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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7화 (17/120)

17화

“데미안의 건강은 어때?”

“요새는 그래도 괜찮아요. 잔기침을 좀 하기는 하지만.”

옅게 웃은 로위나가 찻잔을 힘주어 잡았다.

걸음마를 떼기까지가 제일 고비였다. 매일 밤 열이 오른 아이를 끌어안고 울었던 나날이 떠올랐다. 그때마다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헤리엇이 아니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이다.”

그 힘겨웠던 날들을 옆에서 지켜봐 온 헤리엇이 조용히 로위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사실 이번에 나 승진하게 됐어.”

“정말요?”

“응. 주임으로.”

“축하드려요! 정말 잘됐네요.”

해사하게 웃은 로위나가 헤리엇의 손을 꼭 잡았다.

“잘되긴 뭘. 그나마 벌이가 나아져서 다행이지. 아이들이 둘이나 있으니까. 아이 아빠도 외지에 나가서 열심히 벌지만.”

“혹시 나중에라도 도울 일이 있으면 꼭 말해 주세요. 두 손 걷어붙이고 도울게요.”

“아이고. 자기도 코가 석 자면서. 말이라도 고마워. 이제 바로 나가야 하지? 어제오늘 저녁 당직이잖아.”

“네.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올게요. 감사해요.”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일일이 감사하다 미안하다 할 필요 없다니까.”

피식 웃은 헤리엇이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진료소 의사 선생님, 어때?”

“네?”

생각대로 순진한 반응에 헤리엇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겨우 두 살 아래 임에도 계속 신경이 쓰인 이유였다. 아이를 낳은 어머니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소녀 같은 모습이.

“척 봐도 레베카한테 관심이 있어 보이던데. 못 느꼈어?”

대답 대신 로위나가 눈만 깜박였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당황해 말을 잊은 것도 잠시, 로위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헤리엇이 착각한 거겠죠. 저는 아이가 딸린 여잔걸요. 나이도 젊지 않고. 반면 필립 선생님은 저보다 젊고 미혼이잖아요.”

장미수로 관리해 빛이 나던 피부도 오랜 고생으로 거칠어졌고, 매끈하던 손등도 다 터서 볼품없어졌다.

자조 섞인 목소리에 헤리엇이 고개를 저었다.

“더 연하라 해 봤자 한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그간 레베카한테 관심 가진 남자만 세어 봐도 열 손가락이 넘을걸? 그건 알잖아.”

과장이 아닌 사실이었다. 자신감이 떨어진 당사자와 달리, 헤리엇이 보는 로위나는 마음만 먹으면 재혼을 해도 벌써 했을 미모였다.

레베카에게 관심을 보인 남자 중엔 꽤 부자도 있었고 미남도 있었다.

본인은 젊은 나이가 아니라 해도 헤리엇이 보기에 레베카는 아직 새파란 나이였다. 게다가 예쁘고 성격 좋기까지. 하층 귀족 계급에 한해서지만 점점 신분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시대이다 보니 생각만 바꾼다면 금세 부잣집 마나님이 되는 것도 허황된 소리가 아니었다.

“아이도 점점 자라는데 의지할 아빠가 필요하지 않겠어?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어머, 내 정신 좀 봐.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네요.”

이어진 설득에 곤란한 표정을 짓던 로위나가 불쑥 말을 끊었다.

“이만 가 봐야겠어요.”

“에휴. 그래. 알겠어.”

비슷한 소리를 꺼낼 때마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해하던 로위나였다. 결국 백기를 든 헤리엇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대로 찻잔을 치우는데 아래 있던 조간지가 툭 바닥에 떨어졌다.

“제가 주울게요.”

한발 앞서 고개를 숙인 로위나가 떨어진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때 익숙한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록포드의 공작, 데본셔 경이 결혼생활의 종지부와 함께 오늘 새벽 에셀우드로 귀국했다. 파경 이유는 측근들에 의하면 클로에 에버딘의 불임이 가장 큰…….

저도 모르게 일면의 기사를 읽어 내리던 로위나가 유령이라도 본 듯 신문을 구겼다.

“레베카?”

“……아.”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얼굴이…….”

“아니에요.”

벌떡 일어난 로위나가 덜덜 떨리는 손을 뒤로 숨겼다.

“늦, 늦은 거 같아요. 이만 가 볼게요.”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

헤리엇이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홱 몸을 돌린 로위나가 빠른 걸음으로 집을 나왔다.

‘아닐 거야.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나랑은 관계없어. 그 남자와는 이제…….’

헤리엇의 집에서 나오며 로위나는 주문처럼 속으로 되뇌었다. 걷는 내내 주변 사람들이 뒤돌아볼 정도로 창백한 얼굴이었다.

살인자에게라도 쫓기듯 허겁지겁 걸음을 옮긴 그녀가 낡은 빌라의 계단을 올랐다. 삐거덕거리며 문이 닫히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벽에 기댄 채 스르르 주저앉은 로위나가 기어가듯 침대로 향했다. 침대 아래로 한참 손을 휘적인 끝에 짐가방이 잡혔다. 로위나는 바로 가방을 열고 낡은 주머니를 꺼냈다.

두 겹의 주머니 속에 넣어 꼭꼭 숨긴 건 언젠가 그 남자가 제 손에 끼워 주었던 반지였다.

