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챙그랑.
유리잔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아가씨?”
방으로 돌아가던 중 굉음에 달려온 멜리사가 놀란 눈을 했다.
“세상에!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시고요?”
“아, 괜찮아.”
조금 넋이 나간 얼굴로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을 가져오는 사이에… 이런…….”
“미안해. 내가 치울게.”
“아니에요. 제 일인 걸요. 잠깐 기다리세요. 조앤을 부를게요. 이건 약이에요.”
“…고마워요.”
멜리사가 건넨 건 진정제와 수면제였다.
그녀가 킬리언과 함께 뱃놀이를 다녀온 날 이후, 닷새나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매일 이어진 일상이었다. 오른손을 내밀려는데 검지 끝이 따끔했다. 파편이 튀었는지 베인 부분에 피가 보였다. 보이지 않게 주먹을 쥔 로위나가 약을 왼손으로 받았다.
약을 먹고 깊은 잠에서 깬 건 한밤중이었다. 로위나는 제 손을 잡은 손에 번쩍 눈을 떴다. 동시에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얼음 색 동공과 마주쳤다.
“…깼습니까.”
“공작님.”
“손을 다쳤더군요. 임시로 약을 발랐습니다. 혹시 모르니 주치의에게 보이도록 해요.”
급한 일로 인해 수도에 다녀왔기에 닷새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로위나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봤다.
―저는 진심으로 저하와 미스 필로네가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관계든 기만 위에서는 쌓일 수 없죠.
―그럼 제게 이 초상화를 보여 주신 건…….
―조금이라도 진실에 가까워져서 진정한 관계를 쌓아가셨으면 하는 바람이었습니다.
베네딕트의 말에 모든 게 선명해졌다. 동시에 모든 의문도.
이 다정함은 애초에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왜 이리 다정하냐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을 기억했다.
당신이 필요해서.
그가 원하는 건 자신이 사랑한 소녀의 껍데기였다.
오 년 전, 공작의 태중 약혼녀에 대해 이야기하던 하녀들의 말이 사실이었다. 전 부인을 질투할 이유도 없었다. 그녀나 자신이나 마찬가지로 대용품이었을 테니까.
“킬리언.”
그가 없는 닷새 동안 한참 이불 속에서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이미 오 년 전 난도질당한 심장이었다. 그러나 아직 조각조각 남아 있었다는 걸 닷새 동안 깨달았다.
겨우 그러모아 형태를 갖춘 심장은 이제 타올라 재도 남지 않았다.
보여 줄 수만 있다면 가슴을 갈라서 그 잿더미가 된 심장을 이 잔인한 남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그땐 어떤 얼굴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 이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정부. 장난감. 대용품.
뭐라 부르건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이 껍질을 이용해서 아양을 떨고 경계를 늦춘 뒤, 도망치면 된다.
“안 계실 동안 곰곰이 생각했어요. 제 마음을…….”
손을 뻗어 힘줄이 도드라진 남자의 손등을 제게로 잡아끌었다. 뱀의 비늘처럼 차갑고 매끈한 손바닥을 제 뺨에 얹었다.
“지난 오 년 동안…….”
“…….”
“내 마음이… 당신을 무척 그리워했다는 걸.”
눈물이 눈꼬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긴장된 숨소리가 누구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너무나.”
그가 고개를 숙였다. 로위나는 기꺼이 입술을 벌려 그를 맞았다.
이제 독 사과를 깨무는 건 이 남자 차례였다.
팔 년 전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그 밤 이후부터였다.
위태로운 외줄 위를 걷는 듯하던 킬리언과 로위나의 사이는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완벽한 패배를 선언한 로위나에게 킬리언은 그 어느 때보다 관대하고 다정해졌다.
매일 함께 잠들었고, 다음 날 눈을 뜨면 빈자리에 그날 갓 딴 꽃들이 공단 리본을 매단 채 선물처럼 놓여 있었다.
밤낮으로 유명 의상실 주인이 드나들었고 소문이 자자한 보석상 또한 발길이 닳도록 도개교를 들락거렸다.
본격적으로 잘 먹고 잘 자기 시작하자 퇴색됐던 로위나의 미모는 다시 만개한 꽃처럼 피어올랐다. 푹 꺼졌던 뺨에도 살이 오르고 퀭했던 눈매도 활력을 되찾았다.
노파처럼 작고 힘없는 목소리도 점점 한 봄의 꾀꼬리처럼 변해 갔으며 간신히 해골만 면했던 몸도 일전의 맵시 있고 우아한 굴곡을 되찾아 갔다.
이미 그 모습이 익숙한 멜리사와 달리, 함께 로위나의 시중을 드는 조앤은 그녀가 처음 봤던 그 여자인지 아닌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그러나 눈을 아무리 비벼도 마르고 퀭한 눈에 수척했던 여자는 초승달처럼 사라지고 생기 넘치고 다정하며 매력 넘치는 여자뿐이었다.
그 미모가 절정에 달한 건 전야제 가면무도회 밤이었다.
수려한 음률이 넓은 연회 홀을 휘감는 가운데 초대받은 귀족들이 행복하고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전야제 연회의 주축은 단연 젊은 남녀였다. 한겨울의 생화로 머리를 장식하고 요정 혹은 비극적인 역사 속 여인으로 변장한 숙녀들. 그리고 잔머리 하나 없이 머리를 쓸어 올리고 각자의 테마에 맞춰 새카만 연미복을 차려입은 신사들.
