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받아도 되는 거 맞지?”
“그럼.”
로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아들을 끌어안았다. 목이 메었다. 눈시울에 열이 올랐다.
옷과 장난감만으로 날아갈 듯 신나 하는 데미안의 모습에 슬프고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동시에 여태 외삼촌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완고한 성격의 외삼촌은 순순히 자신을 용서해 주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외면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혹시 모를 위험 때문에 직접 찾아가진 않았더라도 돈이라도 빌려 달라 부탁했다면.
일반적인 가정이라면 겪지 않았을 가난을 아들에게 안겨 주었다고 생각하니 누군가 비수로 심장을 찌르는 듯이 아파 왔다.
“엄마……?”
“얌전하게 잘 있어 줘서 고마워. 데미안.”
눈치 빠른 데미안이 뭔가를 알아채기 전에 작은 몸을 힘주어 껴안은 로위나가 아이의 이마에 쪽 입 맞췄다.
“간지러워! 근데 우리 어디가?”
시무룩해진 것도 잠시, 익숙한 애정 표현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 데미안이 순진무구한 눈으로 엄마를 바라봤다.
“전에 말했던 엄마 친구네?”
“응.”
“난 그 아저씨 싫은데…….”
“그 이야긴 이미 끝났잖아.”
쓰게 웃은 로위나가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을 묵묵히 바라보던 제녹이 그녀의 등 뒤에서 나직하게 헛기침을 했다. 암묵적인 신호에 로위나는 접었던 무릎을 폈다.
“엄마 이제 가야 해.”
“어딜?”
이해를 하지 못한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응…, 엄마는 다른 객실에서 가. 데미안은 이 아저씨랑 같이 가면 돼. 우리는 목적지에 내리면 다시 만날 거야.”
“싫어!”
애틋했던 모자 상봉이 끝났음을 눈치챈 데미안이 성난 얼굴로 로위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데미안.”
“싫어! 엄마 그 아저씨랑 같이 가는 거야? 날 두고?”
본능적인 깨달음이었다. 화들짝 놀란 로위나가 얼어붙은 사이 데미안이 떼를 쓰며 팔에 힘을 주었다.
“싫어. 안 돼. 나랑 가. 그 아저씨랑 가는 거 싫어.”
“데미안!”
“그 아저씨 무서워. 엄마를 데려갈 거 같아. 싫어.”
눈물을 글썽인 데미안이 답지 않게 떼를 썼다.
평소 같지 않은 아들의 모습에 굳은 것도 잠시, 입 안을 깨문 로위나가 제 허리를 감싸 안은 손을 떼 냈다.
“엄마…….”
“얌전하게 굴어야지, 데미안. 지금 아저씨 앞에서 뭐 하는 거야?”
울먹이는 데미안의 얼굴에 가슴이 찢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무르게 나간다면 킬리언을 자극하는 셈이 됐다. 그녀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아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했다.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 했다.
“제녹 씨.”
“예.”
조용한 부름에 고개를 끄덕인 제녹이 데미안의 뒤에 서 있던 유모에게 눈짓했다.
“싫어! 이거 놔! 엄마 나 이거 다 필요 없어. 엄마!”
“도련님…, 진정하세요. 제가 재밌는 거 보여 드릴게요. 네?”
“이거 놔!”
소리치는 아들을 뒤로한 채 로위나는 도망치듯 이등석 객실을 빠져나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발목에 무거운 족쇄를 단 듯 무거웠다. 아들의 울음소리가 귀 안쪽에 달라붙어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멈추지 않고 달려가던 걸음은 일등석 객차 입구에서 멈췄다. 객차의 문을 연 제녹에게 로위나가 또박또박 말문을 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
“데미안을 잘 부탁드려요.”
이미 다짐을 받았지만 안심되지 않았다.
“물론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거예요. 데미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죽음조차 불사한 얼굴이었다. 제녹이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도 모시는 주인의 하나뿐인 아드님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믿으셔도 됩니다.”
몇 번이고 확답을 받고 나서야 로위나는 일등석 객차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교수대로 걸어가는 사형수의 얼굴이었다.
* * *
두 번 노크한 제녹이 나직하게 객실 안의 공작에게 고했다.
“저하.”
“…….”
“미스 필로네를 모셔왔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조심스레 문을 연 제녹이 한 걸음 물러섰다.
크게 심호흡한 로위나가 객실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달칵 닫혔다. 널찍한 일등석 객실 안은 냉기만 가득했다. 바닥만 내려다보던 로위나에게 싸늘한 지시가 떨어졌다.
“앉아요.”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대답 대신 맞은편 문 쪽으로 멀찍이 앉았다. 창가 쪽에 앉아 신문을 읽던 킬리언이 눈썹을 꿈틀댔다.
