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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22화 (22/120)

22화

“데미안이라고 했던가요.”

“…….”

“누가 보나 의심할 여지 없이 저하의 아이더군요.”

짐은 핑계였다. 부러 입에 담지 않은 아들 이야기에 로위나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조금… 아니 많이 놀랐습니다.”

이어진 말에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로위나가 결연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데미안에게… 손을 댄 건 아니겠죠?”

예상치 못한 적의에 제녹은 어안이 벙벙해져 잠시 말문을 닫았다.

오 년 전엔 그저 예쁜 인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여자였다. 웃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장식품에 불과했던.

애초에 끝이 정해진 관계였다. 사람들 앞에서 이 여자가 처절하게 버려지던 날, 사람을 시켜 그녀의 짐가방에 몰래 돈을 넣어 둔 건 얄팍한 동정심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눈앞의 여자가 몰래 아들을 낳고 키웠다는 걸 알았을 때 귀를 의심했다. 그저 순하고 예쁘기만 한 여우 같던 여자는 마치 발톱을 드러낸 암고양이로 변해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의 얼굴을 할퀼 것 같은 눈빛에 제녹은 속으로 감탄했다.

“대답해요.”

이어진 정적에 날을 세운 로위나가 채근했다.

“내 아이 어디 있어요.”

“도련님은 제가 따로 모셨습니다.”

“직접 내 눈으로 봐야겠어요.”

“미스 필로네. 진정하세요.”

흥분으로 밭아진 호흡에 제녹이 차분하게 그녀를 얼렀다.

“난 그저 당신을 도우려는 것뿐입니다. 만약 공작님이 보신다면…….”

“…….”

“감당하기 힘드실 겁니다. 아닙니까?”

조용한 물음에 소름이 전신을 훑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로위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킬리언 데본셔는 평소 감정의 변화가 크지 않은 대신, 한 번 분노하면 끝이 없는 남자였다.

입술을 파르르 떠는 로위나를 향해 제녹이 달래듯 말을 끝맺었다.

“그 때문에 도련님은 제가 따로 데려갔습니다. 경험 많은 유모를 붙였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제가 어떻게 믿죠?”

좀 전보다는 누그러진 말투로 로위나가 물었다.

눈앞의 남자는 오 년 전, 유일하게 정부인 자신을 편견 없는 눈으로 바라봐 준 사람이었다.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또 한 사람과 달리, 친절했고 시종일관 깍듯했던 남자.

그러나 결국 공작의 사람이었다. 불안함을 읽었는지 부드럽게 표정을 푼 제녹이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미스 필로네.”

“…….”

“약속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이를 해칠 일은 절대 없습니다. 공작 저하께서도 그럴 리 없으시고요.”

진중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진심 어린 눈빛에 크게 오르내리던 로위나의 어깨도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다만 제가 도련님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합니다. 적어도 공작 저하께서 자연스레 친아들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실 때까지는요.”

로위나는 데미안이 닫은 문을 응시하던 싸늘한 눈을 떠올렸다.

당장이라도 문고리를 돌리고 숨어 있는 아이를 끌어낼 것처럼 위협적인 눈빛이었다.

협박이나 다름없는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그 이유가 가장 컸다. 혼자였다면 창밖으로 몸을 내던져서라도 그에게서 도망쳤을 것이다.

“기차에서 잠시 볼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도련님은 저와 같은 이등석 객실에 타실 겁니다.”

한참을 말이 없던 로위나가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알았어요. 믿을게요.”

그제야 빙긋 미소한 제녹이 그녀를 마차로 안내했다.

그의 손을 잡아 마차에 올라타며 로위나는 마지막으로 몇 년간 일했던 공장을 뒤돌아봤다.

―제레미… 디쉬라면…, 유명한 소설가?

―네. 절 키워 주신 외삼촌이에요. 아마 거처를 옮기셨을 수도 있지만… 제가 보고 싶어 한다고. 많이 그리워한다고 연락해 주실 수 있을까요? 혹시 모르니 주소는 헤리엇의 집으로요.

―그럼. 얼마든지. 편지할게.

헤리엇에게 그런 부탁을 한 것은 벗어날 방도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 이상 킬리언에게 더는 휘둘릴 수 없었다. 다시 버려지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데미안이 상처받는 건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자존심과 죄책감 때문에 애써 피했던 외삼촌에게도 뻔뻔하게 연락할 수 있었다.

오 년 전 그의 옆자리에 당당히 서길 기대했던 여자는 오래전에 죽었다. 그날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위나는 이제 현실을 직시했다.

킬리언이 만에 하나 친자로 인정한다 해도 결국 데미안은 사생아였다. 정식 후계로도 인정받을 수 없었고 귀족 도감에 이름도 올릴 수 없었다.

데미안이 정식 후계가 되는 방법은 킬리언이 그녀를 정실부인에 앉히는 것뿐이었다. 그럴 일도 없거니와 그 자리를 준다 해도 이젠 그녀 쪽에서 사양이었다.

언제 어떻게 버림받을지 전전긍긍하며 그의 비위나 맞추며 살 수 없으니까. 너절한 현실이 사치스러운 지옥보다는 나은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녹의 제안은 오히려 고마웠다. 그에게 벗어날 방도를 찾는 동안 잠깐의 유예라도 절실했으니까.

* * *

안나 에든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버려진 빌라 뒷골목이었다.

