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그 방은 공작 부인의 방입니다.”
“글쎄. 지금은 아무도 쓰지 않지 않나. 내 전 부인도 쓴 적이 없지.”
그대로 밀어붙일 기세에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진 건 뒤에 서 있던 로위나였다. 록포드로 오는 내내 달리 손을 대진 않았지만, 밤이 되면 베개를 안듯 그녀를 등 뒤에서 끌어안고 자던 남자였다.
바로 옆방을 내준다면 그 해괴한 잠버릇이 이어질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옆방이라면 데미안을 보기 어려워진다.
가까스로 굳은 표정을 푼 로위나가 조용히 끼어들었다.
“전, 원래 쓰던 방이 좋습니다. 저하.”
로위나의 의견은 가볍게 묵살됐다. 단호한 거절에도 킬리언은 기어이 제 생각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그녀에게는 이전에 쓰던 방보다 두 배는 넓은 침실이 주어졌다. 복도를 통하지 않고도 공작의 침실에 문 하나로 들락거릴 수 있는 유일한 방이었다.
예전에는 그토록 원해도 넘보는 것조차 못 하게 하더니 이제는 원하지 않아도 억지로 내주는 행동이 무얼 뜻하는지 감히 알 수도 없었다.
이어진 변덕에 로위나는 킬리언 데본셔란 남자를 이해하길 아예 포기했다.
그녀에겐 호화로운 방뿐 아니라 새로운 하녀 또한 배정됐다.
“안녕하세요. 미스 필로네. 제 이름은 조앤 주드입니다. 편하게 조, 아니면 조앤이라 불러 주세요.”
오 년 전 멜리사가 떠오르는 말간 낯의 소녀였다. 깍듯하게 자기소개를 마친 조앤에게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조앤.”
“머리를 빗겨드릴게요.”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자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화장대 의자에 깊게 앉았다.
슥슥, 상아빗이 결 좋은 금발을 빗는 소리와 침대 발치의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침실에 울렸다.
로위나는 화장대 위에 놓인 시계를 흘깃 바라봤다. 불행 중 다행히도 오늘은 공작과 같은 침대에서 잘 일은 없었다. 오랜만에 성으로 돌아온 그에게 검토해야 할 서류가 잔뜩 쌓여 있었던 탓이었다.
로위나는 한번 일을 손에 쥐면 완벽하게 끝낼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는 그의 성정을 잘 알았다. 감사한 일이었다. 하룻밤이 비는 틈을 타 제녹이 몰래 데미안의 방으로 데려가 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약속 시각까지 아직 한 시간여가 남아 있었다.
데본셔 가의 고용인들은 모시는 상전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감히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긴 정적이 어색한 로위나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조앤은 고향이 어디예요?”
“아. 레우드에요. 아마 못 들어 보셨을 텐데.”
레우드. 어쩐지 낯익은 단어에 로위나가 눈을 크게 떴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이지만 들어 본 이름이었다. 멜리사가 언젠가 들려줬던 고향의 이름이었다.
“혹시 멜리사라고 아나요? 여기서 일했던 아이인데.”
공작가에서 일하는 걸 긍지로 여겼던 소녀. 그렇게 버려져 인사도 못 하고 떠난 게 가슴 한편에 미약하게 죄책감으로 남아 있었다.
“글쎄요…….”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조앤이 고개를 갸웃했다. 로위나가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이고 주근깨가 있어요. 수다스럽고 나이는… 지금 스무 살을 좀 넘었겠네요.”
“아.”
한참 기억을 되짚던 조앤이 이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제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아는구나. 어때요? 잘 지내나요?”
반가운 대답에 화색이 된 로위나가 캐묻듯 물었다.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생기 없던 얼굴에 혈색이 도는 모습에 조금 놀라던 조앤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요. 지금은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고 약혼자도 있어요. 그만둘 때 이곳에서 두둑하게 퇴직금을 주셨다던데요.”
“그렇군요. 다행이다… 오 년 전, 멜리사가 절 보살펴 주었거든요. 혹시 편지할 일 있으면 꼭 안부 전해 주세요.”
“예. 그럴게요.”
“그리고 혹시…….”
순순한 대답에 잠시 망설이던 로위나가 부탁했다.
“헤리엇 디킨슨이라는 사람한테 편지가 오면 저한테 바로 갖다 주세요. 제 친한 친구라서요.”
헤리엇에게 부탁한 건 바로 삼촌인 제레미 디쉬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는 거였다. 편지에는 고향을 떠나 지난 팔 년간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써 놨다. 연락을 받고, 삼촌의 도움으로 이곳을 도망쳐 나오기 전까지는 제녹의 말을 듣는 게 제일 좋은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조앤이 미소했다.
조앤이 물러가고 침실에 제녹이 찾아왔다. 그가 어두운 로브를 내밀었다.
“눈에 띄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어미가 아들을 보러 가는 데 남들 눈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 서글펐다.
“다른 사람 중 혹시 데미안을 본 사람이 있나요?”
“아니요. 입 단속한 유모들 외엔 모자를 눌러써서 다들 얼굴은 못 봤습니다.”
