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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31화 (31/120)

31화

다시 동침한 날부터 로위나의 잠자리는 언제나 공작의 침실이었다. 그러나 종종 오늘처럼 그가 일로 자리를 비울 때에는 자신의 방에서 잠을 청했다.

넓은 침대에 허전할 만도 하지만 로위나는 오히려 해방감을 느꼈다. 다시 재회한 뒤 시작된 킬리언의 잠버릇 때문이었다.

정사를 치르건 안 치르건 같은 침대에서 잠들 때면 그는 언제나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리까지 옭아매 벗어날 수 없게 꽁꽁 안고 잠들었다. 그럴 때면 로위나는 마치 똬리를 튼 독사에게 붙잡힌 느낌이었다.

정수리 위로 느껴지는 고른 숨소리와 힘줄이 불거진 커다란 손, 그리고 둔부에서 그녀를 괴롭히는 묵직한 존재를 느낄 때면 도무지 편하게 잠이 들 수 없었다.

답답함에 벗어나려 하면 허리를 감싸 안은 힘이 더 강해졌다. 더 최악은 그가 일어나는 경우였다.

―잠이 안 와?

―아…….

―더 울어야 할까?

막 잠에서 깨어 쉰 목소리. 조곤조곤한 어조였지만 의미는 그렇지 않았다.

―로위나.

―아, 아니에요. 잘게요.

이 이상 한다면 내일은 아예 일어나지도 못 할지도 모른다. 소름이 쭈뼛 선 로위나는 눈을 꼭 감았다. 그렇게 겨우겨우 잠드는 게 다반사였다.

오랜만에 주어진 평화에 그와 함께 동침할 때면 뻣뻣하게 긴장했던 근육들이 자연스레 이완됐다. 로위나는 만족스럽게 폭신한 베개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조용히 다가온 발걸음이 깊은 잠에 빠진 로위나의 침대 앞에서 멈췄다. 어깨를 흔들어 깨우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킬리언은 대신 허리까지 내려온 이불을 어깨 위로 끌어올렸다. 그때 새근새근 잠자던 로위나가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으응…….”

“…….”

잠에서 깬 건 아니었다. 잠시 긴장했던 숨이 부드럽게 이어졌다.

외투도 벗지 않은 킬리언이 그대로 침대 머리맡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천천히 장갑을 벗은 그가 오른손을 뻗어 실타래 같은 금발을 매만졌다. 손가락에 달라붙듯 감긴 머리카락의 감촉이 공단처럼 부드러웠다.

그는 천천히 등을 숙였다.

인형처럼 자고 있는 제 여자의 이마에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모로 누웠던 로위나가 다시 몸을 뒤척여 반듯하게 누웠다.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고 스친 이마가 천장을 향했다. 소리 없이 입매를 끌어 올린 킬리언이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치웠다.

그대로 뒤돌아 옆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데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고리를 돌리던 손을 멈춘 킬리언이 고개를 돌렸다. 뭉개지듯 흐릿했던 목소리가 이번엔 더 또렷이 들렸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어머니… 아버지…, 제발…….”

우뚝 선 킬리언이 뒤를 돌았다. 매트리스가 잠시 기울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열띤 눈매에 손을 얹었다. 서늘한 감촉에 잠결에 손을 올린 로위나가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붙잡았다.

마치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붙잡듯 필사적인 얼굴로 손톱을 세워 손등 위를 긁었다.

“아버지… 어머니…….”

물에 빠져 구원의 손길을 잡은 사람처럼 로위나가 손끝에 힘을 줬다. 따끔한 통증에 킬리언이 엷게 미간을 좁혔다. 손등 위에 새겨진 손톱자국이 깊게 파이다 못해 피가 났다.

헐떡이던 신음이 고른 숨소리로 변할 때까지, 서늘한 손이 뜨거워진 눈 위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 * *

“이랴.”

농부가 고삐를 뒤로 끌어당기며 짐마차를 멈춰 세웠다. 동시에 느긋하게 짚더미에 누워 있던 남자가 눈을 떴다.

“나리. 정말 여기가 맞습니까?”

“예. 맞네요.”

산뜻하게 짐마차에서 뛰어내린 남자가 외투에 묻은 짚을 털었다.

길게 기지개를 뻗은 그가 눈앞에 떡하니 자리한 성을 바라봤다.

번화한 마을을 앞으로, 드넓은 호수를 뒤로한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외성 벽은 요새처럼 성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었고, 그 위로 네 개의 첨탑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솟아 있었다.

“여기까지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뭘요. 그럼.”

꾸벅 묵례한 마부가 말머리를 틀었다. 남겨진 남자는 깊게 파인 해자 위의 다리를 지나 도개교 앞에 섰다.

망루에서 밖을 살피던 하인 하나가 문지기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육중한 도개교가 천천히 내려왔다. 아찔한 높이의 강물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로위나 필로네. 그의 하나뿐인 조카가 있는 곳이었다. 웬 개자식이 가둬 놓은.

마중을 나온 사람은 탁한 금발을 가진 훤칠한 인상의 남자였다.

