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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21화 (21/120)

21화

“아……!”

도망은 짧았다. 그녀의 등 뒤로 단단한 벽이 닿자, 토끼몰이를 하듯 느긋하게 거리를 좁힌 그가 멈춰 섰다.

“읍……!”

고개 숙인 그가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다가온 입술에 몸부림쳤지만 아랫입술을 깨물리자 고통에 입을 열 수밖에는 없었다.

“하…….”

오 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당연하다는 듯 제 것을 만끽한 뒤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쓴 궐련 맛에 목 끝까지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차오른 느낌이었다. 로위나의 눈에 불이 일었다.

짝.

다음 순간, 그가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바로 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보이는 광기에 로위나는 짧게 숨을 삼켰다.

“선택해요. 미스 필로네.”

미친… 미친 사람.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럽게 웃은 킬리언이 로위나의 뺨을 검지로 툭툭 건드렸다.

“다시 내 정부가 될 건지, 아니면 아이와 길거리에서 같이 죽을 건지.”

머리 위로 내려앉은 절망에 로위나는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만들겠다는 통보였다.

정부가 되거나, 아이와 길거리에서 죽거나.

연이은 충격에 정신이 아찔했다. 간신히 떨리는 숨을 가다듬은 로위나가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대체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예요?”

할 수만 있다면 이 남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어떻게 그리 잔인하게 버린 여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찾아왔는지.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왜 그러는 건지.

“대체 왜! 한 번 버렸으면서! 이제 와서!”

주먹을 쥔 로위나가 그의 가슴을 때렸다. 고작 간지러울 정도인 힘에 킬리언은 가만히 서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냥.”

분노는 점차 흐느낌으로 변했다. 목 끝까지 차오른 흥분을 간신히 가라앉힌 로위나가 간절히 물었다.

“그냥 가주면 안 되나요?”

애처로운 눈빛이었지만 킬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유라도 알려줘요. 제발.”

“이유가 필요한가요?”

정처 없이 흔들리는 초록색 눈동자에 킬리언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로위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맥이 풀릴 정도로 간단명료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짧고도 확실한 이유였다. 건조한 목소리에 로위나는 천천히 손을 내렸다. 여전히 이 남자는 자신밖에는 몰랐다.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불붙듯 일어난 감정이 씻기듯 사라졌다. 온몸의 힘이 빠지고 익숙한 체념이 찾아왔다.

“알았어요…, 일단 오늘은 돌아가고… 정리를…….”

“…….”

“정리할 시간을 줘요.”

“언제까지.”

“일주일…….”

“내일.”

“…….”

“내일 점심에 다시 오지. 그때는 아이도 같이 있어야 할 겁니다.”

인질로서 끝끝내 데려가겠다는 말이었다. 로위나는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아이의 얼굴을 본 그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제 아들을 낳고 키웠다고 분노할까? 아니면…….

생각이 계속 가지를 뻗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결국 사고하길 포기한 로위나가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러운 대답에 킬리언이 뺨을 그러쥔 손을 거뒀다.

뒤돌아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로위나가 침대에 쓰러지듯 앉았다. 인기척이 멀어진 걸 눈치챈 데미안은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로위나에게 안겼다.

“엄마……!”

“데미안…….”

“괜찮아? 저 사람은 누구야?”

“저 사람은…….”

아이의 질문에 로위나의 말문이 턱 막혔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라 말하기는 싫었고,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엔… 너무 닮은 얼굴이었다.

한참을 입 안으로 대답을 곱씹던 로위나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엄마 예전… 친구야.”

“친구……?”

“응. 정말 부자라서 도와준대. 앞으로 우리랑…….”

말을 할수록 목이 메었다. 진창으로 다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거미줄에 걸려 버둥대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무너져 누군가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있었다.

오 년 전과는 다르다. 강해져야 한다.

로위나는 아이 앞에서 결코 울 수 없었다. 간신히 입매를 끌어 올린 로위나가 아들을 끌어안았다.

“우리랑 같이 살 거야. 매우 부유한 분이거든… 엄마의 사정을 듣고 옛정으로 도와주신대.”

“싫어!”

“응?”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놀라 눈을 깜박이는 로위나에게 매달린 데미안이 고개를 저었다.

“난 엄마랑 둘이 사는 게 좋아!”

“데미안…….”

아이는 쉽게 엄마의 감정에 물든다던 헤리엇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로위나가 데미안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갖다 댔다.

“여기랑 비교할 수도 없는 곳이야. 더 좋은 옷을 입을 수 있고, 네가 좋아하는 장난감과 사탕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부드러운 목소리에도 몸부림치는 데미안이 로위나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래도 싫어. 엄마랑 나 사이에 누가 있는 게…….”

