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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8화 (18/120)

18화

“엄…마.”

“……데미안.”

안쓰러운 얼굴로 등을 돌린 헤리엇이 데미안의 흑발을 쓰다듬었다.

로위나가 있을 땐 엄마를 독점하려고 드는 평범한 아이였지만, 로위나가 없을 땐 의젓하고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눈치도 빠르고 생각도 깊어 쌍둥이와 동갑임에도 형, 오빠 같았다. 그랬기에 이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엄마…….”

애절한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옷자락을 잡듯 베개를 꼭 쥔 작은 손가락을 보며 헤리엇이 속으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연민과 동시에 데미안의 친부가 궁금했다. 척 보아도 대단한 미남일 텐데. 만약 있었다면 이 아이가 이렇게 외로워하지 않았을 텐데.

“문 좀 열어 주세요!”

상념이 점점 깊어지는 가운데,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던 헤리엇이 눈을 번쩍 떴다. 현관문을 열자 기다리던 로위나가 아닌 익숙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필립… 선생님?”

“혹시 레베카 씨의 주소를 아십니까?”

“그건 갑자기 왜…….”

언제나 차분하고 단정했던 얼굴이 조급해 보였다. 손등으로 이마 위의 식은땀을 훔친 필립이 다급하게 말했다.

“얼마 전에 진료소에 웬 남자가 절 찾아왔습니다. 아마 레베카 씨를 찾는 것 같던데. 미행이 붙을까 싶어 며칠간 말하지 못했어요.”

“뭐라고요?”

헤리엇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체 무슨 일로요? 레베카와 무슨 관계길래…….”

“그건 모르겠습니다. 원래 이름이… 로위나 필로네일 거라고…….”

멍하니 필립의 말을 듣고 있던 헤리엇이 혹시나 하는 가정에 말허리를 끊었다.

“어쩌면 데미안의 친부일까요?”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 되고요.”

“무슨 말이에요?”

“데미안과 닮은 점이라곤 하나도 없더군요. 그리고…….”

잠시 주변을 살피던 필립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에야 소리 죽여 덧붙였다.

“그 ‘길리터스’였어요.”

“뭐라고요……?”

귀를 의심한 헤리엇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길리터스.

최근 몇 년 사이 떠오르기 시작한 이름이었다. 겉으로는 합법적인 도박장을 운영했지만 뒤로는 살인적인 이율을 자랑하는 대부업과 나라 수입금지 품목인 주류를 취급해 뒷세계에서 몸집을 불려 온 조직으로 암암리에 알려진 사업가였다.

“레베카 씨와 헤리엇이 같은 직장이라기에 혹시 몰라 퇴근길에 들른 겁니다. 조심하시라고 전해 주세요. 앞으로 진료는 필요할 때 연락하면 내가 직접 가겠다고도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어쩌면 거대한 빚이라도 진 걸까.

재혼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 때문일지도 몰랐다. 직감적으로 깨달은 헤리엇이 거듭 감사를 표했다. 필립을 보내고 나자 엄청난 충격에 차곡차곡 쌓였던 졸음이 모조리 달아났다. 헤리엇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다시 주방 의자에 앉았다.

길리터스. 로위나 필로네.

혼란스러운 단어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남자가 데미안의 친부가 아니라면, 혹시 빚쟁이일지도 모른다.

자연히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다. 남편이 죽고 배 속에 아이까지 가진 여자. 어쩌다 보니 궁핍한 생활로 빚을 져서 이곳까지 흘러든 거라면……. 그런 거라면 이름을 바꾼 것까지 모두 이해가 갔다.

만약 레베카와 데미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상상하는 것만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찾아오기엔 너무 늦은 밤이었다.

길리터스일지도 모른다. 남편은 광부 일로 외국에 나가 없는 데다 집 안엔 지켜야 할 아이가 셋이나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히 일어난 헤리엇이 부엌 선반을 뒤져 칼을 집었다.

끼익끼익. 천천히 마룻바닥을 걸은 헤리엇이 심호흡하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어젖혔다.

* * *

뜻밖의 소식에 로위나가 눈을 깜박였다.

“사라져요? 안나가요?”

“응. 레베카는 어디 짐작 가는 곳 없어요?”

“글쎄요……. 그렇게 친하진 않아서.”

“갑자기 다음 달 월급을 가불해 달라고 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내가 듣기로는…….”

말을 하던 동료가 목소리를 낮췄다.

“동거하던 남자가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남자랑 이곳을 뜬 거죠. 도박장에서 한탕 제대로 쳤는지도 모르죠.”

“그런…….”

불성실한 근무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로위나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 보이자 어깨를 으쓱해 보인 동료가 말을 끝맺었다.

“경찰을 불렀다고는 하는데 아마 금세 흐지부지되겠죠. 혹시 몰라서 물어봤어요. 사장님은 눈 뜨고 코 베인 격이라.”

“별일 아니라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빙긋 웃은 동료가 손을 들었다.

짐마차에 여러 사람을 태우고 가던 마부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마차에서 내리는 뒷모습을 향해 인사한 로위나 또한 머지않아 헤리엇의 집 앞에서 내렸다.

“엄마!”

게슴츠레한 눈으로 로위나를 알아본 데미안이 품에 뛰어들었다. 아이를 힘껏 끌어안은 로위나가 부드럽게 물었다.