“로드릭 디폰즈 씨?”

“네. 맞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제녹이라고 합니다. 공작 저하의 수행비서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옅게 웃은 제레미가 상대의 악수를 받아들였다. 손을 맞잡으며 제녹은 실례되지 않게 상대를 훑었다. 나이대는 삼십 대 후반쯤 보이는 남자였다.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에 후줄근한 정장 차림.

“마차를 보내드렸는데.”

“아. 불편해서요. 그냥 지나가던 짐마차를 불러 세웠습니다.”

“짐은 들고 계신 게 전부입니까?”

“아, 네.”

제레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든 건 가볍다 못해 날아갈 것 같은 부피의 가방이었다.

어차피 오래 머무르지도 않을 거니 바리바리 챙겨 올 필요도 없지 않나.

“이곳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미스 필로네와 상의하시면 되고, 계약 기간은 일단 반년으로 잡았습니다.”

제녹은 하인을 시키지 않고 바로 제레미를 방으로 안내했다. 제레미가 넓고 쾌적한 방에 감탄하는 사이, 제녹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하와는 마주치실 일이 없으실 겁니다. 수업 시간 외 자유 시간에는 무엇을 하시건 마음대로지만, 절대로 이곳에서 보고 들은 건 그 무엇이건 입 밖에 내서는 안 됩니다. 그로 인한 공증 각서를 쓸 거고요.”

“아.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도 목숨이 하나인데 설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묘하게 가시가 박힌 대꾸였다.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금세 착각일 거라 판단한 제녹이 빙긋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다행입니다. 저명한 작가이시기에 어떻게 모셔야 하나 걱정이었는데, 그래도 이리 와 주셔서 안심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안 그래도 현재는 집필을 쉬고 있던 데다 돈이 궁해서요.”

높고 푹신한 침대 위에 풀썩 앉은 제레미가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노골적으로 금전을 의미하는 손짓에 제녹이 눈을 의심했다.

씩 웃은 제레미가 불쑥 물었다.

“그건 그렇고, 저도 공작 저하의 비서가 젊어서 놀랐습니다. 꽤 수완이 좋으신가 보군요.”

“예?”

“스물아홉 같은데. 맞죠?”

“…예. 맞습니다.”

깜짝 놀란 제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보다 노숙해 보인다는 평을 많이 듣는 그였다.

“제 나이는 어떻게 맞추신 거죠?”

“그야, 감입니다.”

어깨를 으쓱한 제레미가 길게 하품했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데, 씻고 한숨 자도 괜찮을까요?”

* * *

“조금 괴짜라던데.”

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로위나에게 건넨 킬리언이 말문을 열었다. 외투에 이어 타이를 받아든 로위나가 빙긋 웃었다.

“특이한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우수한 선생님이세요. 데미안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고요.”

데미안의 ‘데’자만 나와도 독니를 드러내던 남자였지만, 지금은 많이 온화해져 이름을 입에 담는 것 정도는 허락됐다.

“이곳에 오신 지 이제 일주일 정도 되셨는데 저는 마음에 들어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무심하게 대답한 킬리언이 넌지시 물었다.

“오늘은 뭘 했습니까?”

“셀린느 백작 부인과 살롱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연말에 자선연회를 하신다고 하셔서요. 손을 보태 달라기에 초대해 조금 도와드렸어요.”

정부였던 시절 로위나의 역할은 사람들을 몰고 오는 거였다. 주최하는 연회가 화제가 되기를 원하거나, 공작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해 귀족들은 그녀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손님’으로서였지, 자선연회 같은 중요한 모임에 도움을 청해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이유야 명백했다. 공식적으로 부인을 두지 않은 고위 귀족이 정부에게 안살림을 맡기고 그에 따른 권한을 주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사교계에서 로위나의 위치가 질리면 버려질 공작의 여자에서 공작 부인에 필적하는 여자로 상승했다는 증거였다. 좋아할 만도 한데 로위나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로위나가 킬리언의 소맷자락의 커프스 단추를 풀었다.

“전야제 밤 연회가 굉장히 인상 깊게 남으셨다고 하셔서요. 아마 그 일 때문에 한동안 바빠질 것 같아요. 초대장 작성도 물론이고, 악단도 섭외해야 하고, 요리사와 또…….”

물 흐르듯 이어지던 목소리가 가까워진 얼굴에 끊겼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킬리언이 숨이 맞닿는 거리에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매끄러운 코가 맞닿고 긴 속눈썹이 한 올 한 올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다.

로위나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왼 이마를 타고 내려온 칠흑 같은 흑발, 반듯하고 단정한 이마, 끝이 위로 올라간 길고 섬세한 눈썹. 빙하처럼 차갑고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 오만하게 높은 콧날과 그녀보다도 색소가 붉은 입술.

“또?”

감상하듯 그의 얼굴을 보는 시선에 입매를 끌어 올린 킬리언이 짓궂게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동시에 들고 있던 외투와 타이가 떨어졌다.

“고, 공작님…….”

“내가 묻잖아요. 로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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