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질 건 없어.”
“…….”
“아무 의문도, 아무 질문도 품지 않고 내가 주는 음식을 먹고 내가 주는 옷을 입고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로위나는 대답 대신 거울에 담긴 두 사람을 바라봤다. 아무 저항 없이 목덜미를 내어 준 여자와 그런 여자의 목을 지배적으로 감싼 남자. 어찌할 도리 없이 급소를 내보인 초식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이 남자의 변덕에 따라서 그녀의 처지뿐 아니라 데미안의 처지 또한 달라졌다.
킬리언은 자신의 위치를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그와 그녀가 얼마나 다른 입장에 있는지를.
깨닫고 나니 희미하게 고개를 쳐들었던 반항심은 금세 꼬리를 말고 사라졌다.
“알았어요. 킬리언.”
백화점에 진열된 인형처럼 싱긋 웃은 로위나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감싼 그의 손등을 매만졌다. 도드라진 힘줄을 지나 손가락으로 이어지는 뼈를 톡톡 두드렸다. 닿을 듯 말 듯 은근한 접촉에 킬리언이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깍지를 끼자 긴장한 듯 감싼 목의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포획되어 사냥꾼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사냥감처럼 가만히 굳어 있는 로위나를 향해 잠시 입을 다물었던 그가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로위나.”
“…….”
“이건.”
뭐라 말을 이으려는데 문밖의 노크 소리가 팽팽히 당겨진 공기를 가로질렀다.
“로위나 님.”
“아.”
“멜리사입니다. 목도리와 외투를 가져왔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반가운 목소리에 화색이 된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로 들어오라 말하려는 순간, 고개가 돌려지더니 뜨거운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왔다.
“음…, 하…….”
샅샅이 입천장과 치열을 훑고 그녀의 혀를 휘감고 나서야 킬리언의 입술이 떨어졌다. 언제 속박했냐는 듯 담백하게 손을 거둔 그가 잠잠해진 문을 열어젖혔다. 감히 눈도 못 마주친 채 고개를 숙인 멜리사가 공손히 뒤로 물러났다. 일별도 없이 킬리언이 그녀의 옆을 스쳐 멀어진 다음에야 굳었던 두 여자의 숨통이 트였다.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멜리사가 로위나에게 다가와 목도리를 둘렀다. 조금 떠는 멜리사의 손에 마음을 가라앉힌 로위나가 먼저 말을 걸었다.
“많이 놀랐지?”
“아, 아니요.”
고개를 젓던 멜리사가 이내 대답을 번복했다.
“사실 조금이요…….”
솔직한 대답에 로위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늦었어? 드레스룸은 바로 옆방인데.”
“옷이 많아서 찾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그랬구나.”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로위나가 마지막으로 코트를 걸쳤다. 따뜻하게 차려입고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니 옛날 외삼촌의 동화 속에서 봤던 북쪽 나라의 공주처럼 보였다.
춥고 무시무시한 늑대들과 빙하로 둘러싸인 북쪽 나라에 살던 공주님. 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척박한 환경에서 만족하며 살다 어느 날 남쪽의 왕자를 만나게 되어 사랑에 눈을 뜬다는 이야기였다. 사랑 이야기라면 질색하는 제레미가 어린 조카를 위하여 지은 첫 동화였다.
그 동화 속 공주님은 결국 행복해졌었나? 잠시 기억을 되짚던 로위나는 고개를 저었다. 동화는 동화였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때마침 멜리사가 그녀의 상념을 깨뜨렸다.
“이번에 올라가면 오래 계시는 거죠?”
“응. 수도에서 봄을 보낸 뒤 여름엔 섬으로 갈 거야.”
“섬이라면…….”
“너도 한 번 간 곳.”
덤덤한 대답에 멜리사의 안색이 흐려졌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조심히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이미 과거의 일인 걸.”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음에도 도리어 미소 짓는 로위나를 보며 멜리사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성탄절 전야제에서의 밤이 떠올랐다. 누구보다도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웃었던 로위나. 이후 벌써 4개월이 지났다. 눈이 조금씩 녹고 초봄이 오는 동안 공작 성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생기에 가득 차 있었다.
비록 정부의 위치였지만 오 년 전과 다르게, 성안의 큼지막한 내정을 관리하고 하녀와 하인들에게도 허물없이 대하는 로위나에게 성안 사람들은 서서히 매료됐다.
어딘가 의기소침하고 자존감이 낮던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로위나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 건 인근 영지에 사는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로위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마차를 타고 주변 귀족의 티타임에 갔고, 시간이 조금 늦어지면 가끔 공작이 직접 그녀를 데리러 오곤 했다. 로위나의 옆에 언제나 붙어 있는 멜리사의 눈에 경악한 여자들의 얼굴이 생생했다.
“공작님이 이런 로맨틱한 분인 줄은 몰랐는데요.”
