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하하…….”
마른기침을 토해 낸 로위나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좀 전에는 몰랐는데 가만히 앉아 있으니 어질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머리를 식히기 위해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때 소리 없이 다가온 인영이 정교하게 땋아 올린 금발 머리를 풀어 내리며 드러난 목덜미에 입 맞췄다.
“아.”
더운 숨을 내뱉으며 로위나가 허리를 뒤틀었다. 목덜미에 입 맞춘 남자가 이어 귀 뒤 맥이 뛰는 곳에 깊게 키스했다.
“저하.”
입꼬리를 끌어 올린 로위나가 아예 몸을 돌려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팔이 이끄는 대로 몸을 숙인 킬리언이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에 미끄러지듯 입술을 내리눌렀다. 뭉클한 감촉에 눈을 감은 로위나가 흡혈귀처럼 제 목을 지분거리는 그의 새카만 머리칼 사이로 손을 넣었다. 손가락에 감기는 느낌이 부드럽고, 간질간질했다.
“음.”
취기 석인 흥분이 올라왔다. 달뜬 신음을 내뱉으며 로위나가 입을 열었다.
“그 분장이 뱀파이어였나요?”
“글쎄.”
피식 웃은 킬리언이 냄새를 맡듯 그녀의 쇄골 위로 얼굴을 묻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린 로위나가 그의 턱을 잡고 자신을 보게 했다.
“말해 봐요. 공작님. 내 피를 모조리 마신 다음은 날 놔줄 건가요?”
“아니.”
망설임 없이 대답한 킬리언이 그녀의 무릎 뒤와 어깨 뒤로 손을 넣었다. 저항 없이 안긴 로위나가 그의 목에 손을 둘렀다. 조심스레 로위나를 안은 킬리언이 긴 다리를 뻗어 유리문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어요.”
대답 대신 차분한 시선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데미안의 가정교사를 구하고 싶어요. 저는… 아시다시피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요.”
“알아보죠.”
사납게 굴지도 모른다는 예상과 달리 대답은 순순히 돌아왔다.
더 용기를 낸 로위나가 그의 뺨에 입 맞췄다. 처음으로 놀란 벽안을 감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덧붙였다.
“사실, 건너건너 아는 분이 한 명 있어요.”
“…아는 사람?”
엷게 미간을 찌푸린 킬리언이 침실 문을 열었다.
그녀의 방보다도 두 배는 더 큰 그의 침실이었다. 장미목 가구와 대리석 조각이 새겨진 벽난로, 화사한 쉬폰 커튼과 생화로 장식된 옆방과 정반대로, 딱 필요한 가구들만 놓인 둔중하고 무게감 있는 방.
감람색 휘장을 걷은 킬리언이 그대로 넓은 침대 위로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놨다.
“오늘은 취해서 싫어요.”
로위나가 앙탈 부리듯 몸을 돌리자 그대로 위로 올라탄 그가 숄을 벗겨 내고 어깨를 물었다.
“아! 아파요.”
“누구지? 남자인가?”
“그렇긴 한데… 아!”
차가운 공기가 살갗에 닿더니 드레스가 허리까지 내려갔다. 척추를 따라 긴 검지를 늘어뜨린 킬리언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제,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이에요. 나이가 많으시다 들었어요. 문학 교사로 적임일 거 같아서…….”
미끄러지듯 내려가던 손길이 골반에 닿았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금발을 부드럽게 그러쥔 그가 재촉했다.
“이름.”
아까보단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감았던 눈을 뜨며 로위나가 대답했다.
“로드릭… 로드릭 디폰즈요.”
조카인 그녀만 아는, 제레미 디쉬의 또 다른 필명이었다. 그녀를 이 요새 같은 성에서 도망치게 해 줄.
* * *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시!”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외친 펠릭스가 판 위의 수표를 쓸어 갔다.
게임이 끝나고 같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탄식과 함께 머리를 쥐어 싸매거나, 깊은 한숨과 함께 팔짱을 끼거나, 그도 아니면 황급히 남은 돈을 세어 보거나.
오직 한 명만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어때. 오늘 마침 주말이기도 하고.”
분주히 돌아다니는 웨이터의 은쟁반 위에서 와인 잔을 들어 올린 펠릭스가 빙긋 웃으며 합석한 친구들을 둘러봤다.
“한 판 더하겠어?”
“난 됐어. 누굴 알거지로 만들려고.”
한 시간 만에 마차 하나 값을 날린 동기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깨를 으쓱한 펠릭스가 넌지시 제안했다.
“어음으로 줘도 되는데?”
“그러다 다음엔 저택을 날리겠지.”
“나도… 그만하겠어.”
“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친구 한 명이 앞장서 자리를 뜨자 마찬가지로 현란한 손놀림에 빈털터리가 된 다른 사람들 또한 하나둘 일어섰다.
열을 올리던 포커 게임이 파하고 나자 넓은 회원제 클럽룸은 한적해졌다. 물소 가죽 카우치나 공단 의자에 널찍하게 흩어져 앉아 신문을 보거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신사들뿐이었다.
길게 기지개를 켜며 하품한 펠릭스가 마주 앉아 궐련을 피우는 킬리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나저나 저하가 웬일이야? 여길 진득하게 앉아 있고.”
“그냥.”
건조하게 대꾸한 킬리언이 왼손을 까닥하자 웨이터가 다가왔다.
“신문. 그리고 재떨이.”
“예.”