그들이 음률에 맞춰 춤을 추고 무언의 은밀한 신호를 주고받는 걸 조앤은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공작새같이 화려한 사람 중 가장 돋보이는 건 연회의 주인이자 개최자인 데본셔 공작과 그의 정부였다.
아름답게 꾸민 여자들 사이에서 미스 필로네는 단연 시선을 잡아끄는 존재였다.
한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가 메인 홀로 공작을 이끌었다. 한 겹의 새하얀 드레스에 붉은 루비가 나비처럼 조각된 티아라를 쓴 로위나는 명화 속의 여신 그 자체였다.
발코니에 있던 악단이 천천히 연주를 시작했다. 우아하면서도 관능적인 곡이었다.
리드에 맞춰 발을 옮긴 로위나가 유연한 나뭇가지처럼 허리를 뒤로 젖히고는 다시 품에 폭 안기듯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감탄, 부러움, 질투, 선망. 많은 감정이 담긴 좌중의 시선이 그들에게 박제됐다. 춤이 끝남과 동시에 몇 초의 정적이 흘렀다.
넋이 나갔던 사람들이 잠시 뒤 열정적인 박수를 보냈다. 쏟아지는 갈채 속에서 화사하게 웃은 로위나가 벽에 붙어 서 있던 조앤과 멜리사를 바라봤다.
시선을 먼저 알아차린 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홀린 듯 로위나를 바라보고 있던 조앤이었다. 화들짝 놀란 조앤이 바닥만 보고 있는 멜리사를 건드렸다.
“멜리사.”
“응……?”
“미스 필로네가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뭐라고 하시는 거야?”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뜨며 조앤은 붉은 입술이 가리키는 의미를 알아내려 집중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옆에서 모셔왔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가 볼게.”
신호를 알아차리려고 조앤이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근처 웨이터의 은쟁반에서 칵테일을 집어 든 멜리사가 불쑥 사람들을 헤치고 로위나에게 향했다.
“아가씨.”
“멜리사.”
사람들에게 묻혀 공작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잔을 내밀며 멜리사가 조심히 물었다.
“목이 마르시다는 거였죠?”
“맞아. 역시 멜리사는 바로 알아 준다니까. 고마워.”
눈을 접어 웃은 로위나가 잔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칵테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식도를 조였다.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니에요? 벌써 조금 취하신 것 같은데…….”
설마 한입에 다 털어 넣을 줄은 몰랐던 멜리사가 걱정스레 물었다.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게 화장한 로위나의 뺨은 샹들리에 아래에서 눈에 띌 만큼 붉었다. 색기 어린 홍조 정도로 보일 수 있지만 취기에 어린 뺨 같았다.
“이전에도 과음하진 않으셨잖아요.”
그 이전이라는 게 오 년 전의 일임을 두 여자 모두 알았다. 하하. 작게 웃음을 터뜨린 로위나가 드나드는 웨이터에게 잔을 건넸다.
“과음? 이 정도로?”
“아가씨…….”
“피곤하네. 저하께선 바쁘신 것 같으니 이만 좀 쉬러 가야겠는데. 같이 가 줄래? 너만.”
“네…, 그럼요.”
높은 구두 굽에 휘청이는 몸을 부축한 멜리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무르익어 썩기 직전의 과일이 가장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법이란다. 멜리사.
멜리사는 로위나를 보며 어머니의 그 말을 떨치려고 노력했다. 떠들썩한 연회 홀과 달리 이 층은 조용했다. 로위나는 침실로 돌아가지 않고 널찍한 테라스 의자에 앉았다.
“아. 살 것 같다.”
조금 싸늘한 공기가 뜨끈한 목덜미를 식혀 줬다. 기분 좋은 느낌에 두툼한 숄을 여미며 로위나는 고개를 위로 젖혔다.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멜리사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두툼한 담요를 가져올게요.”
“고마워.”
로위나는 눈을 뜨지 않았다. 멜리사는 그대로 등을 돌려 멀어지려는데 조용한 부름이 그대로 멀어지려는 걸음을 붙들었다.
“맞다. 멜리사.”
“네?”
“그날. 나한테 하려던 말이 있지 않았니?”
“무슨…….”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거 같던데, 남작님이 오셨었잖아.”
“아.”
다시 뒤를 돈 멜리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냥 너무 반갑다고, 다시 뵙고 싶었다는 이야기였어요.”
“아. 그랬구나…….”
대답하는 목소리가 흐릿했다. 멜리사는 도망치듯 테라스를 나왔다.
유리문이 닫히는 소리를 끝으로 텅 빈 테라스에서 로위나는 제 손목에 끼워진 팔찌를 바라봤다. 가장 순수한 밀도의 백금에 다이아몬드를 촘촘하게 박아 넣은 팔찌였다.
로위나는 잃어버린 반지를 생각했다.
버려지던 날까지 미련하게 끼고 있던 반지. 그리고 끝까지 챙겨 왔던 반지. 돈이 될 거라 생각해서 가져왔다고 스스로를 속였지만, 사실 버리지 못한 미련 한 조각이었다.
스무 살. 스물세 살의 로위나 필로네는 그토록 멍청하고 그토록 미련했다.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는 반지의 행방이 이젠 궁금하지도 않았다.
근래 오 년 전으로 돌아온 그녀를 보며 킬리언은 만족해했다. 언제 어디를 가든 사람을 붙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것 또한 조금 느슨해졌다. 시험 삼아 멜리사 한 명만 데리고 연회 홀에서 나왔는데도 바로 따라오는 시선이 없었다.
조금만 더. 앞으로 조금만 더 버티면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