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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28화 (28/120)

28화

“…서섹스 남작님.”

멜리사의 어깨 너머로 남작과 눈이 마주친 로위나가 조금 어색한 얼굴로 인사했다.

“간밤에 잘 주무셨나요?”

“덕분에요. 변호사와 좀 전에 이야기를 나눴는데, 신탁 자금에 대해 상의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허허 웃은 베네딕트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연륜이 느껴지는 느리고 진중한 목소리. 주인의 여자를 대하는 데 있어 흠잡을 데 없는 예의.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희미한 경멸을 멜리사는 바로 읽었다.

―여태까지 잘해 왔다. 멜리사. 말 한마디만 잘하면 된다.

―그게 무슨…….

―윌리엄 제넌이란 남자와 미스 필로네가 내연관계에 있다고.

―그럴 수는 없…….

―다리를 저는 아비와 병약한 어미. 그리고 앞날이 창창한 오라비들이 있다지?

하찮은 개미를 내려다보듯 차갑게 명령하던 시선이 눈앞에 생생했다. 몇 번이고 공작께 사실을 알리려 했으나 인질로 잡힌 가족들의 안전이 발목을 잡았다. 어찌어찌 용기 내어 진실을 고백한다 해도, 상대는 누구보다 저하와 오랜 시간 함께한 수족과도 같은 측근이었다. 한낱 시중드는 고용인의 말을 믿어 줄지도 자신이 없었다..

―그저 말 한마디일 뿐이야. 어차피 덫은 세워졌고, 증거 또한 완벽해. 네가 증언하지 않는다고 해도 결과는 똑같을 거다.

―남, 남작님. 제발…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 와서 발을 빼겠다고? 여태껏 그 여자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충실한 시녀인 척 잘 굴었잖나. 그 윌리엄이란 남자를 만나도록 종용까지 했고.

―하, 하지만.

―가족이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지?

불의에 눈을 감아 버렸던 오 년 전의 자신이 떠올랐다. 찾아온 오한에 차마 뒤돌지도 못하고 멜리사가 제 어깨를 끌어안았다.

“멜리사?”

“아, 아가씨 죄송해요. 좀 몸이 힘들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끌어 올렸던 용기는 찾아온 공포에 맥없이 꺾였다. 덜덜 떠는 멜리사를 안타깝게 보며 로위나가 어깨를 토닥였다.

“역시 먼 곳에서 오느라 여독이 쌓였구나.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봐.”

“네…, 감사해요…….”

고개 숙여 인사한 멜리사가 도망치듯 자리를 피해 하인용 계단을 올랐다. 난간을 잡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옮기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멜리사?”

“제녹 님……?”

무표정한 얼굴로 선 제녹이 놀란 멜리사에게 지시했다.

“따라와. 공작님께서 부르신다.”

방대한 양의 서류를 한 장 한 장 확인한 베네딕트가 빙긋 웃었다.

“그럼 말씀드린 대로 진행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아…… 네. 잘 부탁드려요.”

“별말씀을요.”

베네딕트 서섹스는 희끗 센 머리에 눈가 주름이 부드럽게 잡힌 노신사였다. 또한 제녹과 더불어 공작의 옆자리를 지키는 측근이었다.

로위나는 그가 주로 회계 쪽을 담당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 역할을 증명하듯 그는 숫자 하나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검수를 마쳐 확인해 주었다.

“혹시 더 궁금하시거나 의아한 사항이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괜찮습니다.”

“당장은 없는 것 같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한 말에 살짝 고개 숙여 화답한 로위나가 옅게 웃었다.

“바쁘신데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미스 필로네는 공작님께 중요한 분이시니 그런 말은 말아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공증문서를 정리한 베네딕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위나 또한 덩달아 일어나자 너털웃음을 지은 그가 자리를 권했다.

“그냥 편하게 계시지요. 이리 배웅까지 해 주시면 제가 불편합니다.”

“아무리 그래도요.”

자기보다 어린 멜리사와 조앤이면 모를까, 나이 지긋한 상대에게 깍듯하게 존대를 받으면 불편하긴 로위나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눈앞의 사람은 귀족이었다.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빙그레 미소한 베네딕트가 조용히 권유했다.

“괜찮으시다면 함께 회랑을 걷겠습니까?”

성의 규모는 한나절을 돌아도 부족할 정도로 거대했다.

수백 년의 시절이 지나며 보수하고 증축해 온 결과였다.

로위나는 그동안 메인 홀과 자신의 침실, 그리고 데미안의 침실로 갈 때 외에 성을 둘러본 적이 없었다. 오 년 전 정부였던 시절엔 주로 수도 타운 하우스에 머물렀던 데다 성으로 돌아와서도 당시 에식스 후작 부인의 눈치를 보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못했다.

