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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33화 (33/120)

33화

“그나저나 저 여자랑 많이 친해졌냐? 최근 많이 보이는 것 같던데.”

“아. 엄마가 그러는데 예전에도 옆에서 엄마를 많이 도와준 친구라고 했어요. 선생님은 왜 그렇게 멜리사를 안 좋아해요?”

“안 좋아한다기보다는…….”

뜻밖의 예리한 지적에 잠시 놀란 눈을 한 제레미가 뒷머리를 긁었다.

“촉이라는 거 아니?”

“촉…이요?”

“응. 직관적으로 오는 느낌 같은 건데…. 그게 좀 안 좋다고 하나. 뭔가 찝찝한 게…….”

“찝찝해요?”

최대한 풀어 설명하려 해도 데미안의 반응은 의아함 그 자체였다. 민망하게 웃은 제레미가 은근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어제 내가 하라는 숙제는 다 했냐?”

“아. 그게…….”

불쑥 들어온 물음에 화들짝 놀란 데미안이 눈치를 보듯 입을 오므렸다.

“안 했지?”

“아직 수업시간 아니잖아요……. 그, 그전에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말을 더듬는 게 어딘가 수상했다. 눈을 가늘게 뜬 제레미가 두 손을 뒤로 감춘 데미안의 등 뒤로 손을 뻗었다.

“어디 얼마나 했나 보자.”

“아, 안 돼요!”

* * *

“다 됐습니다. 로위나 님.”

등 뒤에서 로위나의 옷매무새를 다듬은 멜리사가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눈이 녹고 많이 따뜻해지긴 했지만, 수도에 도착하면 추운 밤일 테니 따뜻한 담비 목도리와 여우 털 코트를 위에 걸치시는 게 좋겠어요.”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고마워. 멜리사.”

전신거울 앞에 서서 목 위의 단추를 잠근 로위나가 빙긋 웃었다. 거울 너머로 시선을 마주한 멜리사 또한 마주 웃었다.

“그럼 바로 가지고 올게요.”

“다녀와.”

마찬가지로 로위나의 머리를 가다듬던 조앤이 눈으로 멜리사를 배웅했다. 목도리와 코트를 가지러 멜리사가 방을 나가자, 닫힌 문을 확인한 조앤이 은근하게 로위나에게 말을 걸었다.

“로위나 님. 요새 멜리사 조금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달라지다니?”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눈을 크게 뜬 로위나가 뒤를 돌아봤다.

“그게요.”

콘솔을 끌어와 로위나를 앉히고 자기 또한 다른 콘솔에 앉은 조앤이 재밌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어쩌면 멜리사가 연애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연애?”

“네. 상대는 다름 아닌…….”

흥미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로위나의 애를 태우듯, 잠시 뜸을 들이던 조앤이 말을 이었다.

“킬리언 님의 측근인 제녹 님이요.”

“세상에! 정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었다. 모름지기 남의 연애사가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법이었다. 잠시 뒤 데미안과 떨어져 수도로 올라가는 일로 기분이 가라앉았던 로위나가 화색을 하며 조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게 제가 멜리사 옆방을 쓰잖아요. 그래서 아는데, 요새 늦은 밤이면 멜리사가 방에 없는 거예요.”

“그냥 속이 답답해서 산책하거나 그런 건 아닐까? 물이 마시고 싶다거나.”

“에이, 그것도 하루 이틀이죠. 이틀 걸러 한 번꼴로 밤에 자리를 비우는걸요?”

“그래서?”

“어제 바로 뒤를 밟았죠. 그랬더니 세상에. 고용인용 식당에서 제녹 님이랑 단둘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게 정말이야?”

저도 모르게 소리 높인 로위나가 뒤늦게 제 입을 가렸다.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걸요.”

“만약 두 사람이 교제하는 게 사실이라면… 왜 몰래 만나는 걸까?”

“그야 여러 가지가 밟히니까요. 아무래도 제녹 님이 전하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시다 보니 멜리사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위치이고, 전하도 공작저 내에서 고용인들 간 교제를 금지하시기도 하고…….”

조앤이 차분하게 이유를 설명하는 도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멜리사인가 싶어 들어오라고 말하려는데 한발 앞서 상대가 입을 열었다.

“로위나.”

이름 석 자를 아무 경칭 없이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한 명뿐이었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팽팽히 당겨진 실처럼 긴장됐다. 벌떡 일어난 조앤이 로위나를 부축해 세운 뒤 문으로 다가갔다. 그대로 문을 열려는데 반대편에서 먼저 문을 열었다.

“대답이 없군.”

“저하.”

조앤이 뒤로 물러서자마자 들어선 킬리언이 로위나의 위아래를 훑었다. 시선뿐이었지만 마치 두툼한 공단 드레스 너머 깊은 곳까지 훑는 듯 은밀한 주시에 불에 덴 듯 로위나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가, 갑자기 무슨 일이세요?”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그에게 주춤한 로위나가 뒷걸음질 치려는데, 성큼 다가온 킬리언이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날렵하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

“왜 도망칩니까?”

“그냥 놀라서요.”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건 아니고?”

