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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27화 (27/120)

27화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서늘한 날씨였다. 물결은 잔잔했고 바람도 선선했다. 넓은 호수에 배라고는 한 척뿐이었다.

넓은 나룻배 안에서 로위나는 킬리언과 단둘이었다. 그들 사이엔 가볍게 차려진 샌드위치와 과일, 그리고 환한 생화들이 자리 잡았다.

누가 보면 오붓한 데이트 중인 연인으로 보일 모습이었다. 정부로 지낸 삼 년간 그저 꿈에서만 그려 왔던 장면이기도 했다.

로위나는 쓰러져가는 낡은 빌라에서 재회했을 때처럼, 문득 눈앞에서 태연히 노를 젓는 남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성으로 온 지 한 달째였다. 매일 밤 연결된 문이 열리지는 않을까 숨죽이며 뒤척이던 밤이 우습게도, 그는 그녀를 안기는커녕 한 번도 침실로 넘어오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매일 같이 함께 점심 식사를 하고 그녀의 일상을 물었다.

오 년 전 처참하게 자신을 버릴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억지로 성에 데려오고 나서는 다정한 연인처럼 구는 그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위나.”

스콘을 집어 한 입 먹고 내려놓는데 킬리언이 손을 뻗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눈을 꼭 감자 그녀의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떼 낸 킬리언이 그것을 그대로 핥았다. 흘깃 드러난 붉은 혀에 로위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자신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그녀를 가늘어진 눈으로 바라본 킬리언이 불쑥 말했다.

“돌아가면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이요? 이미 충분한데…….”

충분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다. 바란 적도 없는 온갖 호화로운 것들을 떠올린 로위나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더는 필요 없어요.”

“…….”

“차라리 데미안을 더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데미안, 데미안, 데미안.

애써 치워 놓았던 이름이 귀를 파고들었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 킬리언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이미 충분히 자유를 준 것 같은데.”

“정해진 시간에만 아이를 볼 수 있잖아요.”

“그래서? 하루 종일 붙어 있겠다는 건가? 내 성에서?”

조용한 비아냥에 겉으로나마 온화했던 분위기가 단번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오랜만에 본색을 드러낸 킬리언을 향해 로위나가 진지하게 말했다. 당당한 듯 보였던 말에 어느덧 애원이 섞였다.

“보는 시간을 늘려 준 건 감사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공작님. 데미안은 아직 어려요.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하다고요.”

“유모가 둘이야. 항시 대기하고 있는 하녀도 있고.”

“어떤 사람도 엄마보다 아이를 생각하지 않아요. 아이도 마찬가지고요.”

“내 생각은 다른데.”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대답에 로위나는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마주 보고 앉아 있어도 두 사람은 맞닿지 않는 수평선에 서 있었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그녀는 정상이었다. 정상이 아닌 건 눈앞의 남자였다.

오 년 전 그렇게 처절하게 버렸으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찾아와 다시 정부가 될 걸 권유하고, 온갖 모욕을 다 퍼부었으면서 갑자기 다정해지고, 또 아들 이야기를 꺼내니 꼬리를 밟힌 독사처럼 구는 이 남자가.

로위나는 답답함에 크게 심호흡했다.

“나한텐 그 애가 전부에요.”

제일 힘든 시기, 제일 버틸 수 없었던 시기.

죽고 싶은 나날을 견디게 해 준 선물이었다. 열 달을 배에 품어 낳았고 다시 오 년을 키웠다.

첫울음을 터뜨리던 순간도, 첫걸음마를 떼고, 처음으로 엄마라고 부르던 순간을 기억했다.

모든 것이 경이로웠고 모든 순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그 애는 나의…….”

말하는데 울컥 치미는 감정에 목이 메었다. 고개를 떨군 로위나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진정하려 했는데 가슴에 맺힌 무언가가 계속 울컥하며 올라왔다.

눈앞이 새카매지고 호흡이 밭아졌다.

“로위나.”

“…….”

“로위나.”

킬리언이 어깨를 덜덜 떨기 시작한 로위나에게 팔을 뻗었다.

죄책감, 슬픔, 분노. 온갖 감정에 휩쓸린 그녀와 달리 차분한 목소리였다.

뿌리치려 하는데 그가 엄지로 귓바퀴를 쓸었다. 처음 정부가 되고 자괴감에 빠져 있던 그녀의 등 뒤로 다가와 놀라게 하던 버릇이었다.

원하는 건 뭐든 해 줬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한 번도 해 주지 않던 남자였다. 그러나 이럴 때면 사랑받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덫에 걸린 토끼처럼 로위나는 뻣뻣하게 굳었다. 두 손으로 목을 감싸고 몸을 숙였다. 언제 넘어왔는지 제 허리를 감싼 손길에 그대로 굳었다.