로위나는 그때에 비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녀가 조금이라도 분수에 어긋나는 짓을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던 후작 부인도 없고, 그녀를 보면 못 볼 거라도 본 듯 깍듯이 인사하던 고용인들도 이제는 더없이 공손하게 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알았다. 지난 한 달간 그녀를 대하는 공작의 태도 때문이었다.

볼일이 있을 때만 그녀를 찾고, 아주 가끔 다정하게 굴었을 때 외에는 일말의 배려도 찾기 어려웠던 전과 달리 이제는 꽤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 줬으니까.

원래 약자일수록 더욱 다른 약자에게 잔인하고, 강자에게는 약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상념도 잠시, 일 층 중정을 가로질러 회랑으로 로위나를 안내한 베네딕트가 멈춰 섰다.

“레이디 헤레이스의 초상입니다. 저하의 고모할머님 되시죠.”

로위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금박한 액자 테두리 안에 화가가 한 붓 한 붓 심혈을 기울여 그린 초상화였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에메랄드처럼 반짝이는 초록 눈동자, 공단을 덧입힌 장미목 의자에 앉아 이쪽을 나른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귀부인이 보였다. 넋을 잃고 그림 속 여인을 올려다본 로위나가 감탄했다.

“정말 미인이시네요.”

“그렇지요. 데본셔 가문 직계 분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미인으로 유명했습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에 로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킬리언의 고모인 에식스 후작 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얼핏 보아도 젊은 시절 굉장한 미인이었음을 알 수 있는 미모였다.

불현듯 떠오른 얼굴에 잠시 머뭇거리던 로위나가 느릿하게 물었다.

“그나저나 그… 에식스 후작 부인께서는…….”

“본가로 돌아가셔서 요양 중이십니다.”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대답한 베네딕트가 담백하게 미소했다.

“아마 돌아오실 일은 없으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군요.”

불편한 마음으로 로위나가 대꾸했다. 생각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베네딕트가 불쑥 물었다.

“레이디 헤레이스는 미스 필로네의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예……?”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요절했다니 믿기지 않았다. 질 나쁜 농담이라도 들은 얼굴로 로위나가 크게 눈을 떴다.

“외국의 대공에게 시집가셨습니다. 사절로 에셀우드에 왔을 때 한눈에 반했다던 상대와 달리 그녀 쪽에선 원치 않은 결혼이었죠. 성혼하고 건너가신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스스로 목을 매셨습니다.”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나 더 충격적인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졌다.

“연인이 있으셨습니다. 결혼할 즈음엔 이미 그 연인의 아이를 배에 품고 계셨었다는 게 나중에 밝혀졌죠. 아이는 유산하셨고 그 충격으로 목숨을 끊으셨다는 게 전해진 이야기입니다. 가문 내에서도 쉬쉬하는 과거이지만.”

“그. 그럼 그 연인은…….”

“전쟁 때 공을 세워 당대 공작님에게 비세습 작위를 얻은 휘하의 준자작이었습니다. 그 또한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당했죠.”

귀를 의심할 정도로 잔인한 이야기였다.

얼어붙은 로위나를 지나친 베네딕트가 이번엔 한 남자의 초상화 앞에서 멈춰 섰다. 로위나는 홀린 듯 따라 걸어 옆에 섰다.

“선대 공작님입니다. 저하의 아버님 되시죠.”

조금 전 봤던 귀부인과 마찬가지로 검은 머리카락에 칠흑 같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조금 유약해 보이는 분위기가 아들과는 달랐지만 입매와 턱선에서 언뜻 비슷한 점이 보였다.

“알고 계시겠지만, 동거하던 여배우와 불타는 저택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정부는 결혼 전 연인이었죠.”

로위나가 떨리는 숨을 삼켰다. 빙긋 웃은 베네딕트가 조용히 물었다.

“공작님의 미들네임이 왜 막시밀리안인지 아십니까?”

“아니요…….”

대답하며 로위나는 혀끝으로 그 이름을 굴렸다. 오랜만에 발음하는 풀네임이었다.

킬리언 막시밀리안 데본셔.

그는 공식 서류가 아니면 제 미들네임을 입에 담지도 않을 정도로 싫어했다.

“그 정부의 이름에서 따왔기 때문이죠.”

둔중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화등잔만 해진 눈으로 로위나는 손끝을 말아 쥐었다. 그가 약혼을 앞두고 자신을 그렇게 철저히 잘라 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공작가의 핏줄에는 한 사람만 마음에 담는 저주가 걸려 있습니다.”

석고상처럼 굳은 로위나가 베네딕트를 바라봤다. 그가 그 옆의 초상화를 가리켰다.

“이, 이 소녀는…….”

주저앉으려는 로위나를 예상했다는 듯 부축한 베네딕트가 부드럽게 물었다.

“누구인지, 아시겠습니까?”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과 똑 닮은 얼굴.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며 그가 쐐기를 박아 넣었다.

“저하의 돌아가신 태중 약혼녀입니다. 미스 필로네와 똑 닮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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