그대로 두 사람은 로브를 쓰고 조용한 복도를 가로질러 계단을 몇 층 내려가 데미안의 방에 도착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에서 자고 있는 아들이 보였다. 마침 이불을 올려 주던 유모가 보고했다.
“이제 막 잠드셨습니다.”
“수고했네. 나가 보게.”
제녹이 유모를 보내고 나서야 로위나는 떨리는 손길로 데미안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곳에 오는 내내 아주 잠깐씩 밖에 얼굴을 보지 못한 아들이었다. 뺨에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애틋한 손길로 아들의 이마에 입 맞춘 로위나가 이마를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던 제녹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저도 그동안 나라를 오가느라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공작님은 지난 결혼 생활 동안 자식을 낳지 않으셨습니다.”
“…….”
“만약 도련님이 친자로 인정받는다면…, 나중에 후계자가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제 딴에는 위로라고 한 말이었다. 조금만 버티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 거라는 의도였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싸늘했다.
애달픈 눈으로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던 로위나가 불쑥 물었다.
“후계자로 인정받으면요?”
“…….”
“공작님처럼 자라게 되나요?”
조용한 물음임에도 담긴 뜻은 명확했다. 로위나는 아들이 사람의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고 무시하는 잔인한 남자로 자라기를 바라지 않았다.
비록 부족한 환경에서 조금 가난하게 자라더라도 적어도 지금처럼 올곧고 밝게 커 줬으면 했다.
“미스 필로네.”
답답한 얼굴로 그녀의 뒤통수를 응시하며 제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 그 어떤 아이에게도 친아버지가 누군지 알 권리가 있습니다. 공작님 또한 마찬가지죠. 친아들의 존재를 알 권리가 있습니다. 자격이 있건 없건 간에.”
“…….”
둔중하게 명치를 찌르는 말이었다. 로위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제녹이 말을 끝맺었다.
“조금씩 조금씩 도련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주세요. 저하께서 아이를 더 이상 꺼려 하지 않게 되면 그때 밝히는 겁니다.”
그럴 생각이 없어요. 그전에 난 이곳에서 도망칠 거예요. 목 끝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삼킨 로위나가 대답 대신 아이의 얼굴만 눈에 담았다.
* * *
제녹의 부탁이 무색하게도 두 모자를 성에 끌고 온 킬리언은 다음날 새벽, 말도 없이 성을 떠났다. 그동안 밀렸던 영지의 세금 문제와 성 관리 전반의 쌓여 있던 일들을 직접 보고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운 좋게 주어진 유예 아닌 유예에 로위나가 간신히 한숨을 돌리는 사이, 침실에 매일 같이 선물이 찾아들었다. 이혼 후 다시 들인 로위나 필로네에 대한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나간 여파였다.
오 년 전에는 등 뒤에서 더러운 여자라 손가락질했던 귀족들이 이제는 선물과 함께 카드를 보내왔다.
어지간한 인맥 없이는 거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한다는 구두와 신발. 유명 의상실의 최신 드레스와 휘황찬란한 보석들.
그녀가 공작 부인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후에 데본셔 공작가의 주요 실세가 될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환심을 사기 위한 뇌물을 볼 때마다 로위나는 쓴웃음을 삼켰다. 생각보다 아둔한 사람들이었다. 어차피 다시 질리면 버려질 처지인데.
수북이 쌓인 초대장과 예쁘게 포장되어 드레스룸에 쌓인 선물들을 로위나는 외면했다.
“전부 그대로 돌려보내요.”
“네? 하지만…….”
“손대지 말고 전부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조앤이 바라봤으나 잠깐이었다.
언제 온다는 전보도 없이 기다림이 나흘째 이어지던 날이었다.
덕분에 아들을 매일 밤 볼 수 있었지만, 불안이 로위나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할 무렵 데미안이 불쑥 말했다.
“엄마! 나 호수에 가고 싶어.”
뜬금없는 요청에 로위나는 눈을 깜박였다.
“호수?”
“응. 직접 내려가서 보고 싶어. 창문 밖으로 보는 거 말고.”
킬리언은 성안에서는 행동반경을 제한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성안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데미안의 외모가 너무 그와 닮았기에 혹시라도 아들에게 갈 수 있는 관심을 피하려고 로위나는 가급적 외출을 지양했다. 그러나 거의 침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데미안에 비하면 더 나은 처지였다.
장난감이며 먹을거리를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있었지만 ‘정부의 아이’인 데미안은 자유롭지 않았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얌전하게 지내야 한다는 말에 아이를 답답하게 묶어 두고 있었다.
“안 될… 안 될까?”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는 데미안을 향해 로위나가 옅게 미소했다.
“아니. 잠깐이라면 괜찮을 거야. 제녹 아저씨한테 부탁하면…….”
“싫어. 엄마랑 둘이서 가고 싶어.”
일어나 문밖에 서 있는 제녹을 부르려던 로위나가 아들의 다급한 말에 그대로 멈췄다.
“둘이 산책한 지도 오래됐잖아. 아저씨 몰래. 응?”
옷자락을 잡고 매달리는 데미안의 눈동자가 글썽글썽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엄마가 이따 해 뜰 때 다시 찾아올게.”
“아무도 모르게?”
“응. 아무도 모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