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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6화 (16/120)

16화

“방세의 절반밖에 안 되는군. 하여간 본 데 없는 인간은 받아들이는 게 아닌데 영감 말을 들을 걸 내가 무슨 동정이 일어서…….”

로즈는 오 년 전 눈앞의 세입자를 처음 본 날을 떠올렸다.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밤, 부른 배를 안고 찾아온 초췌한 임산부였다. 척 보아도 귀찮은 일이 생길 게 뻔했기에 무시하려 했지만 인근 주민인 헤리엇의 보증이 있어 가장 낡고 높은 층을 내줬다.

그 과정에서 죄책감이라곤 한 톨도 없었다. 신원 미상의 여자에게 잘 곳을 제공해 준 스스로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고아 출신에, 마찬가지로 고아인 남편이 사고로 죽어 홀몸이 되었다지만, 뻔한 거짓말을 믿기엔 인생을 살면서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녀였다.

한눈에 보아도 거짓말을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건 알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벌써 오 년이었다. 밀린 방세와 이자를 명목으로 이제 보증금은 슬쩍할 수 있었다. 망신을 주어 완전히 쫓아낼 심산으로 로즈가 목소리를 높였다.

“애초에 어디서 어떻게 몸 굴리다 온 여자인지 내 알 수도 없고…….”

갑작스러운 소동에 주변의 방들이 하나둘씩 열렸다. 갑자기 쏟아진 폭언을 묵묵히 듣고 있던 로위나에게 관심 어린 시선이 문틈 사이사이로 쏟아졌다. 그런 가운데 로위나의 편을 드는 목소리도 이곳저곳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만 좀 하쇼. 거참……, 불쌍한 아기 엄마를 좀 내버려 둘 순 없소?”

“어제도 밤늦게 일하다 들어오는 거 내가 봤어요. 아주머님 말씀 정말 심하시네.”

“맞아요. 그럴 사람 아닌 거 여기 사람들은 다 아는데.”

한마디씩 보태는 사람들은 대개 그동안 안면을 튼 몇몇 이웃이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동정 어린 분위기에 도끼눈을 뜬 로즈가 삿대질을 했다.

“아. 시끄러워! 당신들 집세도 얼마나 밀렸는지 내 바로 계산해 볼까?”

“…….”

“그게 아니면 다들 입 다물고 잠이나 처자!”

날카로운 일갈에 하나같이 입을 다문 세입자들이 전부 문을 닫았다.

“하여간 쥐뿔도 없는 놈들이 오지랖은 넓어가지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로즈가 다시 로위나를 쏘아봤다.

“오늘은 일단 넘어가지만, 월세가 또 밀리면 바로 방 빼는 줄 알아. 알았어?”

“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옅게 웃은 로위나가 고개를 숙였다. 흥. 코웃음을 친 로즈가 뒤를 돌아 멀어졌다.

* * *

데미안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한 아이였다.

급하게 불러온 슬럼가 산파의 손에 태어나 탯줄을 끊는 순간부터 온갖 자질구레한 질병에 시달렸다. 제대로 된 집안에서 적절한 음식과 보살핌을 받고 자랐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아이가 기침할 때마다 로위나는 심장이 한 껍질씩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약은 꾸준히 먹고 있나 보군요. 그래도 열과 오한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청진기를 떼어 낸 의사가 부드럽게 진단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로위나는 남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엄마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데미안은 껌딱지처럼 로위나의 품에 파고들었다.

“엄마. 나 약 잘 먹고 말 잘 들었으니 장난감 사 줄 거야?”

천진하게 묻는 얼굴에 기대감이 어렸다. 로위나는 대답 대신 흑발을 쓰다듬었다.

“성탄절 선물로 사 줄게…… 앞으로 조금 남았네?”

“신난다!”

힘들겠지만 저녁 근무를 좀 더 늘리고 부업을 시작하면 됐다. 여태 이나마 버틴 건 언제 넣었는지 모르게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돈 덕분이었다.

돈을 가져가지 않으리란 걸 알았던 남자 덕분에.

불쑥 치미는 과거의 기억을 목 아래로 삼킨 로위나가 데미안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그대로 돌아서려는 로위나를 붙잡은 의사가 가운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데미안에게 건넸다. 허락을 구하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들과 눈이 마주친 로위나가 다시 그를 바라봤다.

동정이냐는 눈빛에 의사가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조카가 데미안 또래라서요.”

“…….”

“그래서 주는 겁니다.”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가난에 찌든 얼굴로 눈앞의 여자가 진료소를 처음 찾은 날부터 남몰래 눈길이 갔다.

처음에는 미모 때문이었지만 그다음부턴 아들을 대하는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처연한 슬픔에 조금씩 젖어 들었다.

알음알음 듣기로는 데미안은 유복자로, 남편이 사고로 오 년 전 죽었다고 했다. 여기저기 떠돌다 만삭의 몸으로 이곳을 찾아와 정착한 모양이라고, 말하기 좋아하던 아주머니들이 안타깝게 혀를 차던 게 떠올랐다.

시선을 두면 둘수록 더욱 관심이 갔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걸 마음 한구석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끌림이었다.

무연히 아들과 필립을 번갈아 보던 로위나가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필립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지. 데미안.”

