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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5화 (15/120)

15화

삼 년이었다. 무려 삼 년.

비록 감당할 수 없는 빚 때문에 시작된 뒤틀린 관계였지만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슬픈 일도, 화나는 일도, 행복한 일도. 조금씩 변해 가던 그의 눈빛에 남몰래 희망을 품어 왔었다. 그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축이 흔들리는 배신감이었다. 다정하게 머리에 입 맞추고 반지를 끼워 주던 남자는 누구일까.

머리로는 냉정하게 떠나라고 외치는데, 가슴은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어떻게든 그의 곁에 머무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 치열한 갈등에 머리가 어질했다. 속이 메스껍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로위나가 벽을 짚고 숨을 고르는 사이, 주저앉으려는 그녀의 팔을 커다란 손이 민첩하게 잡아챘다.

“떠나? 어디로.”

“어, 어디든지. 이거 놔요!”

살이 닿기 무섭게 몸부림친 로위나가 다가온 킬리언을 밀어냈다. 핏기없는 뺨 위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턱에 맺혀 떨어지는 눈물을 검지로 슥 닦은 킬리언이 미간을 찌푸렸다.

“울지 마. 귀 울리니까.”

“이거 놔!”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해진 악력에 로위나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꽉 잡은 킬리언이 그녀를 침대로 질질 끌었다. 이성을 놓은 로위나가 진저리를 치며 저항했다.

“싫어! 이 악마 같은! 괴물!”

“마음대로 불러.”

눈앞이 휘청하더니 등 뒤로 푹신한 침구가 닿았다.

킬리언은 한참 악을 쓰며 벗어나려는 몸을 제 아래에 가뒀다.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도움을 외쳐도 한 사람도 오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가까이 오지 말라고 경고했으니까.

그는 오직 제 아래의 여자에게만 집중했다.

겉으로는 둘도 없는 사랑을 속삭이면서 뒤로는 다른 남자의 침대에 오른 여자.

그는 제 정부에 대해 모든 걸 알았다.

천사 같은 얼굴을 한 독부.

그랬기에 지금 로위나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고, 도리어 화가 났다. 항구에서 충격과 배신감에 떨던 얼굴이 망막에 새겨져 내내 지워지지 않았던 것까지.

벗어나려는 여자와 놓아주지 않는 남자.

숨 막히는 대치가 끝난 건 한참 뒤였다. 한참을 몸부림치던 로위나가 기운이 다해 몸을 축 늘어뜨렸다. 식은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그녀가 또박또박 물었다.

“왜… 보름 전 내게 반지를 줬어요? 왜 결혼할 것처럼 굴었죠? 이렇게 버릴 거면서.”

“난 너에게 아무것도 약속한 게 없어. 평소처럼 선물을 주었을 뿐이지.”

“뭐…라고요?”

“왜 그리 충격받은 얼굴이지?”

되물은 킬리언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달라붙은 금발을 떼어 냈다.

“설마 전부 장난이었다고,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기대했어?”

말을 내뱉기 무섭게 뺨에 불이 일었다. 씩씩대는 얼굴에 킬리언이 입매를 비틀었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넥타이를 집어 든 그가 로위나의 손목을 위로 모아 묶었다.

“이거 당장 풀어요!”

단번에 두 손이 묶인 로위나가 펄떡였다. 가볍게 그녀를 제압한 킬리언이 손을 뻗어 새빨개진 뺨을 손등으로 쓸었다. 열이 오른 얼굴과 다르게 차가운 살갗이 닿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다.

로위나가 흥건히 젖은 눈으로 제 위에 올라탄 남자를 노려봤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길들여진 몸은 충실하게 반응했다. 수치심과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로위나.”

몸부림치는 다리 사이에 무릎을 끼운 킬리언이 속삭이듯 불렀다. 얼기설기 젖은 속눈썹을 검지로 쓸고 자신을 외면하는 턱을 잡아 제게로 고정했다.

“보름 뒤야.”

“…….”

“내 결혼식.”

여왕이 주선한 성혼이었다.

원래라면 왕족만이 허락된 대성당에서 고위 귀족과 외국 사절을 맞아 치러질 식이었지만, 기간을 정해 둔 관계라 비밀리에 간결하게 치르기로 합의했다.

아내가 될 클로에 에버딘은 여러 면에서 좋은 파트너였다. 여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성대한 결혼식에 대한 로망도 없었고, 그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이성을 잃게 만들 일도 없었다.

반면 로위나 필로네는 모든 면에서 정부 말고는 적합하지 않은 여자였다.

내세울 것 없는 출신. 수치스러운 과거. 앞과 뒤가 다른 이중성까지.

무엇보다 최악인 건 그 사실을 알면서도 휘둘리는 자신이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졸라 죽여 바다에 매장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큰 인내심과 자비를 베풀고 있는지 제 아래의 여자는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악마.”

상념에 젖은 머릿속을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깨웠다.

“괴물. 냉혈한. 피도 눈물도 없는 나쁜 놈.”