“그러게요. 마치 다른 분 같아요. 냉담한 분위기에 말 걸기도 조심스러운 분인데…….”
쥘부채 너머로 속삭이던 말들은 놀라움과 약간의 질시, 그리고 로위나를 향한 인정이 배어 있었다.
모든 게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앞으로 계속 이런 하루하루가 이어지기를 바랄 정도로.
그러나 한편으로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불안이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 원인에는 과할 정도로 생기가 넘치는 로위나 뿐만이 아니라 도무지 생각을 알 수 없는 공작 또한 있었다.
성에 다시 온 첫날, 모든 자초지종을 듣고 표정 변화 하나 없던 얼굴이 눈에 선연했다.
‘평소처럼 행동해요.’
‘……예?’
‘그리고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요.’
‘저하…….’
‘내 앞에서 함부로 입 놀리지 말고.’
높낮이가 없고 건조한 목소리였지만, 등줄기에서부터 오싹오싹한 오한이 들었다.
생각했던 처벌도, 추궁도 없었다. 킬리언 데본셔 공작은 그녀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당장이라도 행동을 취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지금껏 별다른 변화 또한 없었다.
“그나저나 멜리사.”
“예?”
저도 모르게 점점 어두워지던 멜리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로위나가 불쑥 물었다.
“혹시… 고민거리 있어?”
“고민이요?”
“응.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라면…….”
흔들리는 멜리사의 눈을 보니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조앤의 말이 사실이라면 킬리언에게 넌지시 말을 꺼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답을 기다리는 로위나에게 돌아온 건 부정이었다.
“아니요. 없어요.”
“……정말?”
“그럼요. 요새 그냥 잠이 잘 안 온다는 것 정도? 그것도 엊그제부터는 괜찮아졌어요.”
금세 동요를 지워 버린 멜리사가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출발할 시간인데 나가 보셔야겠어요.”
“으응.”
로위나의 팔짱을 낀 멜리사가 걸음을 재촉했다.
* * *
<외국 부호의 딸과 성혼했던 킬리언 맥시밀리언 데본셔 공작, 돌아오다.>
영향력 있는 신문의 일면에 대서특필된 소식으로 에셀우드의 수도 사교계는 간만의 스캔들로 들썩였다.
결혼과 동시에 긴 신혼을 명목으로 여태껏 해외에 머물렀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이혼 후 귀국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화젯거리인데 거기다 5년 전의 정부까지 다시 대동한다는 사실은 활활 타오르는 불에 장작을 더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가십거리가 가장 잘 불타는 곳은 단연 연회장의 귀부인용 휴게실이었다.
“로위나 필로네 있잖아요. 데본셔 영지 인근에 사는 친척에게 들었긴 하지만, 정말 놀랍네요. 그 여자 어쩜 5년 전과 똑같은 얼굴이죠?”
“그러니까요. 깜짝 놀랐다니까요? 마치 5년 전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양 싱글벙글 웃으며 연회를 다니는 게… 얼마나 놀랍고 또 소름 끼치던지.”
“소름이 끼쳐요?”
“아니. 그렇잖아요. 물론 쳐다도 못 볼 나무였긴 하지만, 그래도 3년 동안 함께 했던 남자에게 비참하게 버림받았는데 다시 손 내밀었다고 자존심도 없이 덥석 기회를 잡는 게요.”
“그건 그래요. 나라면 아무리 돈과 권력이 좋아도 절대 손잡지 않았을 텐데.”
손사래를 치던 부인들 사이로 슬쩍 은근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건 제 생각인데요…. 전 공작 부인이 불임이라던데 사생아라도 몰래 낳아 키운 거 아닐까요?”
사생아.
은밀하고도 공공연한 존재였다. 뜻밖의 단어에 무리가 술렁였다.
“사생아요?”
“세상에.”
“설마요…….”
“아니요. 일리 있다니까요?”
위험한 화제를 꺼낸 건 내내 가만히 앉아 있던 에스텔 자작 부인이었다. 평소라면 끼어드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던 자리인데, 솔깃한 이야기에 다들 귀를 기울이자 그녀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모인 관심에 고무된 자작 부인이 크게 떠들었다.
“생각해 보세요. 그런 경우가 드문 것도 아니고…… 사생아를 몰래 낳아 키웠으니 공작님이 이혼 후 버린 여자를 찾으신 거고, 여자 또한 자존심도 뭣도 없이 다시 옳다구나 정부 자리에 앉은 거죠. 그런 식으로 장래 공작의 어미로 신분 상승을 꾀한다면…….”
가능성 있는 말에 귀부인들이 서로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을 때였다.
“호호호!”
회의의 주최 측이자 무리의 중심인 레이첼 백작 부인이 부채를 펄럭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발끈한 자작 부인이 눈을 씰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