“진정해요.”

어린아이를 어르듯 부드럽게 말한 킬리언이 그녀의 얼굴을 제 가슴에 묻게 했다. 그리고는 호흡이 진정될 때까지 금발을 쓰다듬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떨림이 멎었다. 로위나는 현실을 직시했다. 킬리언 본셔는 강경하게 맞서는 상대는 철저하게 부숴 버리는 남자였다.

그리고 자신은 데미안을 위해서는 자존심 같은 건 얼마든지 내버릴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차릴 체면도 자존심도 없었다. 그러니 그녀도 약게 굴어야 했다.

“제가 얌전하게 굴면, 아이를… 더 볼 수 있게 해 주실 건가요?”

“…….”

턱을 들어 올리는 손길에 로위나는 힘을 빼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방울방울 눈물이 맺힌 속눈썹이 나비의 날개처럼 애처롭게 떨렸다. 연약해 보이는 여자의 모습 아래 제 새끼를 품은 어미로서의 독기가 번뜩였다. 그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 낸 킬리언이 그녀를 안고 있던 손을 거뒀다.

“이제 성으로 돌아가요.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완곡한 거절이자 외면이었다. 로위나는 대답 대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 *

그가 말한 선물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그것도 잘 아는.

“아가씨…….”

“…멜리사?”

현관홀에 서 있는 멜리사를 본 순간 로위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킬리언은 그녀를 배에서 내려 준 뒤 바로 집무실에 갔기에 물어볼 사람은 눈앞의 사람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저 다시… 고용됐어요. 조앤과 함께 아가씨를 모시게 됐어요.”

놀라움과 반가움, 그리고 의아함으로 눈을 크게 뜬 로위나와 달리 시선을 아래로 떨군 멜리사가 천천히 대꾸했다.

“아, 앞으로 잘 부탁…….”

“멜리사!”

오 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멜리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 다가간 로위나가 그대로 멜리사를 끌어안았다.

“세상에. 너무 반가워. 잘 살고 있다고 조앤한테는 들었는데… 다시 고용됐다니.”

일하랴, 육아하랴 바쁜 와중에도 가끔 생각나던 얼굴이었다. 따뜻하고 말 많고 선량하던 친구.

마지막 날은 최악이었지만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이후에도 계속 다독여 주려 했던 것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다시 보니 정말 좋다. 내가 조앤에게 보고 싶다고 했었는데… 혹시 억지로 끌려온 건 아니지?”

오랜만에 재회한 친구를 끌어안고 한참을 재잘거리던 로위나가 이상한 공기에 팔을 풀었다.

“멜리사?”

“…….”

“왜 이렇게 얼굴이 새파래?”

반가움에 혈색이 도는 그녀와 달리 주근깨 어린 멜리사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새파랬다.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걱정스러운 얼굴로 로위나가 멜리사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멜리사는 가슴을 내리누르는 죄책감에 그저 입만 벙긋했다.

―예…아가씨… 아니, 미스 필로네는…….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주변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나, 남장까지 하시고요.

공작가의 일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잊을만하면 찾아오던 악몽이었다.

땀에 흠뻑 젖어 잠에서 깨어나면 자괴감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공작님의 오른팔인 서섹스 남작의 협박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들이 걸려 있었다.

죄책감이 목 끝까지 치달을 때면 스스로에게 주문을 외우듯 변명을 했다.

아가씨는 그래도 공작님의 정부였잖아. 그러니 아주 부유하게 살고 계실 거야.

그러나 조앤에게 편지로 전해 들은 이야기는 전혀 달랐다.

깡마르고 초췌한 여자더라고. 오 년 전엔 그렇게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하던 여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힘겨운 시간을 보냈음은 확실했다. 때론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아가씨…….”

“멜리사. 정말 괜찮은 거야?”

침음을 삼킨 멜리사가 주먹을 쥐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반기는 것으로 보아 로위나 아가씨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더불어 아이까지 있다고 했다. 로위나 아가씨에게는 킬리언 데본셔 외에 그 어떤 남자도 없었다. 그러니 공작님의 아이가 분명했다.

로위나 아가씨를 위해, 그리고 그녀의 아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그때 그녀가 입을 다물었던 진실을 밝히는 것. 오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렇게 처참하게 버려져야 했는지.

그러니 말해야 했다. 전부 사실대로 밝히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결심한 멜리사가 천천히 입을 열려는 때였다.

“여기 계셨군요. 미스 필로네.”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넓은 홀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누군가 찬물을 정수리 위로 퍼부은 듯 온몸이 차가워졌다.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다가온 남자가 멜리사의 등 뒤에서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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