한 음절 한 음절 짓씹어 내뱉은 로위나가 피를 토하듯 처절하게 추궁했다.

“내 마음을 알고 있었잖아요.”

“…….”

“난 언제나 진심이었어. 당신을…….”

비록 종종 자신이 인간이 아닌 장난감 같다 느낄 때도 있었지만, 언뜻언뜻 보여 주는 다정함에 두 눈을 가리고 두 귀를 막았다.

눈물은 이미 말라붙었고 목소리는 쇳소리처럼 쉬었다.

“당신을… 사랑했다고요.”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세상엔 단 둘뿐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세상에 매몰됐다. 그러나 그 세상엔 아무것도 없었다. 거친 숨소리와 서로를 노려보는 눈빛 말고는.

“그럼 증명해요.”

담담한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눈을 깜박이는 사이, 단정한 손끝이 로위나의 옷깃의 단추를 하나둘 풀어 내렸다.

“뭐, 뭐 하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로위나가 힘줄이 불거진 그의 손등을 잡았다.

“이, 이러지 말아요.”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고개를 젓는 로위나의 이마 위로 서늘한 이마가 맞닿았다.

“정말 싫으면 중간에 거절해요. 그럼 그만두지.”

* * *

다시 눈을 떴을 땐 그녀를 반긴 건 하얀 봉투였다. 그간의 수고에 지불하듯 돈만을 남겨 둔 킬리언은 미련 없이 침실을 나갔다.

로위나는 점점 환희에 떨었던 스스로에게 자괴감이 치밀었다. 돈은 그 자리 그대로 두고 나왔다. 어제 미리 챙겨 두었던 짐가방만을 들고 로위나는 홀연히 별장을 나왔다.

후드를 깊이 눌러쓴 채 이른 새벽 별장을 나와 배에 탔다. 갑판 위에 서서 그녀는 물안개가 가득한 바다를 텅 빈 눈으로 바라봤다.

한 걸음 두 걸음 위태롭게 나아가는 때였다.

“엄마!”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 뒤를 도니 웬 아이가 보였다.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아이를 껴안았다.

다정한 모자를 바라보던 로위나의 머리에 불현듯 가능성 하나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달거리. 저번 달부터 멎지 않았던가.

혹시. 어쩌면.

본능적으로 아랫배에 손이 갔다.

운명의 장난인지 혹시나 했던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그녀는 임신했다. 아이를 지켜야 했다. 그의 아이인 것을 들키면 빼앗길 것이었다.

로위나는 이름을 바꾸고 연고 없는 도시에 자리 잡았다. 성혼한 킬리언 데본셔와 클로에 에버딘이 외국으로 거처를 옮긴다는 소식이 온 신문에 가득 찰 무렵, 로위나는 아이를 낳았다.

사랑스럽고도 저주스러운 남자를 꼭 닮은 아들을.

* * *

삐거덕거리는 계단 소리가 들리더니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혹시나 하는 사람이 아니길 바라며 로위나는 제 품에 안긴 아들을 꼭 껴안았다.

“레베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결국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칭얼거리는 데미안을 어른 로위나가 침대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아주머님.”

“이제야 문을 여는군.”

“죄송해요. 아기가 자고 있어서…….”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문을 여니 깐깐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집주인인 로즈였다.

막 일어나 흐트러진 차림의 로위나를 위아래를 훑어보던 로즈가 혀를 찼다.

“해 떴는데 그렇게 누워 있으면 어떡해? 돈을 벌어야 할 거 아니야.”

날아온 비난에 로위나는 대답 대신 눈을 내리깔았다.

해가 떴다 해도 밖은 아직 어스름이 가득한 새벽이었다. 이 시간에 일을 나가는 건 굴뚝 청소부나 신문 배달부 정도였다.

더불어 그녀는 어제 늦은 저녁까지 재봉 공장에서 일하고 온 터였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피로에 눈꺼풀이 자꾸 감겼다.

“레베카!”

대답 대신 선 채로 잠이 들려는 로위나를 날카롭게 부른 로즈가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집세가 밀렸어. 내가 어디까지 봐줘야 하지? 이 추운 날 아기랑 길거리에 나앉고 싶어?”

아기. 한 마디에 정수리 위로 누가 찬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친 손끝을 마주 잡은 로위나가 바로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해요. 아주머님. 월급이 밀려서요. 어제 일부는 받았는데… 잠시만요.”

절대 떼먹을 심산은 아니었다. 이렇게 새벽바람처럼 들이닥칠 줄은 생각지 못했을 뿐이었다.

거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로위나가 뒤를 돌아 옷자락이 삭아 버린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얄팍한 흰 봉투가 잡혔다.

“일단 이것밖에는 없어요. 나머지도 받으면 바로 드릴게요. 매번 죄송합니다…….”

거듭 고개를 조아린 로위나가 돈을 내밀었다. 쯧 혀를 찬 로즈가 봉투 입구를 열고는 빠르게 금액을 센 뒤 품에 쏙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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