날카로운 파란색 동공이 잡아먹을 듯 파리한 얼굴을 내려다봤다. 고개가 꺾일 듯 그를 올려다보던 로위나가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가 감히 그랬을 리가요.”

“그런 것치고 오늘 아침도 걸렀는데.”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마른침을 삼킨 조앤이 말릴 새도 없이 방을 나갔다. 킬리언의 어깨 너머로 닫힌 문을 보던 로위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데미안을 놓고 가려니 마음이 좋지 않아서요.”

“…….”

“아이가 계속 생각나서 그만. 죄송해요.”

몸이 안 좋다느니 속이 별로였다느니 어설픈 거짓말을 하는 것보단 차라리 솔직하게 털어놓는 편이 나았다. 눈을 내리깐 로위나가 강렬한 시선에도 꿋꿋이 고개를 숙이자, 머리를 쓸어 올린 킬리언이 나직하게 약속을 상기시켰다.

“보름 뒤 데려오기로 했었는데.”

“그건 감사하게 생각해요.”

로위나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양보였다. 처음 재회했을 때, 데미안이 숨은 방문을 노려보던 시선을 떠올릴 때면 로위나는 아직도 등줄기가 섬찟했다.

제 관심 범위를 벗어난 대상은 사람이건 물건이건 철저하게 무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데미안은 그녀가 낳은 아들이고 그녀의 목숨줄이다 보니 완벽하게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관심을 가질 수도 없는 애매한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비록 밤에 잠깐이지만 데미안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묵인해 주는 데다 이틀 뒤지만 데미안이 수도로 따라가는 것까지 허락했으니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침의 제 행동에 언짢으셨다면 죄송해요.”

그만큼의 관용을 베풀어 주었으니 자신은 납작 엎드려 그 관대함에 감사를 표하는 게 당연했다.

로위나는 연이은 관대함에 의아해하면서도 거기서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변덕일 테니까.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한 상대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조금씩 결심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자신을 다잡았다.

“그나저나 왜 여기에…….”

“거울을 봐요.”

불편한 공기에 주먹을 쥐었다 편 로위나가 말을 돌리려는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의 말대로 옆으로 돌아 거울을 보는데 목 위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그녀의 목에 걸린 건 긴 기장으로 두 번 늘어뜨리는 식의 목걸이였다. 얇고 섬세한 금줄 사이사이로 펜던트처럼 둥글게 세공된 다이아몬드가 자리 잡았다.

“이건…….”

멍하니 제 목에 놓인 목걸이를 내려다보는 로위나의 목덜미 위로 더운 숨이 닿았다. 로위나는 등줄기를 뻣뻣하게 세웠다.

“로위나.”

고개를 숙여 드러난 목덜미에 짧게 입 맞춘 킬리언이 검지를 후크에 걸어 제 쪽으로 당겼다. 순식간에 목걸이가 목을 조이자 마치 목줄을 찬 듯한 느낌에 로위나의 낯빛에 그늘이 졌다. 그녀의 안색을 빠르게 읽어 낸 킬리언이 바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마음에 안 듭니까?”

“아니요. 정말 예뻐요. 감사해요.”

낮아진 목소리에 재빠르게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거울 너머로 마주한 얼굴에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이지?”

후크를 놓은 킬리언이 추궁하자 로위나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너무 예쁜데… 다만 제게 좀 과분해 보여서요.”

온갖 드레스며 구두, 가방과 보석류야 이미 드레스룸을 꽉 채울 만큼 선물 받았던 그녀였다. 매일 보는 사치품에 나름의 안목이 생긴 로위나가 보기에도 지금 그녀가 한 목걸이는 흔하지 않은 보물급이었다. 이 정도 퀄리티의 목걸이는 단 한 번 본 적 있었다. 정식 알현은 아니라 먼발치서 보았던 여왕이 차고 있던 목걸이.

“혹시… 이거 왕성 것은 아니지요?”

문득 든 가정에 얼굴이 파랗게 질린 로위나가 대뜸 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초조해졌다.

“만약 그런 거라면 저는 제 주제를 넘는 건 필요 없으니까…….”

“저번에도 왕성 보물을 한 적이 있었는데, 왜 이제 와서?”

애가 닳은 로위나와 달리 차분한 얼굴의 킬리언이 반문했다. 그의 대답에 주먹을 말아 쥔 로위나가 시선을 피했다.

“그땐 그때였으니까요.”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했었던 시절이었다. 자신에게 허락된 것과 이 남자가 허용하는 선을 몰랐던 시절. 그래서 그저 킬리언이 주는 대로 입고 주는 대로 먹었다. 제아무리 위세가 등등한 공작가라 한들, 그래 봤자 정부라는 위치에 있는 여자는 떳떳할 수가 없었는데. ‘신 앞에 나란히 설 수 없는 여자’가 이 나라에서 가장 신성하고 고결한 사람의 것을 걸치는 게 뒤에서 손가락질받는 행위임을 몰랐다.

거울 속 흐려진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킬리언이 그녀의 목을 감싸듯 한 손으로 휘감았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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