“얌전히 잘 있었어? 이모 말 잘 듣고, 로렌스와 로잘린과도 안 싸우고?”

“응!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어깨를 으쓱한 데미안이 동의를 구하듯 헤리엇을 쳐다봤다. 잠시 관찰하듯 로위나를 바라보던 헤리엇이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고말고. 매번 말하지만, 데미안이 우리 쌍둥이들이랑 잘 놀아서 오히려 내가 편해.”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안심했다는 듯 웃은 로위나가 데미안을 안아 들었다.

한 손으로도 가뿐하게 안았던 게 어제 같은데, 아들은 이제는 두 팔로 안아야 할 정도로 쑥쑥 자랐다. 데미안이 점점 커 갈수록 뿌듯함과 동시에 걱정도 커져 갔다. 언제까지나 치안이 불안정한 곳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레베카.”

생각이 많은 눈으로 데미안의 뺨에 입술을 누르던 로위나가 헤리엇을 쳐다봤다.

“네?”

“데미안도 이제 많이 컸고… 둘이 그 집에 살기엔 너무 좁지 않아? 낡기도 했고 위험하기도 하고.”

“그건… 그렇죠.”

마음을 읽은 듯한 질문이었다. 로위나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헤리엇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사실 이번에 이 동네에 내가 아는 사람이 좋은 조건으로 세를 놓는다고 해서.”

“세를요?”

혹하는 이야기에 로위나가 되물었다.

“조건이 어떤데요?”

“집세가 지금 있는 곳의 절반 정도야.”

“세상에.”

생각지도 못한 희소식이었다. 술주정뱅이, 술집 여자들, 도박쟁이들이 판치는 로위나의 동네보다 이 동네는 안전하고 아이들도 많은 곳이었다.

“생각 있어?”

“너무 좋죠. 그런데 왜 그런 조건으로 세를 놓는 거예요?”

“아… 잠시 집을 비우는 거라서. 일 년 정도 될 거 같은데 빈집으로 두기 그래서 싸게 내놓는다고 하더라고. 지인의 지인한테만.”

“그렇구나…….”

“생각 있으면 내가 다리 놔 줄까?”

“네… 정말 감사해요. 헤리엇.”

헤리엇의 소개면 묻지 않아도 믿을 수 있었다. 어깨에 얹힌 무거운 짐 하나가 덜어진 느낌에 로위나는 거듭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런 그녀의 등 뒤로 멀찍이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헤리엇과 눈이 마주친 인영이 조용히 사라졌다.

곧 이사를 할 거라는 말에 데미안은 방방 뛰며 좋아했다.

“그럼 맨날 로렌스랑 로잘린이랑 놀 수 있어? 헤리엇 이모도 보고?”

“요새는 매일 봤는데도 그렇게 보고 싶어?”

“응! 외롭지 않잖아.”

불쑥 돌아온 대답이 가슴에 박혔다.

데미안은 아직 어린데도 떼를 쓰는 법도 없고 착한 아들이었다. 외롭게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엄마?”

의아한 얼굴로 데미안이 고개를 올렸다.

“뭔 일 있어?”

“아니, 아니야. 엄마 손 꽉 잡을래? 사람이 많으니까.”

“응!”

모처럼 함께 장을 보러 나온 주말이었다.

시장엔 꽃과 과일을 사러 나온 사람들과 가판에 상품을 늘어놓고 파는 상인들로 가득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장바구니를 채우던 로위나를 데미안이 돌연 잡아끌었다.

“엄마! 저기 봐!”

“응?”

“저기 의사 선생님 있어!”

데미안이 가리킨 곳을 본 로위나가 눈을 깜박였다.

“정말이네.”

“선생님!”

반가운 얼굴에 데미안이 로위나의 손을 놓고 필립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아차 한 순간 멀어진 데미안을 따라 로위나도 뒤따랐다.

“데미안!”

“엄마…….”

인파를 뚫고 데미안을 찾자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필립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선생님이 나 그냥 지나쳤어. 얼굴 분명 봤는데…….”

어깨를 축 늘어뜨린 데미안이 중얼거렸다.

“…잠깐이라 못 알아보셨을 거야. 바쁘셨을 수도 있고.”

로위나가 부드럽게 아들을 달랬다. 어쩌면 아들이 딸린 여자와 나란히 대화를 나누는 게 싫어서일 수도 있다.

호의를 보였다가 점차 마음을 바꾼 사람들은 많았다. 전혀 원하지도 않았고 달라고 애원한 적도 없던 호의들.

쓴웃음을 삼킨 로위나가 슬며시 화제를 바꿨다.

“오늘 사탕 사 줄까?”

“정말? 원래 잘 안 사 주잖아. 이빨 썩는다고.”

“헤리엇 이모네서 얌전하게 잘 지내서 상으로.”

“엄마 최고!”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금세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데미안을 보며 로위나가 빙긋 웃었다.

“좋아!”

해맑은 아들의 뺨을 한번 부드럽게 쓰다듬은 로위나가 작은 손을 잡았다. 그대로 다시 가게로 향하는 때였다. 옆을 지나치던 웬 소년과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짧은 순간인데도 뭔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기분에 가만히 서 있는 로위나를 데미안이 잡아끌었다.

“엄마? 뭐 해?”

“아. 아니야. 아무것도.”

옅게 웃은 로위나가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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