“엄마한텐 너밖에 없어.”

데미안의 양팔을 붙든 로위나가 다시 한번 말했다.

“정말 너밖에는… 너밖엔 없어. 엄마는.”

세상에 킬리언 데본셔가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부른 배를 안고 이리저리 떠돌던 시절을 기억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을 때 그녀를 끝끝내 붙든 건 바로 배 속의 아이였다. 킬리언은 그녀를 죽였지만, 데미안은 그녀를 살렸다.

그때부터 데미안은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정말……?”

“그럼. 우리 아들보다 더 사랑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속삭이듯 말한 로위나가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 * *

다음 날 갑자기 공장을 그만둔다는 로위나의 말에 사람들은 놀란 눈치였다.

“갑자기? 왜?”

“안 그래도 안나 일로 분위기 뒤숭숭한데…….”

“정말 죄송해요. 후임자 올 때까지는 있어야 하는 건데. 급한 사정이 생겨서요.”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쩝 혀를 다신 동료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염치가 없어 로위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침묵에 느릿하게 시선을 올리자 다채로운 꽃다발이 보였다.

“이건…….”

“다 같이 준비했어. 여태까지 고생했다고.”

놀란 눈을 한 로위나에게 미소한 동료들이 그녀에게 꽃을 안겼다.

“갑작스레 떠나는 건 섭섭하지만, 그래도 그동안 우리 대타도 잘 맡아 주고 궂은일, 험한 일 앞장서서 해 줘서 고마웠어. 레베카.”

“맞아. 나도 지난 사 년간 이래저래 신세 많이 졌어.”

“나도.”

하나둘 쏟아지는 감사 인사에 가슴 안쪽으로 따뜻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눈시울이 붉어진 로위나가 꽃다발을 꼭 안았다.

“그만두는 건 어떻게 알고…….”

“내가 말했어.”

“…헤리엇?”

모여든 공장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온 헤리엇이 로위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작게 고백했다.

“사실 내가 네 집을 알려 줬어.”

“네…? 그게 무슨…….”

혼란스러운 말이었다. 눈만 크게 뜬 로위나를 향해 옅게 웃은 헤리엇이 달래듯 말했다.

“미안해. 네 말을 어겨서. 하지만…, 레베카… 아니 로위나.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지만, 그 사람은 널 사랑하는 거 같았어.”

헤리엇이…….

어떻게 그가 집으로 쳐들어왔는지에 대한 전말이 밝혀진 순간이었다.

“네가 행복하게 살길 바라. 로위나. 언제나 기도할게.”

진심 어린 말에 로위나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가까스로 입꼬리를 올렸지만, 미소 비슷한 걸 짓기도 전에 표정이 흐려졌다.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결과가 어찌 되었건. 많은 말을 삼켜낸 로위나가 작별 인사를 했다.

“아니에요. 그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감사하기는. 모쪼록 네가 행복하게 살길 바라. 로위나. 혹시 도와줄 게 있다면 꼭 말하고.”

헤리엇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애틋한 인사가 끝나고 멀어지던 로위나가 뒤를 돌았다.

“헤리엇.”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헤리엇이 놀란 눈을 했다.

“응?”

“사실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있어요.”

* * *

정오 즈음 데리러 오겠다는 킬리언의 말 때문에 로위나는 마지막 근무조차 마치지 못했다.

아침 일찍 터덜터덜 혼자 공장을 나오자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들이 곳곳에 보였다. 도망을 대비해 미행쯤은 붙여 놨으리라 예상했던 터라 로위나는 놀라지 않았다.

그때 한 남자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미스 필로네.”

탁한 금발에 검은 눈동자. 호리호리한 키에 조금 날렵한 눈매. 로위나는 남자를 한눈에 알아봤다.

“…제녹 씨.”

오 년 전 몇 번 마주했던 킬리언의 측근이었다. 말을 많이 섞어 본 것도 아니고 그저 눈인사만 했던 사이였다.

서로 과거를 아는 상황에서 잘 지냈냐는 물음은 무의미했다. 거두절미하고 제녹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마차를 대기시켰으니 함께 가시지요.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이요? 아, 아직 시간이 남았잖아요. 그리고 짐도 가져와야 하고…….”

“모조리 버리라 하셨습니다. 입고 있는 것 외에는.”

주어는 생략됐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 다 알았다.

“…그런가요.”

공작의 독단적인 행동에도 로위나는 이젠 놀랍지 않았다.

다만 아들이 걸렸다. 로위나가 뭐라 말을 주워섬길 틈도 없이 제녹이 허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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