고개를 숙인 웨이터가 크리스털 재떨이와 함께 오늘 아침 신문을 가져왔다.
몇 모금 피우지도 않은 궐련을 재떨이에 짓뭉개 끈 킬리언이 편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신문을 펼쳐 들었다. 일면에 실린 커다란 제목이 눈에 바로 들어왔다.
길리터스 무역회사. 올해 놀라운 성장세를 이루다.
흘깃 기사를 훔쳐본 펠릭스가 목소리 죽여 이죽댔다.
“가진 놈이 더하다고. 정말 좋겠어. 아주 돈방석에 앉아 계시고.”
돈을 좀 만진다는 사람들이면 모두 주식을 사려 벼를 만큼, 길리터스 사(社)의 성장률은 감탄할 만한 수준이었다.
처음 이름도 없는 회사가 자리 잡은 곳은 남부의 초라한 항구였다. 바닷길도 험할뿐더러, 양식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기에 서부에 비하면 작고 외지고 가능성 없다고 일컬어지던.
그러나 몇 년 사이 판도가 바뀌었다. 외국과 남부를 통한 지름길이 밝혀진 이후부터였다.
아차 한 무역회사들이 하나둘 남부로 뛰어들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거대한 자금력과 무력을 바탕으로 어느 회사보다 일찍 남부에서 세력을 확장한 길리터스 사는 이제 에셀우드 전역의 바닷길을 주름잡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뒷세계에까지 손을 뻗은 의미심장한 회사. 세간이 알고 있는 모습은 딱 여기까지였다.
남부에 어중이떠중이처럼 붙어 있던 조직을 포섭하고 밑으로 편입시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봤는지 펠릭스는 두 눈 똑똑히 기억했다.
전쟁이었다. 표면상 아내의 나라에 머무는 동안, 킬리언 데본셔는 몇 번이고 밀항해 그 전쟁의 서두에서 진두지휘했다. 에버딘 은행가의 신뢰도를 이용해 기존 남부 조직과 결탁한 외국 세력의 협력을 얻어 냈으며, 전쟁의 막바지까지 승기를 몰아 나갔다.
클라이맥스는 단연, 끝끝내 저항하며 불복했던 조직을 소탕할 때였다.
―네놈 어미가 사실 아무 남자나 받아주던 배우라지? 공작 부인이 불임이라 대신 낳았다던데, 사실인가?
마지막 발악을 하던 조직의 보스가 불문율이나 다름없는 소문을 입에 담았다. 공작의 오랜 연인이던 여배우가 불임이던 공작 부인 대신 공작의 아이를 낳았고, 그 후계자가 공작이라는 이야기.
이미 어처구니없는 헛소문이라 밝혀진 지 오래인 말이었으나 한동안 떠들썩하게 나라를 메웠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주변인들이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가운데, 단막극을 감상하는 관객처럼 조용히 남자를 바라보던 킬리언이 대뜸 웃었다.
―재밌네.
―뭐?
뜻밖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남자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총집에서 총을 꺼내 드는 모습도 없이 탕, 하는 굉음과 함께 날아든 탄환이 남자의 얼굴을 관통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공기가 살얼음처럼 얼어붙은 가운데, 유유히 일어선 킬리언이 죽은 남자에게 충고했다.
―그런데 좀 지루하군. 다음엔 더 새로운 욕을 기대하지.
기가 질릴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웬만큼 살인을 해 본 이들도 혀를 내둘렀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이제는 매우 번듯하고 흠잡을 데 없는 신사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펠릭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눈앞의 남자를 관찰했다. 원래도 저렇게 재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지만, 요새는 어째서인지 좀 더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최근 오 년간에는 늘 날이 서 있고 어딘가 아슬아슬해 보였다면 근래에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원래의 킬리언 데본셔랄까.
전쟁이 끝난 여파일지도 모르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멋쩍게 눈썹을 긁은 펠릭스가 넌지시 제안했다.
“카드게임이나 한 판 더할래?”
작게 코웃음 친 킬리언이 테이블을 눈짓했다.
“네 쪽 테이블 밑에 붙여 둔 카드나 치우고 말해.”
“…어떻게 알았어?”
화들짝 놀란 펠릭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항복한다는 제스처였다.
“좋아. 네 돈은 돌려줄게.”
“그깟 푼돈 얼마든 가져.”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가 났다. 느릿하게 일어난 킬리언이 눈치 빠른 하인이 가져온 외투에 팔을 꿰었다.
“역시. 저하라니까.”
“로위나 필로네.”
“뭐?”
뜬금없는 이름에 신나게 딴 판돈을 세고 있던 펠릭스가 고개를 쳐들었다. 갑자기 제 정부의 이름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오 년 전, 외국 부호의 딸과 결혼 직전 소리 소문 없이 버렸다던 여자. 이혼하자마자 다시 찾아와 기어코 제 옆에 다시 앉혔다던 여자.
“그 이름을 쓰는 코르티잔이 있나 알아봐. 팔 년 전에 잠깐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도 영업할 수도 있지.”
쏟아지는 요구에 펠릭스가 벙찐 얼굴을 했다.
“로위나 필로네 라는 이름을 쓴?”
“인맥은 네가 최고잖아. 사소한 것도 간과하지 말고 다 알아봐. 하나도 빠짐없이.”
마지막으로 벗어 두었던 검은 가죽 장갑을 끼며 킬리언이 덧붙였다.
“그럼 지금 네가 쥐고 있는 돈의 세 배를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