인데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헛기침을 한 에스텔 자작 부인이 문득 5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파우더룸에서 친한 부인과 수다를 떨다 장본인에게 들켰던 순간. 보복을 하는 건 아닐까 가슴이 철렁했던 게 무색하게도 오히려 죄인처럼 황급히 파우더룸을 빠져나가던 여자였다. 전전긍긍하던 이후에도 별다른 탈이 없자 두려움은 걷히고 슬슬 다른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신분도, 집안도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주제에 얼굴과 몸으로 그동안 그녀가 남몰래 짝사랑하던 공작 저하의 옆을 꿰찼던 여자.

그런 여자가 5년 전, 공작의 갑작스런 성혼을 앞두고 처참하게 버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속으로 환희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다니. 소식을 듣는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열등감과 질투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어떻게든 끌어내리고 오물을 묻혀야 숨통이 트일 것만 같았다. 그래서 조용히 여론을 조성하려 했는데 레이첼 백작 부인에게 막혀 버려 화가 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다 이 여자가 옆자리에 앉는다니.

“미스 필로네가 많이 배우지 못해 모르는 모양인데, 사람한테는 해야 할 일과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답니다. 그것으로 급이 정해지고 있어야 할 곳이 정해지는 거죠.”

당황을 추스른 자작 부인이 부드럽게 훈계했다. 대놓고 깔보는 말투에도 고분고분하게 이야기를 듣던 로위나가 웃으며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렇답니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어요.”

“네.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 김에 한 가지만 여쭤도 괜찮을까요?”

“무엇을요?”

의기양양해진 자작 부인이 고개를 쳐들었다. 얼굴을 보고 마음껏 비웃어 주려는 의도였지만 마주한 여자의 얼굴은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냉담하고 무서웠다. 방금 웃었다는 게 믿기지 않게 소름 끼칠 정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로위나가 또박또박 물었다.

“감히 왕족의 핏줄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건 해야 할 일인가요? 아니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인가요?”

“뭐, 뭐라고요?”

갑자기 터진 폭탄 같은 발언에 모두 숨을 죽였다. 태연한 모습에 설마 조금 전 말을 들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자작 부인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그냥… 생각 없이 한 말이에요. 가벼운 수다였을 뿐인데 유언비어라느니 그런 표현은…….”

“그런가요? 그럼 저랑 같이 가시죠.”

“네?”

“가벼운 수다라고 하셨잖아요. 그 말을 공작님 앞에서 다시 하실 수 있으시면 인정할게요.”

“무슨…….”

거침없이 밀어닥치는 로위나에게 당황한 자작 부인이 다급하게 도움을 청하려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그러나 다들 시선을 피할 뿐 어느 한 명도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같이 가요. 자작 부인.”

“아…….”

팔까지 잡아 끌어 올리려는 기세에 결국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자작 부인이 체면을 집어던지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미스 필로네. 사과할게요.”

“…….”

“다시는 그런 말 어디 가서도 하지 않을게요. 맹세해요. 그, 그러니까…….”

데본셔 공작가의 힘은 정재계를 아울러 에셀우드 전반에 퍼져 있었다. 건너 들은 소문으로는 뒷세계에도 손을 뻗었다는 말도 있었다. 한때 애절하게 가슴에 품었지만, 킬리언 데본셔는 정말 사람인가 할 정도로 피도 눈물도 없기로 유명한 남자였다. 그런 남자에게 밉보이게 된다면 어떤 처지가 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미스 필로네.”

돌아온 침묵에 자작 부인은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다. 그 모습에 낮게 혀를 찬 레이첼 백작 부인이 의자를 뒤로 끌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다들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일어난 백작 부인이 정중하게 로위나에게 사과했다.

“불쾌했다면 나도 사과할게요. 저하와 미스 필로네를 초대한 사람으로서 이런 경험을 하게 만들어서요.”

“백작 부인…….”

“저하께서는 미스 필로네 말대로 몇 없는 왕족이시죠. 그런 분에 대해 말로는 못 할 불경죄를 저질렀지만……, 자작 부인은 지금 술도 마신 데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니 용서해 주면 안 될까요?”

“백작 부인……!”

구명줄이라도 잡은 얼굴로 자작 부인이 감격에 차 백작 부인을 불렀다. 자작 부인과 눈이 마주치자 백작 부인이 냉담하게 다시 로위나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아무런 벌을 받지 않는 것도 말이 안 되니, 에스텔 자작 부인은 앞으로 내 모임에 일절 초대하지 않겠어요.”

단호한 말에 다들 놀란 숨을 들이켰다. 동시에 자작 부인의 얼굴이 창백한 걸 넘어 새하얗게 질렸다. 수도 사교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백작 부인의 선언은 단순한 교류 단절이 아닌, 명백한 사교계 추방령이었다.

“부인!”

결국 눈물을 터뜨린 에스텔 자작 부인이 황급하게 백작 부인에게 다가갔다. 걸인이라도 보는 듯 미간을 찌푸린 백작 부인이 어쩔 줄 모르고 벽에 붙어 선 시녀 중 자작 부인의 시녀를 향해 호통을 쳤다.

“뭐 하는 건가! 모시는 마님이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데 마차로 모시지 않고.”

“아…! 네!”

안절부절못하다 화들짝 정신 차린 시녀가 저항하는 자작 부인을 문밖으로 모셨다. 어느 정도 소란이 진정된 후 다시 자리에 앉은 백작 부인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빈 자리가 두 석이 되었네요.”

“…….”

“한 석은 혹시 모를 손님 때문에 비워 두는 게 원칙이지만, 다른 한 석은 비워 둔 적이 없어서요.”

백작 부인이 가리킨 쪽은 방금 자작 부인이 앉았던 의자였다. 경악한 사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사이, 제 시녀에게 자작 부인의 의자를 뒤로 끌게 한 백작 부인이 권했다.

“괜찮으시다면 앉아 주시겠어요?”

제안은 부드럽지만 확실했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로위나를 향해 백작 부인은 미소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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