“독살입니다. 윗입술이 찢어져 피가 나는 걸 보아 몸부림치다가 억지로 마신 것 같습니다. 그외 여러 정황을 살폈을 때 면식범보다는 초면일 가능성이 매우 크고, 우발적인 범행보다는 계획적인 범행일 가능성이 큽니다. 윗선에 제출할 보고서에도 그렇게 쓸 예정입니다.”

냉기 가득한 검시소에서 시체를 확인한 킬리언이 뒤돌아 궐련을 입에 물었다. 능숙하게 필터 끝에 불을 붙인 장의사가 덤덤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동거하던 남자가 용의자로 지목될 것 같습니다. 함께 도망쳤다던 근처 주민들의 증언도 있었고요.”

장의사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온 정신을 기울였다.

막 퇴근한 그의 집 문을 급하게 두드리던 남자들은 이 도시에 새로 군림하게 된 길리터스 조직원들이었다. 화들짝 놀라 얼어붙은 그를 향해 지시 하나가 떨어졌다.

―시체 하나를 부검해 주시오. 가급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경찰에게도 알리지 않고 극비리에 검시소로 옮겨진 시체는 재빠르게 부검됐다. 조수도 없이 시체를 부검하며 장의사는 조금의 실수도 없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이 도시를 지배하던 조직이 하룻밤에 대체되던 날을 떠올렸다. 틈만 나면 쳐들어와 자릿세와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갈취해 가던 놈들의 우두머리가 이마에 총알이 박힌 채 검시소에 들어왔을 때, 그는 남몰래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한편으론 공장 몇 개 외에 별 볼 일 없는 이 작은 도시에 새로 자리 잡은 세력이 의아했다.

소문에 의하면 길리터스는 이런 곳은 쳐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세력을 키운 신흥 조직이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장의사는 그 이상 캐묻지 않을 정도로 현명했다.

“그 남자도 시체로 발견될 겁니다.”

가만히 장의사의 말을 듣고 있던 킬리언이 궐련을 재떨이에 비벼 껐다.

“예?”

“돈을 모조리 챙겨 도망치려고 안나 에든을 죽이고서 자살한 겁니다.”

조도 낮은 조명 아래 꺼진 궐련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잠시 벗었던 검은 가죽 장갑을 다시 낀 킬리언이 검시소의 문고리를 잡았다.

“살해 방식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아…….”

넋이 나간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보던 장의사가 뒤늦게 뜻을 눈치채고 허리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누군가 로위나 필로네를 노리고 있다. 그것도 아주 간교한 방식으로.

다시 관심을 두자마자 서서히 목을 조르며 다가오는 그림자에 킬리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안나 에든을 죽인 건 그 경고일 가능성이 컸다.

검시소를 나오며 그는 자신이 그 여자에게는 재앙과도 같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제녹은.”

마차에 올라탄 킬리언이 등받이에 깊게 몸을 묻었다. 그의 모자를 받아 든 경호원이 바로 대답했다.

“제녹 님은 미스 필로네를 모시러 갔습니다. 기차역으로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한 킬리언이 읽다 만 신문을 집어 들었다. 주인의 언짢은 심기를 눈치챈 경호원이 조용히 커튼을 걷었다.

“아이는.”

“제녹 님께서 따로 객실을 잡았습니다.”

“내 눈에 띄지 않도록 해.”

“예.”

오 년 전, 간도 크게 그를 배신한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낳은 여자였다.

엄마라고 부르던 나직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빌라 전체를 불태우고 싶었다. 그 안에 아이와 로위나 필로네를 처넣고 질식해 죽어가는 걸 봤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건 그의 두통 때문이었다.

두통만 해결되면 내쫓던가, 오 년 전에 못 한 일을 마무리하면 그만이었다.

―돈을 던져 주며 날 버렸던 거, 기억 안 나요?

원망 어린 눈을 떠올리자 또다시 두통이 밀려들었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달리기 시작하자 그는 차라리 눈을 감았다. 속이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울렁였다.

“엄마!”

객실의 문을 열자마자 데미안이 밝은 얼굴로 로위나에게 안겼다.

“데미안…….”

낯선 남자들에게 끌려와 울고 있을 줄 알았던 아이는 생각 외로 들뜬 반응이었다. 아연해하는 로위나에게 데미안이 무언가를 들어 보였다.

“엄마. 이거 봐!”

그것을 보는 순간 로위나는 젖은 숨을 들이켰다. 데미안이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기차 모형 장난감이었다. 몇 번이고 장난감 가게 진열대 앞에 붙어 서서 군침만 흘리던 장난감.

“이거 말고도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어. 아저씨가 내 선물이래! 이 옷도!”

로위나의 시선이 장난감에서 데미안의 옷으로 향했다. 아까는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아동용 정장에 가죽구두를 신은 데미안은 누가 봐도 귀한 도련님이었다.

“어때? 근사해? 잘 어울려?”

“응. 엄청. 멋있다… 우리 아들.”

마치 다른 아이 같은 모습에 로위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난 오 년. 열악한 환경에서 먹고 사는 데 급급해 변변한 옷 한 벌 사 입히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생전 처음 겪는 사치에 기뻐하는 아들의 모습에 로위나의 가슴에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시시각각 변하는 엄마의 얼굴에 슬그머니 장난감을 내려놓은 데미안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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