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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24화 (24/120)

24화

“읍……!”

예상치 못한 기습에 로위나가 몸부림치며 그의 손을 떨쳐 내려 했다. 입술을 돌리고 뺨을 치려 했지만 점점 몸에서 힘이 풀렸다. 먹이를 옭아매는 뱀처럼 집요하게 침 하나까지 남김없이 삼킨 킬리언이 헝클어진 금발을 귀 뒤로 넘겼다.

“버르장머리 없이 굴지 말고 입 다물어요. 미스 필로네.”

마지막 경고였다. 다른 이가 들었다면 간담이 서늘해질 어조였지만, 로위나는 차분하게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 냈다.

“할 말 하셨으면 이만 자도 될까요?”

“…….”

“어젯밤 심란해서 잠을 설쳤거든요. 그래서 너무 졸리네요.”

담담한 척 말했지만 말끝이 떨렸다. 어이없다는 듯 실소한 킬리언이 승무원을 불러 잠자리를 꾸리게 했다.

널찍한 좌석이 간이침대로 탈바꿈하자마자 로위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다. 피곤이 눈꺼풀을 내리눌렀다. 다가온 꿈이 그녀를 팔 년 전으로 데려갔다.

부우우우우.

묵직한 새벽안개를 해치고 기차가 플랫폼에 도착했다.

기다리던 승객들이 떼로 다니는 물고기들처럼 줄지어 탑승했다. 삼등석 객차 앞에서 로위나는 짐가방을 들고 잠시 거대한 증기기관차를 올려다봤다. 책에서 보던 것보다 웅장한 크기에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했다.

어릴 때부터 타 보고 싶었던 기차였다. 어떤 미지의 세계로 자신을 데려갈지 기대되고 설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았던 넓은 세상.

“…괜찮을 거야. 올라가서도 혼자가 아니니까.”

주문을 걸듯 중얼거리는데, 심드렁한 얼굴의 역무원이 차표를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어느덧 그녀가 올라탈 차례가 된 것이다.

크게 심호흡하고 안쪽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위나!”

“…삼촌……?

“로위나! 잠깐 기다려라.”

눈을 홉뜬 로위나가 조용히 다음 사람에게 차례를 양보했다. 헐떡이며 뛰어온 남자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금발, 그리고 검은 눈동자. 호리호리한 키에 마른 체격의 남자는 그녀의 유일한 보호자이자 외삼촌인 제레미 디쉬였다.

제레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고개를 푹 숙인 로위나가 먼저 선수를 쳤다.

“말도 없이 나가서 정말 죄송해요……, 삼촌.”

하지만 정말로 이 수밖에는 없었다. 몇 년 전부터 계속 수도에 올라가겠다는 말만 꺼내면 절대 반대를 외치던 외삼촌이었다. 설득하려고 노력해 봐도 안 되리라는 걸 깨달았을 때 그녀는 결국 가출 아닌 가출밖에는 답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정말로… 올라가야겠어? 그곳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벅찬 호흡이 가라앉자 굽혔던 허리를 편 제레미가 진지하게 물었다.

“너같이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한 여자애는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곳이야. 너에겐 아직 보호자가 필요하지.”

귀에 못 박히듯 들었던 말에 로위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삼촌. 난 더 이상 애가 아니에요.”

수십 번 수백 번 반복된 이야기였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줄에 서 있던 마지막 승객이 기차 위로 올라탔다. 계속 승무원의 눈치를 살피는 로위나에게 제레미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네가 정 원한다면 묶어 둘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하렴.”

“뭐를요?”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이 필요할 때, 돌아오고 싶을 때 언제든 돌아와라.”

“…….”

“그 어느 때든 좋아. 어떤 짓을 저질렀건 상관없어. 나만은 언제나 네 편이다. 로위나.”

“삼촌…….”

코끝이 시큰했다. 로위나는 제레미의 품에 폭 안겼다.

“감사해요…. 자리 잡고 연락드릴게요.”

“그러렴.”

언제 눈에 불을 켜고 반대했냐는 듯 조카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제레미가 무거운 짐을 기차 위로 날랐다.

승무원에게 표를 건네고 올라탄 로위나가 마지막으로 손을 흔들었다.

좌석은 불편하고 사람들 사이에 껴 있긴 하지만 괜찮은 여행이었다.

문제는 어두컴컴한 저녁이었다. 밤눈이 어두운 터라 겨우겨우 집중해야 앞이 보였다. 미리 외워 둔 대로 식당 칸에서 나와 화장실을 찾는데 보이질 않았다.

로위나는 포기하고 삼등석으로 돌아가려고 발길을 틀었다. 길을 물어볼까 싶어 문을 연 때였다.

환한 빛과 함께 생전 처음 보는 호화로운 객실이 눈에 들어왔다. 엉거주춤한 로위나가 뒷걸음질 치다 휘청했다.

“어어……?”

그때 객실 안쪽에서 뻗어 나온 손이 어깨를 휘감았다. 넘어지려는 몸을 가볍게 잡아챈 손이 담백하게 떨어졌다.

“조심하셔야죠. 아가씨.”

“가, 감사합니다.”

젊은 남자와 이렇게 가까이 닿은 건 처음이었다. 귀 끝까지 빨개진 로위나가 눈을 바닥에 고정했다. 흐릿하게 맡아지는 궐련 냄새와 백단향 냄새에 어질했다.

