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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20화 (20/120)

20화

―하나 골라요.

정신병원 입원서류와 합의이혼 신청서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희게 질린 얼굴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설명했다.

―이혼하지 않겠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나 또한 히스테릭과 잦은 외도, 자살 시도까지 한 정신 나간 아내를 방치할 수는 없어서.

에둘러 말했지만 이혼하지 않는다면 일평생 정신병원에 처박겠다는 협박이었다.

덜덜 입술을 떠는 상대와 달리 혈색 하나 바뀌지 않은 얼굴로 킬리언은 손목시계를 흘깃 내려다봤다. 분 단위로 움직이는 그에게 이런 미친 짓거리에 장단을 맞춰 주는 것은 시간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일과도 같았다.

―당장 고르기 어렵다면 변호사를 통해 알려요.

따분한 얼굴로 일어선 킬리언이 뒤를 돌았다. 등 뒤로 그가 내밀었던 서류 두 개가 날아왔다. 아무렇지 않게 그대로 나가려는데 잊고 있던 이름 하나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로위나 필로네…….

―…….

―그 여자한테도 이렇게 잔인했나요?

지난 오 년간 떠올리지 않았던 이름이었다. 오래전 버린 여자였다. 무시해야 했다. 그러나 잠시 움직일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불쾌감에 킬리언이 작게 미간을 구겼다.

―무슨 헛소리지?

―부정할 생각 말아요. 종종 잠꼬대로 그 이름을 불렀잖아! 나 몰래 숨겨 두고 있죠? 그런 거죠?

―…의부증까지. 역시 제정신이 아니군.

이름을 불러? 잠꼬대로?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였다. 그는 문손잡이를 돌렸다. 침실을 나와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눈앞이 핑 돌았다.

“저하!”

다급히 다가온 수행원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때부터였다.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현기증과 두통에 시달렸다.

―당신도 언젠가 그대로 돌려받게 될 거야.

악에 받친 얼굴로 중얼거리던 전 아내의 얼굴도 이제는 흐릿했다.

로위나 필로네.

저주처럼 얽맨 이름을 지우려 애를 썼다. 그 무렵 제녹이 제안했다.

―차라리 다시 한번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누구를 말입니까.

―미스 필로네를요. 다시 보게 된다면 두통도 멎지 않을까요?

두통이 밀려든 건 그 이름을 오랜만에 다시 들었을 때였다. 일리 있는 이야기라 여겼다. 에셀우드로 귀국하기 전 먼저 제녹을 보냈다.

―수소문한 결과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일자리라곤 공장 몇 개가 전부인 외진 도시에 정착했더군요. 필립이라는 의사가 수상해 미행해 본 결과, 웬 방직 공장에 다니는 여자 집을 찾았습니다. 쌍둥이 아이가 있고 남편은 해외에 있다더군요.

쌍둥이 아이. 남편.

누군가 둔기로 뒤통수를 휘갈긴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살기가 눈앞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결혼을 해? 윌리엄 제넌이란 남자는 분명 죽였다. 그사이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린 건가.

오래전 버렸다 해도 제 정부였던 여자이다. 비참하게 살기를 원치 않아 두둑이 돈을 주긴 했지만 행복한 모습도 바라진 않았다.

―직접 봐야겠습니다.

―저하……?

제 머릿속을 헤집고 마음을 헝클어뜨리는 여자에게 분노가 일었다. 미련 없이 돈을 던져 주고 버린 여자라는 기억은 그의 머릿속에서 깡그리 지워졌다.

만류하는 손을 뿌리치고 직접 문을 두드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집에 혀를 차기도 잠시 문이 열렸다.

그러나 문을 연 여자는 전혀 다른 여자였다.

―누, 누구시죠?

―저하!

싸늘한 눈이 로위나가 아님을 알아본 동시에 여자의 손에 들린 칼을 발견한 수행원이 총을 꺼내 들었다. 시퍼런 총구에 경악한 여자가 주저앉았다.

―꺄아아악!

죽음이 목전에 있었다. 제 머리를 감싼 여자가 뱀의 아가리 앞에라도 선 듯 덜덜 떨었다. 뒤에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 목소리가 들렸다.

어떡할지 묻는 수행원의 눈빛에 킬리언은 여자를 부축해 일어서게 했다.

―기, 길리터스 씨… 인가요? 역시 레베카가 빚을 져서 잡으려고…….

킬리언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헤리엇이 더듬더듬 물었다. 공포에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킬리언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여자의 머릿속을 메운 오해가 읽혔다. 길리터스라면 제녹의 성씨였다. 공작의 작위로 뒷세계의 전면에 나설 수 없어 앞으로 내밀어둔 이름이기도 했다.

레베카라는 건 아마 로위나의 가명일 터다.

빠르게 상황파악을 마친 킬리언이 옅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해야겠군요.

―예……?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헤리엇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모자를 벗자 어째서인지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좋은 제안을 할까 합니다. 미세스 디킨슨.

