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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9화 (19/120)

19화

사탕을 쥐여 주자 데미안은 장을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싱글벙글한 얼굴이었다. 아이의 외투를 벗겨 준 로위나가 부드럽게 지시했다.

“먼저 씻고 있어.”

“응! 엄마는?”

“엄마도 들어갈게.”

고개를 끄덕인 데미안이 먼저 욕실로 들어갔다. 로위나 또한 외투를 벗어 걸이에 거는데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의아한 얼굴로 쪽지를 주워 들었다. 급하게 쓴 듯 휘갈겨진 글씨가 보였다.

레베카 부인에게.

필립 맥우드입니다. 갑작스러운 쪽지에 놀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많은 말은 할 수 없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당신을 쫓고 있습니다. 주변을 감시하는 것 같습니다.

부디 조심하세요.

등줄기가 섬찟했다.

쫓기고 있다.

시간이 멈춘 듯 얼어붙은 로위나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엔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치부했던 상황이었다.

필립 선생님은 이런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닐뿐더러,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 사람일까? 대체 왜? 이제 와서…….

머릿속이 이리저리 뒤엉켰다. 동시에 ‘주변’이란 단어에 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헤리엇. 로렌스. 로잘린.

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자 데미안이 욕실 문을 열었다.

“엄마?”

“데미안. 다시 옷 입어. 당장.”

“왜?”

“급한 일이야. 부탁할게.”

심각한 얼굴로 거듭 부탁하자 데미안은 더 묻지 않고 바로 옷을 다시 입었다. 아이의 손을 꼭 잡은 로위나가 옆집 문을 두드렸다. 마침 집에 있던 이웃이 문을 열었다.

“레베카?”

“필로메나. 정말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좀 할게요.”

“무슨 부탁?”

로위나의 뜬금없는 말에 이웃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유령이라도 본 듯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뭔 일이라도 있어요?”

“잠깐만 우리 아들 좀 맡아 줄 수 있어요? 금방 올 테니까…….”

필사적인 눈으로 로위나가 이웃의 어깨를 잡았다. 평소 예의 바르고 수줍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급하게 쫓기는 듯 급한 얼굴에 이웃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뭐… 어렵지 않지만.”

“엄마? 어디 가? 나 두고?”

“데미안. 잠시만 여기 있어. 얌전하게 말 듣고. 알았지?”

“어디 가는데?”

혼란스러운 건 어린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데미안이 울먹거리며 로위나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헤리엇 이모네 다녀올 거야.”

“금방 와야 해?”

“그럼. 걱정하지 마.”

이마에 쪽 입을 맞춘 로위나가 당부했다.

“여기 얌전히 있어야 해. 금방 올 테니까. 알았지?”

“…알았어.”

“착하다. 우리 아들.”

지독한 난산 끝에 낳은 아들을 로위나는 애틋한 눈으로 바라봤다.

지킬 게 없었던 전과 달리 지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야 할 것들이 많이 생겼다. 그중에서도 데미안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보물이자 분신이었다.

* * *

“헤리엇! 헤리엇!”

삯마차를 기다릴 수 없었기에 로위나는 헤리엇의 집까지 미친 듯이 내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현관문을 몇 번이나 두드리고 나서야 헤리엇이 문을 열었다.

“레베카?”

“괜찮아요?”

“세상에. 설마 집에서 여기까지 뛰어온 거야? 땀을 그렇게 흘리고… 그리고 괜찮냐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혹시… 혹시 누가.”

불안한 눈빛으로 로위나가 헤리엇의 어깨 너머를 훑었다. 평소와 같았다.

“누군가가 찾아오거나 위협하지 않았어요? 내 위치를 알려 달라고 하거나…….”

“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무 일도 없었어.”

“하…….”

당황한 대답에 안도한 로위나가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레베카!”

난데없는 상황에 마찬가지로 당황한 헤리엇이 쓰러지는 로위나의 팔꿈치를 잡아 일으켰다.

“대체 무슨 일이야? 응?”

“아니, 아니에요. 별일 없었으면… 됐어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로위나가 다리에 힘을 주고 제대로 섰다.

“혹시 모르는 남자가 나에 대해 물으면 모른다고 해야 해요.”

공포와 분노, 그리고 알 수 없는 슬픔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리고 죄송한데… 전의 제안, 못 받아들일 것 같아요. 사정이 생겨서 이사를 해야 할 것 같거든요.”

“뭐라고?”

대체 뭔 일이냐고 추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선 로위나가 빠르게 다시 집으로 달려갔다.

“레베카!”

멀어지는 뒷모습을 부르던 헤리엇이 천천히 뻗었던 손을 내렸다. 무겁게 숨을 들이마신 헤리엇이 뒤를 돌았다.

“정말… 레베… 아니, 로위나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건 아니죠?”

떨리는 물음에 누군가 느릿한 걸음걸이로 부엌에서 나왔다.

“물론입니다.”