다른 건 다 놓고 나가도 이것만을 가져온 건 작은 데다 꽤 돈이 될 것 같아서였다. 만약 최악의 상황이 된다면 이 반지를 팔아 다른 곳으로 도망쳐야 하니까.

반지를 꼭 잡으며 로위나는 도망친다면 어디가 좋을지 생각했다.

어릴 적 살았던 골짜기가 떠올랐지만, 그곳은 삼촌이 있어서 안 됐다. 만에 하나 그 사람이 찾아낸다면 삼촌도 위험해질 수 있고.

“일단 짐부터 챙기자.”

반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은 로위나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옷가지라 해 봤자 사계절 입을 수 있는 면목 드레스 두 벌과 얇은 외투가 전부였다.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가방에 집어넣던 로위나의 등 뒤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레베카?”

직장 동료인 안나였다. 의아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돌아왔다.

“들어가도 돼요?”

“아…, 네.”

넋이 나간 채 대답한 로위나가 제 두 손을 내려다봤다. 그사이 휙 방으로 들어온 안나가 경악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세상에. 같은 당직이라 같이 갈까 왔더니… 집에 뭔 강도라도 들었어요? 아니면 빚쟁이?”

겉으로는 걱정하는 목소리였지만 눈은 걱정 대신 호기심과 은근한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에 로위나는 시선을 피했다. 나쁘지 않은 사이였지만 안나가 몰래 뒤에서 자신의 험담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깝게 지내고 싶지 않았지만 찾아온 걸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둘 다 아니에요. 그냥 뭐 좀 찾느라고.”

대충 둘러댄 로위나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가슴에 깊이 각인된 새벽을 떠올렸다.

―한 번이라도…, 한 번이라도 날 사랑했나요?

―전혀.

소름 끼칠 정도로 싸늘했던 부정을 떠올렸다.

뒤이어 냉정한 깨달음이 그녀를 찾아왔다.

오 년이었다. 외국에 있었다 한들 한 번이라도 그녀를 찾으려 했다면 벌써 찾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설령 이혼 사유가 신문에서처럼 정말 아내의 불임이라 한들, 그의 문제가 아니니 다른 여자와 재혼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하, 하하…….”

“레베카?”

미간을 찌푸린 안나가 허파에 바람이라도 빠진 듯 웃기 시작한 로위나를 바라봤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뭘 무서워한 걸까.

스스로가 너무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깊게 숨을 들이쉰 로위나가 다시 가방을 열고 옷을 옷걸이에 걸어 정리했다.

그때 안나의 눈에 낡은 주머니가 들어왔다. 눈치를 본 그녀가 손을 뻗고 안을 들여다봤다.

반지? 눈을 크게 뜬 안나가 슬쩍 탁상에 있던 컵을 깨뜨렸다.

“어머나! 미안해요!”

“괜찮아요. 다칠 수 있으니 움직이지 말아요. 빗자루 가져올게요.”

빗자루를 가져온 로위나가 파편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온 사이, 반지를 품 안에 챙긴 안나가 싹싹하게 웃으며 제안했다.

“미안하니까 정리하는 거 도와줄게요. 이거는 어디 두면 되나요? 그리고 이거는요?”

그녀가 든 건 좀 전에 꺼낸 낡은 주머니와 빛바랜 편지뭉치였다. 널브러진 옷을 주워든 로위나가 바닥을 고갯짓했다.

“둘 다 가방에 놔줘요.”

신문기사에 심장이 철렁했던 것도 잠시, 로위나의 일상은 다시 변함없이 흘러갔다.

달라진 게 있다면 데미안의 성탄절 선물과 더불어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기 위해 일을 더 늘렸다는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데미안이 헤리엇의 집에서 자는 날도 많아졌다.

면목 없어 하는 로위나와 다르게 헤리엇은 로위나가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는 걱정을 빼곤 오히려 반가워했다.

동갑이지만 로렌스와 로잘린은 데미안을 무척 좋아하며 따랐다. 친구가 있으면 그나마 덜 싸웠기에.

물론, 그렇다고 아예 안 싸우는 건 아니었다. 인형의 양팔을 잡은 쌍둥이들이 옥신각신했다.

“내 거야! 내 거!”

“아니야, 내 거야!”

“싸우지 말라고 했지. 로렌스. 로잘린.”

빨래를 개고 있던 헤리엇이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엄한 목소리에 쌍둥이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씩씩대던 로잘린이 심통 가득한 얼굴로 자지러지려 할 때였다. 흘깃 상황을 파악한 데미안이 쌍둥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제 몸만 한 동화책을 안고 나왔다.

“이모! 책 읽어 주세요.”

동시에 인형에 고정됐던 쌍둥이의 관심이 책으로 옮겨 갔다.

데미안의 의도를 눈치챈 헤리엇이 빙긋 웃고는 카우치에 풀썩 앉았다.

“그럴까?”

“나도나도!”

“나도 들을래!”

금세 인형을 팽개친 로렌스와 로잘린이 데미안과 헤리엇의 양옆으로 자리 잡고 앉았다. 동화가 끝날 무렵이 되자 아이들은 하나둘 졸린 눈을 비비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품에 안고 침대로 옮긴 헤리엇이 아이들의 등을 토닥였다.

셋 다 깊게 잠이 든 걸 확인하고 뒤돌아서는데 나직한 목소리가 헤리엇의 발목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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