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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26화 (26/120)

26화

눅눅하고 투명한 새벽공기가 폐에 가득 들어찼다. 막 동이 터 오르는 시간의 호숫가는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한껏 따뜻하게 입고 나온 데미안은 오랜만의 산책에 들떠 있었다.

“그렇게 좋아?”

“응! 엄마랑 둘이 있으니까 너무 좋아.”

빙글빙글 웃으며 호수를 바라보던 데미안이 로위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우리 언제까지 여기서 신세 져야 해? 언제 집으로 돌아가?”

“그건…….”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로위나의 말문이 막혔다.

데미안은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그간 충분히 편해진 제녹을 제외하고 단둘이 산책하자는 이유가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걸음을 멈춘 로위나가 무릎을 접고 앉아 데미안과 눈높이를 맞췄다.

“이건 데미안만 알고 있어. 곧 엄마의 외삼촌이 데리러 올 거야. 제레미 디쉬라고 하는 분이야.”

“엄마의 외삼촌?”

데미안으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눈을 동그랗게 뜬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분이 우리를 데리러 와?”

“응. 그러니까… 좀 더 기다리면 돼.”

“정말? 정말 여기서 나갈 수 있어?”

“그럼. 약속할게.”

부드럽게 웃은 로위나가 부드러운 흑발을 쓰다듬었다.

“알았어.”

짧고 행복했던 산책은 그렇게 끝났다. 조앤이 알려 준 고용인용 뒷문을 통해 데미안을 방으로 데려다주고 나서 로위나는 침실로 향했다.

침실로 오는 내내 아무하고도 마주치지 않아 안심하며 방문을 여는 때였다. 평소와는 다른 공기에 본능적으로 등줄기가 섬찟했다. 싸한 바람 냄새를 맡는 순간, 냉랭한 목소리가 로위나의 귀를 파고들었다.

“미스 필로네.”

텅 비어 있어야 할 침대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 새벽에 어딜 다녀오는 길입니까?”

위태롭게 이어지던 평화가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감정이 읽히지 않는 어조에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섰다. 방금까지 느꼈던 평온한 공기가 단번에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거미줄에 걸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침을 삼킨 로위나가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산책을.”

두려움으로 떨리지만, 그녀는 억지로 끌려온 입장이었다. 피해자였으니 당당했다. 하지만 데미안을 떠올린 순간 말끝이 떨렸다.

“가볍게 산책을 하고 왔어요. 속이 답답하기도 하고 그래서…….”

두 눈을 가늘게 뜬 킬리언이 겁에 질린 정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말입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시선을 내리깐 로위나가 두 손을 꼭 잡았다.

그 모습을 관찰하듯 보던 킬리언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가오는 줄 알고 두 눈을 꼭 감은 로위나의 앞을 지나쳤다.

로위나가 조심스레 감았던 눈을 뜨자 그는 타오르는 벽난로 앞 카우치에 앉아 있었다. 궐련을 입에 문 킬리언이 성냥을 꺼내 필터에 불을 붙였다. 길게 연기를 내뱉은 킬리언이 맞은편 카우치를 고갯짓했다.

무언의 지시에 터덜터덜 다가간 로위나가 자리에 앉았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말을 하면서도 굴욕적이었다. 아주 작은 자유마저도 누릴 수 없는 게 억울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혼자 나간 것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았다고 생각하는 데미안을,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눈엣가시로 생각하는지 로위나는 잘 알고 있었다.

록포드로 오는 내내 종종 데미안을 보러 이등석 객실로 가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끌어 앉히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피곤하실 텐데, 신경 쓰이게 해 드렸네요.”

기어들어 가듯 말한 로위나가 제 손끝만 내려다봤다.

그저 방 안에 단둘이 마주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 숨통을 조이는 느낌이었다. 냉담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그대로 얼어 버릴 것 같았다.

고용인들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이른 새벽이었다. 쉬폰 커튼 너머로 들어온 새벽빛이 금발을 따스하게 물들였다. 고개를 숙인 여자는 유령처럼 혈색에 생기가 없었다.

킬리언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하는 여자를 주시했다.

록포드로 오는 내내 그는 밤마다 잊고 있던 이 여자의 체취를 맡으며 잠이 들었다. 처음엔 그의 잠버릇을 불편해하더니 로위나는 곧 적응해 아기처럼 새근새근 잤다.

그는 자는 로위나의 얼굴을 몇 시간이건 바라봤다. 피곤에 찌든 얼굴. 거뭇거뭇한 눈빛과 거칠어진 피부.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과 뒤에서 안으면 갈비뼈가 만져질 정도로 마른 몸.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뀐 모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전에 맞아들였던 여자들에게는 한 번도 궁핍을 겪게 한 적이 없었다. 모두 원만하게 헤어졌고 변호사의 공증 아래 충분한 위자료 겸 이별 선물을 건넸다. 수도에 건물 하나는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주기도 했다.

그 돈을 로위나가 챙겨 가지 않았다는 건 나중에 알았지만, 서섹스 남작에게 알아서 찾아 전해 주라 지시했을 뿐 구태여 그가 직접 찾아 쥐여 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시 본다면 그땐 정말 목을 졸라 죽여 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잘 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을까.

