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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32화 (32/120)

32화

로위나.

당연하게도 이름을 부르는 말에 로위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이 공작 성에서 그녀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눈앞의 남자가 유일하기도 하고, 그 남자에게서조차 다른 호칭이 더 익숙했다.

미스 필로네.

공식적인 자리에선 물론이고 단둘이 있을 때도 깍듯이 성씨를 부르던 목소리.

그러나 입 속의 혀처럼, 온순하게 굴겠다던 결심 이후 킬리언은 그녀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한때 그토록 불리길 원했던 이름이었다.

“그리고…….”

넓은 어깨를 두 손으로 밀어내며 로위나가 머뭇머뭇 말을 이어 나갔다.

“화병이 놓일 위치라거나… 웨이터들의 동선을 짜는 일 등이요.”

전야제의 연회는 실로 완벽했다. 능숙한 집사조차 감탄하며 했던 말을 킬리언은 기억했다.

―에식스 대부인과 거의 필적하거나 그 이상이십니다. 전야제의 테마를 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초대장 목록 작성, 테이블 위치, 요리사와 악단 섭외, 생화를 장식하는 요령까지. 오 년 전에 젊은 여자라고 무시하지 말고 믿고 맡겼더라면. 그랬다면 이런 능력이 있으신 줄 알았을 텐데…….

말끝을 흐린 집사가 아쉽다는 듯 입매를 다셨다. 보잘것없던 돌멩이가 알고 보니 원석이었음을 깨달은 눈빛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로위나는 성내 관리에서 날개 돋친 듯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고용인들에게 그저 예쁘고 잘 웃는 인형에 불과했던 여자에서 이젠 안살림을 책임지는 안주인으로 발돋움했다.

기특하고 어여뻤다.

“원한다면.”

흐트러진 금발을 귀 뒤로 쓸어 넘긴 킬리언이 엄지로 아랫입술을 쓸었다. 찌릿한 감각에 로위나는 말없이 그의 어깨를 밀었다.

한 발자국도 밀려나지 않은 남자가 조용히 권유했다.

“집사에게서 지하 와인 저장고 열쇠를 넘겨받아도 됩니다.”

“…….”

더워진 공기도 잠시, 생각지도 못한 말에 로위나가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올렸다. 와인 저장고의 열쇠를 넘겨받는다는 건 완전히 성의 살림을 책임지는 관리자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건…….”

말끝이 떨렸다. 오 년 전엔 그저 꿈만 꿨던 일이 조금씩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 현실이라는 게 꿈보다도 못한 모조품인 걸 알아 버린 뒤에야.

“아직… 아직은 좀 무리일 거 같아요.”

“…왜.”

“배워야 할 게 많아서요. 좀… 무섭기도 하고요.”

허탈했다. 모든 게. 전부.

예상치 못한 거절에 킬리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동시에 로위나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을 끌어안고 까치발을 들었다.

먼저 다가온 입술을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빈틈없이 혀가 얽혔다. 로위나는 부서뜨릴 듯 허리를 끌어안는 손에 몸을 맡겼다. 혀가 입천장을 건드리고 치열과 연약한 부분까지 모두 훑었다. 익숙한 키스에 습관처럼 배 안쪽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숨이 넘어가기 직전, 입술이 떨어졌다.

“계속 그렇게만 해요. 로위나.”

낮은 목소리에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비죽 웃은 킬리언이 속삭였다.

“머릿속으로는 뭘 생각하건 상관없어. 날 증오하건 죽이고 싶다고 생각하건.”

그는 알고 있었다. 쉽게 용서받기에 자신은 이 가녀린 여자에게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여자를 찍어 내리누르듯 가졌다. 금세 익숙한 쾌락에 잠겨 미미해지는 저항을 조롱하듯.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처절했던 고백의 대답을 돌려주며 돈을 던졌다.

불필요하게 잔인한 마지막이었음을 오 년이 지난 후에야 그는 스스로 인정했다.

이제 와 후회해 봤자 무의미했다.

전부 무너졌다면, 이제부터 견고하게 쌓아 올리면 될 일이었다.

“…그럴 리가요.”

침묵이 흐르고 가까스로 입매를 끌어 올린 로위나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서로가 연극인 걸 알고 있는 가면극이었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든 무너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모래성 위였다. 깊은 심해나 마찬가지였다. 부력을 헤치고 바다 위로 오른다 해도 구원은 없었다.

그래. 연극.

필요한 배역은 모두 무대 위로 올랐다.

완전히 막이 내리고 각광이 꺼지기 전까지, 로위나는 이 우스꽝스러운 연극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킬리언.”

재회하고 처음 부른 이름.

울고 부르짖어도 동요 없던 벽안이 못 박힌 듯 여자의 입술을 더듬었다.

“사실, 소원이 있어요.”

“…무슨.”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처럼 로위나는 그의 날렵한 턱선 아래, 쭉 뻗은 목에 뺨을 비볐다.

“눈이 녹으면 한 번 더 그 섬에 가고 싶어요.”

당신이 날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했던 그 섬.

악몽 위에 다시 악몽을 덧씌워 줄 섬.

대답 대신 허리를 끌어안는 손에 로위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르듯 어깨를 끌어안은 손이 슈미즈 위로 걸친 얇은 로브를 끌어 내렸다.