낮고 깊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고저가 없어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오래된 카펫에서 남자의 얼굴로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리며 헤리엇은 손바닥에 배인 땀을 치맛자락에 닦았다.

가만히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통을 조일 정도로 위압적인 남자였다.

잠시 옆으로 곁눈질을 하자 수행원이 그녀에게 다가와 수표를 내밀었다. 데본셔 가의 인장이 적힌 백지수표였다.

“얼마든지 적어도 됩니다. 그간 내 여자를 보살펴 준 대가라고 생각하세요.”

내 여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은 단어에 헤리엇이 입술을 오므렸다.

“입막음 값도 여기 포함이겠죠……?”

대답 대신 수행원에게 모자를 건네받은 킬리언이 헤리엇의 옆을 스쳐 지났다. 그대로 집을 나가려는데 헤리엇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공작님!”

멈춰 선 킬리언이 뒤돌아서는 대신 고개만 돌렸다.

“역시 이 돈은 필요 없어요…….”

수행원의 주머니에 다시 백지수표를 넣은 헤리엇이 애원하듯 그의 등에 대고 부탁했다.

“로위나에게 필요한 분이니까, 그러니까 알려 드린 거예요. 절대 그 아이를 불행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데미안. 그리고 킬리언 데본셔.

눈앞의 남자를 마주한 순간 벼락처럼 내리꽂힌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데미안과 똑 닮은 얼굴.

로위나가 죽었다고 얼버무렸던 아들의 친부가 다름 아닌 신문으로만 접했던 그 록포드의 공작이었다니. 그런 대단한 남자가 자신의 집을 직접 찾아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신분 차이로 어쩔 수 없이 헤어졌고 다시 그녀를 찾아왔다는 말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로위나의 거처를 알려 준 건 여러 가지 이유에서였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그녀는 큰 빚을 진 것 같았다. 더불어 병약한 데미안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눈앞의 남자는 자신을 통해 그녀에게 집을 제공하기까지 하지 않았나.

그리고 무엇보다…….

저 남자는 로위나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해칠 일은 없다. 본능처럼 알아차린 사랑이 그녀에게 확신을 줬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소리 없이 문이 닫혔다.

헤리엇 디킨슨의 집을 나오자마자 킬리언은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제녹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이라도 데리러…….”

“조금 더 기다리죠. 깔아 놓은 덫도 있으니. 호텔로.”

말허리를 끊은 킬리언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포장되지 않은 거친 도로 위를 마차가 덜컹거리며 내달렸다.

“그간 충분히 지켜보지 않으셨습니까. 미스 필로네도 눈치챈 거 같은데 하루라도 빨리.”

“조용히.”

말허리를 끊은 킬리언이 창틀에 팔꿈치를 기댔다.

차갑게 내려앉은 공기에 제녹이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또다시 밀려든 두통에 눈을 감은 킬리언이 턱을 괴지 않은 다른 손으로 지팡이를 힘껏 움켜쥐었다.

헤리엇 디킨슨.

갈 곳 없는 로위나 필로네의 벗이 되어 주고 의지할 곳이 되어 준 건 고맙지만, 거기까지였다.

로위나. 로위나.

며칠 전만 해도 몰랐던 본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혀를 뽑아 버리고 싶었다. 백지수표를 기다렸다는 듯 받았더라면 어디 한군데 부러뜨리고 나왔을 텐데.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였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감을 짓이기며 킬리언이 화제를 돌렸다.

“클로에 에버딘은.”

“이혼 서류에 사인한 뒤 종적을 감췄습니다. 심어 둔 정보원 말로는, 요양을 위해 시골로 내려간 것 같습니다.”

“그게 신상에 좋겠지.”

오 년.

클로에 에버딘이 아버지의 은행에서 입지를 얻고 최대 주주가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 그 동시에 킬리언 데본셔가 에셀우드 전 항구에서 세력을 키우기 충분한 기간이었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해 손을 잡았고, 기간이 끝났으니 헤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해가 됐을 때, 클로에 에버딘은 그 견고한 선을 조금씩 넘기 시작했다.

―이렇게 부부가 되었으니, 진정한 부부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당신을 사랑해요. 킬리언. 난 당신 아내야!

같잖아 무시했던 게 발단이었다. 그 못지않게 담백할 거라고 생각한 클로에 에버딘은 꽤 집요한 여자였다.

틈이 날 때마다 침실로 들어오고 유혹했다.

그의 입장에선 지긋지긋한 아내였다.

눈길을 얻으려는 계획에 실패하자 보란 듯이 염문을 일으켰다. 그 뒤처리를 하고 신문사들의 입을 막는 건 그의 역할이었다.

―저, 저하! 공작 부인께서!

결혼생활의 마지막 날. 그녀는 손목을 그은 채 차가운 욕조에서 발견됐다. 비밀리에 들어온 의사와 간호사가 다급하게 공작 부인의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피를 많이 흘리지는 않아 위급한 상태는 아니었다.

아내가 눈을 뜬 날, 킬리언은 두 가지 서류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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