“이런 식으로 반항하겠다?”
전이였다면 나서서 무릎 꿇었을 목소리였다. 로위나는 심기 불편한 그의 한 마디에 오 년 전 마차 안에서의 밤을 생각했다.
입으로 그의 장갑을 벗겨 내던 날.
많디많은 날 중 하나였다. 철저하게 그에게 굴려지던 나날들.
눈에 휘둥그레질 정도로 비싼 드레스를 입고 집 한 채 값인 목걸이를 걸고 외국의 장인이 만든 가방과 구두를 신어도 오 년 전의 그녀는 비참한 노예였다.
마음도 몸도 묶인 이 남자의 노예.
“…그럴 리가요. 제 주제를 아는걸요.”
사랑에 스스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던 날들이었다.
멍청하고 어리석었다. 반면 눈앞의 남자는 여전히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견고하고 단단했다. 지난 오 년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많이 강해졌다 생각했는데도 마주 앉아 있는 것조차 숨이 막혀 왔다.
그저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뿐인데도 몸이 저절로 긴장했다. 등줄기를 뻣뻣이 세운 로위나가 느릿하게 덧붙였다.
“집중하시는 데 방해가 될 것 같아 떨어져 앉았을 뿐이에요.”
담담한 대답에 킬리언이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침묵이 객실 안에 내려앉았다. 부우우, 긴 굉음을 내뿜은 기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신문을 접은 킬리언이 그녀를 바라봤다.
“주제 파악을 한다고 했는데 그렇지도 않군요.”
“…네?”
“미스 필로네가 그 정도로 내게 영향이 있을 것 같습니까?”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변함없는 잔인함에 로위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모습에 입매를 틀어 올린 킬리언이 덧붙였다.
“아. 한 가지. 애새끼를 떼어 놓고 온 건 칭찬해 주죠.”
“…….”
“가는 내내 그렇게 입 다물고 있어요.”
긴 다리를 꼰 킬리언이 창틀에 팔꿈치를 얹고 손바닥을 베개 삼아 턱을 괴었다.
애새끼.
데미안을 감히 그렇게 부르다니. 이런 남자가 내 아들의 아버지라니.
로위나는 희게 질린 손끝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일상에 갑자기 쳐들어와 짓밟고 다시 지옥으로 끌고 가는 주제에 평온해 보이는 모습이 죽이고 싶을 만큼 얄미웠다.
그간 추레해지고 초췌해진 자신과 다르게 잘 먹고 잘 살았을 남자의 과거도.
분노는 결국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그전에 한 가지 물어도 될까요?”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킬리언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기로 한 듯했다. 그럼에도 로위나는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공작님께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다면.”
“…….”
“왜 저를 다시 찾아오셨죠?”
킬리언이 천천히 눈을 떴다. 조용한 경고에도 머릿속을 가득 메운 충동이 통제되질 않았다. 잇새로 내뱉듯 분노 가득한 물음이 이어졌다.
“왜 제집에 쳐들어와서 잘 살고 있는 제 아들과 저를 끌어내서 록포드로 데려가시는 건… 아!”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틈 사이로 킬리언이 속삭였다.
“내가 말했잖아.”
“…….”
“내가 버린 쓰레기는 내가 줍는 게 맞다고. 입 다물라고도. 아둔해서 두 번 말해야 하나?”
“…그래서.”
전혀 이해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저 변덕이겠지. 결론 내린 로위나가 두 손으로 제 턱을 움켜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일순 닿은 손이 멈칫한 것 같았지만 착각일 터였다.
“그래서 언제 다시 버려 주실 건데요?”
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입 다물라는 경고였다. 개의치 않고 로위나는 혀를 놀렸다.
“저는 언제까지 공작님 곁에 있으면 될까요? 내 아들을 볼모로 삼은 공작님께 언제까지 휘둘리면 되죠?”
그가 원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언젠가 다시 버려 주기만 한다면. 그리고 눈앞의 남자가 두 번 다시 그녀와 데미안의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팽팽히 당겨진 실처럼 아슬아슬한 공기가 두 사람을 에워쌌다. 그녀의 날 선 말에 유리알처럼 색소 옅던 벽안이 짙어졌다.
여과 없이 읽히는 분노에 로위나는 속으로 조소했다. 곧 나를 잔인하게 짓밟겠지. 하지만 화를 억누르듯 입술을 달싹인 킬리언은 더운 숨만 내쉬었다.
그답지 않은 행동에 로위나가 놀란 순간, 금방이라도 목을 조를 듯 노려보던 킬리언이 흥분으로 벌어진 입술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