“그 전에.”

“…….”

“먼저 수도에 가죠. 4월은 사교 시즌이니. 원하는 만큼 연회를 개최하고, 원하는 만큼 극을 보는 겁니다.”

사교계를 좋아하지 않는 남자였다. 까칠하고 과묵할뿐더러, 남의 비위나 심사를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위치였으니까.

그런데 왜일까.

아니. 이젠 궁금하지 않아. 아무것도.

중요한 건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는 방식이지 이 남자의 머릿속이 아니었다.

의문을 넘긴 로위나가 대답 대신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잘 들어라. 육 개월이다. 로위나. 그 시간만 버텨.

―삼촌…….

―육 개월 뒤, 그 섬으로 가자고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너와 데미안을 도망치게 해 주마. 그러니 힘들겠지만, 지금처럼 굴며 공작의 경계를 흐트러뜨려.

그녀의 외삼촌, 제레미 디쉬는 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건 지키는 사람이었다.

외삼촌의 말을 곱씹으며 로위나는 앞으로 반년 후면 영영 맡을 수 없어질 소슬한 체취를 깊게 들이마셨다.

* * *

영문도 모른 채 거대한 성으로 끌려온 지 어느덧 4개월이 지났다. 처음엔 답답한 상황에 떼를 쓰고 성질을 부리던 데미안은 천천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 성의 주인인 엄마의 친구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이 성에 머물러야 한다.

정확히 어떤 사정인지는 몰랐지만, 은근히 캐물을 때마다 엄마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캄캄한 생활 속에서 데미안을 지탱한 건, 그것도 이제 반년 남짓만 참으면 끝이 나리라는 희망이었다.

“도련님.”

“응?”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있던 데미안이 고개를 들었다. 다가온 얼굴에 의아한 것도 잠시, 상대가 누군지 기억한 데미안이 빙긋 웃었다. 엄마가 소개해 줬던 하녀였다. 엄마의 시중을 든다고 했었는데.

“멜리사?”

“뭐 하고 계셨어요?”

“책을 읽고 있었어.”

“그러시군요. 뭘 읽고 계셨는지 봐도 될까요?”

“응. 제레미 선생님 원고래.”

기꺼이 읽고 있던 책을 넘겨준 데미안이 눈을 반짝였다.

“아직 출간은 안 했고 곧 할 생각이래. 주인공 이름이 나랑 똑같다?”

“정말요?”

뜻밖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멜리사가 데미안이 들고 있던 책을 힐끔 봤다.

“정말이네요. 이런 동화책도 쓰실 줄 몰랐는데.”

“제일 재밌는 게 바로 결말 부분인데 나쁜 마왕한테 잡힌 데미안을…….”

흥분한 데미안이 설명을 이어 나가는데, 누군가 끼어들었다.

“이런. 그거 미공개 원고라 아무한테나 안 보여 주는 건데.”

“꺅! 제, 제레미 씨?”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남자에 화들짝 놀란 멜리사가 엉거주춤 일어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 데미안이 제레미에게 폭 안겼다.

“선생님!”

“잘 잤니. 요 말썽꾸러기야.”

서슴없이 제자의 머리를 헝클어트린 제레미가 슬쩍 멜리사가 든 책을 가져갔다.

“근데 멜리사. 왜 온 거야?”

“아. 그냥 도련님이 보고 싶어서요.”

어색하게 웃은 멜리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가 방을 나가자마자 데미안이 호칭을 정정했다.

“할아버지. 엄마는요?”

“그냥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했잖냐.”

“그래도 엄마가 똑바로 불러야 한다고…….”

“둘이 있을 땐 그냥 제레미라 부르거나 선생님이라 불러.”

“그럼… 선생님이라 부를게요.”

“이런 면에서는 지 엄마를 꼭 빼닮았네.”

인성이 개판인 아비를 닮는 것보다 조금 숫기 없지만 예의 바른 엄마를 닮은 편이 훨씬 나았다. 피식 웃은 제레미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로위나는 오늘 수도로 갈 거야. 너는 이틀 뒤에 따라가는 거로 되어 있단다.”

안 그래도 밤에만 잠깐 보는 모자간이었다. 더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말에 데미안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속으로 혀를 찬 제레미가 조카 손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 말 기억하지?”

“…이곳에서 나가고 싶으면 여기서 본 것도 안 본 거고 들은 것도 안 들은 거라고.”

눈을 내리깐 데미안이 대답했다. 엄마와 자신을 도와준다던 외삼촌, 제레미를 처음 보자마자 그가 한 말이었다.

시무룩한 데미안의 모습에 제레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어른들의 사정이 꽤 복잡해. 너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알아요.”

“…….”

자세한 사정은 몰랐지만, 데미안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딸린 유모나 하녀들은 친절했지만 다들 어딘가 거리가 있었다. 이곳 사람 중 그나마 가까이 지내는 건 바로 엄마의 외삼촌이자 가정교사인 제레미였고, 그녀의 시녀인 멜리사뿐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제레미는 멜리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방금도 그의 원고를 손에 들고 있는 것도 싫어한 걸 보니 확실했다. 문득 든 생각에 의아해하는데 생각이라도 읽었는지 제레미가 불쑥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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