“감사합니다!”

떨어진 허락에 활짝 웃은 데미안이 필립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사탕을 건네며 필립은 데미안의 얼굴에 묻어 있는 아이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차가운 대리석처럼 희고 매끈한 피부, 칠흑처럼 새카만 머리카락. 얼음처럼 색소가 옅고 투명한 눈동자.

어머니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만큼 무서우리만치 친탁한 모양새였다. 누군진 몰라도 앞의 여자와 나란히 서도 전혀 비교되지 않을 남자이리라.

“그럼.”

아이의 손을 꼭 잡은 로위나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등 뒤로 손을 뻗던 필립이 문이 닫히는 소리에 천천히 팔을 내렸다.

이후로 손님은 계속 이어졌다. 애써 그녀에 대해 잊으려고 다음 환자의 이름을 부르는데, 간호사 한 명이 문을 두드렸다.

“선생님?”

“무슨 일이지?”

“웬 남자가 찾아왔는데 나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누군가를 찾고 있다는데.”

이런 외진 도시에 사람을 찾으러 오는 이는 많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필립이 진료실을 나오자 겁에 질린 간호사의 얼굴이 보였다. 대기실에 앉아 있던 손님들도 모조리 보이지 않았다.

“이, 이게 무슨.”

이상한 공기를 눈치챈 순간 누군가 그를 불렀다.

“당신이 필립 맥우드 선생?”

차가운 목소리였다. 동시에 소름이 쫙 끼쳤다. 삐걱거리며 뒤를 돌자 언제 빼돌렸는지 환자기록표를 뒤적거리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깊은 중절모를 쓰고 검은 코트를 걸친 장신의 남자였다.

“대체 무슨 짓입니까! 으윽!”

소리 지르기 무섭게 등 뒤로 다가온 남자들이 그의 팔을 꺾고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무릎을 접어 앉은 남자가 눈높이를 맞추더니 필립의 뒤통수를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한 번만 묻겠습니다. 맥우드 선생. 금발에 초록 눈동자. 미인이고 나이는 이십 대 후반. 이름은 로위나 필로네인데, 아마 가명을 썼을 테고.”

한 시간여전 나간 여자가 머릿속에 번득였다.

“여기 그런 여자가 온 적 있습니까?”

“모, 모릅니다.”

필립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절대 말하면 안 된다는 직감이 그를 지배했다.

진의를 읽으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오면 이 호텔을 통해 내게 연락해요. 사례는 두둑이 줄 테니.”

부하를 시켜 명함을 건넸다. 필립은 흔들리는 눈으로 명함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제녹 길리터스.

최근 음지에서 급부상한 사업가였다.

* * *

“이모!”

빙긋 웃은 데미안이 헤리엇에게 안겼다. 품에 쏙 들어온 작은 몸에 헤리엇이 웃으며 데미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잤어?”

“응! 이모도?”

“잘 잤고말고. 엄마 말은 잘 들었지?”

이어진 질문에 데미안이 대답 대신 눈을 굴렸다. 가만히 두 사람을 보고 있던 로위나가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일찍 자기 싫다고 칭얼거렸다고는 말하기 싫지?”

“엄마!”

홱 고개를 돌린 데미안이 입술을 비죽였다.

“헤리엇 이모 앞에서는 비밀로 하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

말랑거리는 볼을 쭉 늘린 로위나가 헤리엇의 등 뒤로 숨은 쌍둥이에게 눈길을 던졌다.

“잘 지냈어, 로렌스. 로잘린?”

“레베카 이모!”

“이리 와.”

팔을 벌리기 무섭게 쌍둥이들이 로위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뒤늦게 심통이 난 데미안이 엄마에게 안기려고 팔을 뻗었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어 로위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데미안. 헤리엇 이모한테 안겼으면서 동생들이 엄마한테 안기니까 그건 또 싫어?”

“엄마는 내 거야!”

“욕심도 많기는.”

“세상 천사인 엄마와 다르네. 누굴 닮아서 이러나. 혹시 아빠?”

킬킬 웃은 헤리엇이 쌍둥이를 제 품으로 끌어들였다. 예기치 못한 단어에 주춤한 것도 잠시, 멋쩍은 얼굴로 로위나가 사과했다.

“또 맡기게 돼서 미안해요.”

“뭘. 친구 있으니 더 좋지.”

헤리엇은 그녀보다 두 살 위로 방직 공장의 작업반장이자, 지난 오 년간 의지했던 사람이었다. 로위나에게 산파와 직장을 소개해 준 고마운 은인이기도 했다.

“레베카는 우리 쌍둥이 임신했을 때 이곳으로 왔잖아. 그때부터 출산 동료기도 하고 그러니 너무 미안해하지 마.”

“매번 신세만 지니 면목이 없어서 그렇죠.”

“그러니까 그런 소리 좀 하지 말라니까.”

코끝을 찡그리며 웃은 헤리엇이 쌍둥이와 데미안에게 앞뜰에서 놀라고 손짓했다.

신호가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이 와르르 몰려 나가자 정신없던 집 안이 조금 평화로워졌다.

두 사람은 그대로 부엌으로 가 마주 앉았다. 따뜻한 차를 내온 헤리엇이 조심스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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