“길을 잃은 겁니까?”

깊은 동굴에 있는 것처럼 낮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더없이 정중하고 부드러운 어조에 로위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풀어진 칠흑같이 새카만 머리카락, 푸르른 호수 같은 눈동자. 날카로운 눈매에 시원하게 뻗은 콧대. 육감적인 입술.

그녀를 붙잡아 준 승객은 눈이 의심될 정도로 미남자였다. 동화책에서 봤던 왕자님 같기도 했다. 무표정한 모습만 아니라면. 그때 입에서 딸꾹질이 올라왔다.

“딸꾹!”

좀 전의 실수에 이어 또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다. 입술을 말아 문 로위나가 급하게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그러나 시작된 딸꾹질은 멈추지 않았다.

의아하게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 로위나가 황급히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게… 딸꾹! 너, 너무 잘생기셔서…….”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던 남자가 작게 웃음을 터뜨린 건 다음 순간이었다. 차가웠던 인상이 순식간에 화해지더니 조각이 사람이 되는 것처럼 마법이 일어났다.

남자가 품을 뒤지더니 그녀의 입에 무언가를 쏙 넣었다. 그게 뭔지 깨닫기도 전에 혀에 달콤한 맛이 느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로위나가 놀라서 숨을 참았다.

딸꾹질이 멈췄다. 여러모로 마법을 부리는 남자였다. 어쩌면 왕자가 아니라 마법사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신기한 마음에 무례를 잊고 로위나는 가만히 남자를 바라봤다. 눈을 가늘게 뜬 남자가 다시 한번 물었다.

“길을 잃은 겁니까?”

“아…, 네.”

“승무원을 부를 테니 기다리세요.”

종을 울리자 머지않아 일등석 전담 승무원이 객실로 찾아왔다. 명령하는 게 아주 익숙한 얼굴로 남자가 지시했다.

“숙녀분을 객실까지 안내해 드리도록.”

“예.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죠.”

“아……, 네.”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남자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승무원을 뒤따라가려던 때였다.

“잘 가요. 미스…….”

불쑥 멈춰 선 로위나가 홀린 듯이 뒤를 돌았다. 팔짱을 낀 채 문설주에 기대선 남자가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로네…, 필로네에요.”

“미스 필로네.”

입 안에서 굴리듯 한 번 그녀의 성을 발음한 남자가 제 이름을 밝혔다.

“킬리언. 킬리언 데본셔입니다.”

객실에서 쏟아진 붉은 전등 빛이 매끈한 남자의 피부를 환하게 물들였다. 빙긋 웃은 남자의 왼뺨에 깊게 보조개가 파였다.

남자는 다음날 점심 식사에 그녀를 초대했다.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에 로위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새 밤이 됐는지 기차 안은 컴컴했다. 등 뒤에 바짝 붙은 몸에 심장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등받이와 킬리언의 몸 사이에 갇힌 상태였다.

정수리 위로 나직한 숨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허리를 끌어안은 손을 풀려고 하자 속박이 더 강해졌다.

“…주무세요?”

대답은 없었다. 자기 침대도 있으면서 왜 그녀를 끌어안고 자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불편한 자세 때문에 조금씩 몸을 뒤틀자 졸음에 잠긴 듯, 조금 쉰 목소리가 으르렁거렸다.

“가만히 있어요. 날 자극하려는 게 아니라면.”

정부였던 시절엔 정사가 끝나면 냉랭하게 사라지던 남자였다. 알 수 없는 변덕에 로위나는 이해하기보단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 * *

록포드의 데본셔 공작저인 위즈본 캐슬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성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호수를 뒤로하고 해자로 둘러싸인 흰 성은 네 개의 높은 첨탑과 외벽, 내벽, 그리고 해자를 가로지르는 높은 다리로 이뤄졌다.

공작가의 인장이 찍힌 마차 두 대가 다리 입구에 서자 육중한 도개교가 천천히 내려왔다. 완전히 다리와 수평이 되자 마부가 힘차게 채찍을 내리쳤다. 투레질한 두 쌍의 흑마가 외벽을 지나 성안으로 들어왔다.

주인의 귀성에 시립한 수십 명의 고용인 가운데 제일 먼저 공작을 맞은 건 집사였다. 마차에서 내린 킬리언에게 다가온 그가 부드럽게 인사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보고할 일은 없습니까?”

“여태껏 연락드린 대로, 크게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무감하게 대꾸한 킬리언이 마차 안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당연한 듯 눈앞에 내밀어진 손에 잠시 머뭇거리던 로위나가 그의 에스코트를 무시한 채 마차에서 내려왔다. 하나둘 누군지 알아본 고용인들의 시선이 경악에 휩싸이는 가운데, 미리 언질을 받은 집사만이 차분했다. 킬리언이 무감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미스 필로네의 방은.”

“준비해 두었습니다. 원래 쓰셨던 방으로.”

“아니. 그 방 말고.”

부러 제 시선을 피하는 로위나를 응시하며 킬리언이 덧붙였다.

“내 옆방으로 안내해요.”

“저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귀를 의심한 건 당사자인 로위나도 마찬가지였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집사가 침착하게 반대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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