이후는 순조로웠다. 모든 게 계획한 대로 이뤄지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히던 두통도 에셀우드로 돌아오고 여자의 행방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많이 잦아들었다.

남은 건 이제 짜 놓은 판을 거두는 것뿐이었다.

“저, 저하!”

마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선 때였다. 말을 탄 수행원 하나가 급하게 마차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지?”

제녹의 물음에 숨을 헐떡이며 수행원이 보고했다.

“귀금속점에 반지를 팔았던 여자가… 죽은 채로 발견됐습니다!”

로위나가 위험했다.

둘 중 하나였다. 여왕이 벌써 냄새를 맡았거나, 혹은 내부에 적이 있거나. 이를 악문 킬리언이 마차를 박차고 나와 방금 전 수행원이 타고 온 말에 올라탔다.

“저하!”

그 뒤를 제녹이 급하게 따랐다.

* * *

“로위나.”

머릿속이 새하얬다. 살면서 이토록 필사적인 적이 없었다. 그는 악마라도 본 듯 뒷걸음질 치는 여자를 다시 한번 불렀다.

“로위나.”

그가 한 걸음 다가갈수록 로위나는 두 걸음씩 멀어졌다.

조금 초췌해졌을지언정, 기억 속 얼굴 그대로였다. 허리춤까지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금발과 흰 피부. 세상 풋풋한 것들은 죄다 모아 놓은 듯한 커다란 초록 눈동자에 오뚝한 코. 붉은 입술까지.

“말도 안 돼… 싫어…….”

정신없이 눈으로 여자의 얼굴을 탐하던 것도 잠시, 들려온 중얼거림에 터질 듯이 가파르게 뛰던 심장이 착 가라앉았다.

먼저 헤리엇 디킨슨을 이용해 좀 더 안전한 곳에 머물게 하고 천천히 접근한다는 초기의 생각도 잊었다.

이 여자가 차갑게 식어 있다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어 미칠 듯이 질주했는데, 이 여자에게 자신은 그저 악마이고 사신이었다. 또다시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분노는 담담한 목소리가 되어 그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그때 준 돈이 적지도 않은데 참 구질구질하게 살았군.”

불청객이 쳐들어온 건 헤리엇의 집에서 다시 돌아온 직후였다. 노크 소리에 문을 열기 무섭게 드러난 남자의 얼굴에 로위나는 심장이 멎었다.

머릿속이 표백된 듯 새하얬다. 오랫동안 불안해하고 두려워한 악몽이 눈앞에 닥치니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집주인과 달리 불청객은 그대로 그녀와 아들의 집에 성큼 발을 내디뎠다. 쓰레기장을 보듯 좁은 집 안을 훑는 눈빛에 가슴이 찢어졌다. 아랫입술을 말아 문 로위나가 날을 세웠다.

“…말조심해요.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실내화로 갈아 신는 성의도 없이 들이닥친 킬리언이 카우치에 풀썩 앉았다. 품을 뒤적여 궐련을 꺼내 문 그가 대뜸 말했다.

“다시 시작해.”

……뭐라고?

머릿속이 표백된 듯 새하얘졌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눈을 깜박이던 로위나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당신…….”

“…….”

“돈을 던져 주며 날 버렸던 거, 기억 안 나요?”

“그래서야.”

“……뭐라고요?”

“내가 버렸으니 내가 주워야지.”

담백하게 대꾸한 킬리언이 긴 다리를 꼬고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앉았다.

그녀가 아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에 얼어붙은 사이, 그가 궐련 끝에 불을 붙였다. 매캐하게 퍼지는 담배 연기에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거 당장……!”

뒤늦게 정신 차린 로위나가 거칠게 궐련을 빼앗는 순간이었다.

끼이익.

안쪽에서 낡은 문이 열렸다.

“데미안!”

“엄마……?”

“문 닫아!”

살짝 보이는 아이에게 소리친 로위나가 아들을 그에게서 보호하려는 듯 문 쪽으로 이동하며 매섭게 침입자를 노려봤다.

“나, 나가요.”

로위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이 가파르게 뛰고 손이 벌벌 떨렸다.

얼굴을 봤을까? 그와 닮았다는 걸 알아챘을까?

사형선고를 앞둔 죄수처럼 파랗게 질려 있는 동안, 짧고 음산한 웃음소리가 그녀의 귀에 파고들었다.

“하하!”

“…킬리언.”

“조신하게 지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사이 혹까지 달았을 줄은.”

입매는 웃고 있었지만 로위나를 담은 시선은 흉흉했다.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방 안의 애새끼를 끌어내고 싶은 마음을 고스란히 내보인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새 남자라도 만났나 보군?”

가면을 바꿔 쓰듯 금세 살기를 지운 공작은 여전히 우아하고 여전히 완벽했다. 제게 성큼 다가오는 킬리언을 피해 로위나는 뒷걸음질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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