가정을 했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여자를 계속 보고 있을수록 가슴 안쪽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올라왔다.

지난 오 년간 텅 비어 있던 구멍 하나가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마른 몸을 껴안고 잠이 들면 울먹이며 자신의 아래에서 고백하던 여자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난 언제나 진심이었어. 당신을…….

―당신을… 사랑했다고요.

여름의 숲 같은 초록 눈동자를 떠올린 순간, 깊은 잠에서 깨어난 느낌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명징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로위나 필로네를 진정으로 버린 적이 없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클로에 에버딘의 말은 도화선이 아니라 그저 불씨가 남은 화로에 마른 장작을 던져 넣은 것에 불과했다.

로위나 필로네를 다시 버릴 일은 없었다. 앞으로 결혼할 일은 없을 테니까.과거의 일은 묻어 두고 앞으로의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의 앞을 가로막는 건 다름 아닌 볼모로 잡아 온 아이였다.

지난 오 년, 로위나 필로네는 아이를 낳았다. 항상 피임을 했었으니 그의 아이일 가능성은 적었다. 윌리엄 제넌의 아이인지, 또 다른 남자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눈앞의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속에서 불이 끓었다.

그래서 이 여자와 떨어져야 했다. 멀리 떨어져 그녀를 버릴 수 없는 자신을 다시 되돌아보고 객관적으로 미래를 설계해야 했다. 때문에 여독을 풀 새도 없이 성을 떠났다. 수없이 들이닥친 일들을 처리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로위나.”

오래간만에 불린 이름에 로위나가 천천히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궐련을 비벼 끈 킬리언이 카우치 등받이에 깊게 기대앉았다. 팔걸이에 팔꿈치를 올리고 두 손가락을 깍지 낀 모습이 나른하면서도 편안해 보였다.

“난 이제 과거는 과거인 채 묻어 두기로 했습니다.”

“그게 무슨…….”

“아이를 낮에 만나도 됩니다. 원한다면 성 주변도 산책해도 되고요. 물론 시간이 정해질 테고 호위가 붙겠지만.”

아직 안나 에든을 죽인 이의 정체를 밝히지 못한 상태였다. 더불어 억지로 끌고 왔으니 도망칠 위험도 있었다.

“그 말씀은…….”

나름 관대한 제안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로위나의 낯빛은 점점 하얘졌다. 그대로 생각이 읽히는 얼굴에 킬리언이 조용히 물었다.

“밤마다 아들에게 가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습니까?”

그럼 자신의 아들인 것도 아는 걸까?

사실, 그가 데미안을 보기로 마음만 먹으면 친아들이라는 걸 눈치채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뼈마디까지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을 치맛자락에 숨긴 로위나가 떠보듯 되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아이의 이름만 나와도 매섭게 반응하던 눈을 기억했다.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궁금했다. 정말로 진실을 알게 된 게 아니라면 차라리 불같이 화를 내거나 전처럼 구는 게 더 나았다. 원래의 과묵하고 무서운 남자보다 지금처럼 생각을 종잡을 수 없는 남자의 모습이 더 두려웠다.

“매우 싫어하셨잖아요…….”

“내 눈앞에만 얼쩡거리지 않으면 돼.”

부드럽게 대꾸한 킬리언이 오랜 잡무로 뻐근한 고개를 위로 젖혔다.

그래. 이 여자는 자신에게 중요한 존재였다.

혼란스러웠던 감정이 정리되니 지끈거렸던 두통도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오 년 전의 부정은 묻는다. 아이의 존재 또한 용인한다.

살면서 베푼 가장 큰 관대함이었다. 애초에 로위나 필로네란 여자는 자신에게 언제나 ‘예외’였다.

물론 사랑이니 뭐니 유치한 감정은 아니었다. 이 기이한 집착과 욕망을 그런 그럴듯한 단어로 포장할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없었다. 하지만 욕망이면 어떤가. 그는 살면서 그 어떤 여자도 이렇게 욕망한 적이 없었다.

“내일은 당신 앞으로 신탁기금을 만들 겁니다. 변호사의 설명을 잘 듣고 서명하면 돼요. 앞으로 당신이 원하는 게 있으면 밤에 내게 직접 말하거나 하녀를 통해 알려요.”

뜻밖의 말이었다. 자비를 베풀었으니 그 대가로 잠자리를 무섭게 밀어붙이리라는 예상과 달리 담백한 태도에 로위나는 그저 눈만 홉떴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아는 킬리언 데본셔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제게 왜 그런 것들을 해 주시는 거죠? 신탁은 됐습니다. 이미 지금 주시는 것만으로…….”

“당신이 필요하니까.”

“…….”

더듬더듬 사양하려는 말허리를 끊은 킬리언이 젖혔던 고개를 바로 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일어나 두 귀를 의심하는 로위나를 향해 제안했다.

“호수를 좋아하는지는 몰랐군요. 날씨가 좋아지면 뱃놀이를 하죠. 오늘은 어렵겠지만.”

차가운 얼음 같은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로위나는 시선을 피했다.

처음 기차에서 망막에 아로새겼던 미소였다. 그녀는 더 이상 저 미소를 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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