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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4화 (14/120)

14화

다가온 배가 천천히 작은 항구에 정박했다. 갑판에 닻을 내린 선원이 발받침을 배에 내렸다.

가쁜 숨을 내쉬며 달려온 로위나가 웅성거리며 모인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짐을 내리는 일꾼들 뒤로 킬리언이 보였다.

수도 타운 하우스에서 보았을 때보다 어쩐지 조금 야윈 느낌이었지만 감탄이 나올 만큼 조각 같은 이목구비는 여전했다.

이상한 공기를 알아차린 건 맨 앞에 선 섭정관이 뒤를 돌았을 때였다.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로위나를 본 섭정관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로위나가 다시 그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킬리…….”

“공작님.”

그가 허락한 이름을 부르기도 전, 매끄럽고 우아한 목소리가 한발 앞서 그를 불렀다. 동시에 공작을 배웅 나온 사람들이 순식간에 입을 떡 벌렸다.

그가 데려온 여자는 로위나와 놀랄 정도로 닮은 여자였다. 태양처럼 화려한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 키와 체격까지. 조금 더 날카로운 인상이었지만 옆에 나란히 서면 자매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다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눈만 굴리는 가운데, 친근하게 여자를 에스코트해 배에서 내린 킬리언이 뒤늦게 로위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불시에 총에 맞은 사슴처럼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눈을 일별한 그가 동행한 여자에게 로위나를 소개했다.

“클로에. 이쪽은 로위나 필로네입니다.”

“아. 처음 뵈어요. 반가워요.”

화사하게 웃은 클로에가 로위나에게 악수를 건넸다. 로위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는 대신, 그 옆에 선 킬리언을 응시했다.

기억 뒤편에 미뤄 두었던 하녀들의 대화가 머릿속에 왕왕 울렸다.

죽은 태중 약혼녀. 그녀와 닮은 자신. 그리고 자신을 닮은…….

순식간에 멈춰 버린 세상에서 불길한 예감을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먼 친척일까? 오래된 친구일까? 그래서, 결혼식을 앞두고 초대하려고…….

“미스 필로네.”

언제나처럼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로위나는 대답 대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를 보듯 킬리언이 눈썹을 좁히자 멋쩍게 손을 거둔 클로에가 그를 나무랐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하. 미스 필로네도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 여유로운 표정과 말투 하나하나가 비수처럼 로위나의 왼쪽 가슴에 꽂혔다. 무표정한 얼굴로 킬리언이 클로에를 소개했다.

“미스 필로네. 내 아내가 될 클로에 에버딘 양입니다.”

잘못 들었을 거라며 애써 외면할 여지도 없는 쐐기였다. 직접 오른손에 끼워 준 반지를 비웃듯이.

아내가 될 여자.

날카로운 검이 심장을 관통한 느낌이었다. 모든 생기와 힘이 빠져나간 로위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가씨!”

뒤따라온 멜리사가 비틀거리는 몸을 등 뒤에서 받쳤다.

“괜찮으세요?”

로위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된 가운데 충격에 얼어붙은 사람들이 보였다. 주위를 휘 눈으로 훑은 로위나가 다시 천천히 킬리언을 바라봤다.

충격, 분노, 슬픔, 원망.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슴에 맺혔지만 나오는 말이라고는 한 단어였다.

“언…제?”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알고 싶었다.

언제부터 그녀가 모르게 다른 여자와 버젓이 약혼을 하고 결혼까지 준비했는지.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파리해진 로위나를 바라보던 킬리언이 대답 대신 멜리사에게 명령했다.

“미스 필로네는 몸이 좋지 않은 듯하니 안으로 모시세요.”

“…알겠습니다.”

입술을 꾹 악물고 대답한 멜리사가 로위나의 한쪽 팔을 부축했다.

“아가씨. 일단 여기서 벗어나요.”

“아니… 그럴 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악몽에서조차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로위나가 유령이라도 본 듯 멍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아가씨 제발…….”

울음 섞인 목소리로 멜리사가 애원했다.

“일단 여기서 나가요. 네……?”

경멸, 분노, 연민. 멜리사는 가시처럼 내리꽂히는 주변의 시선을 느꼈다. 호의와 호기심만 가득하던 눈들이 로위나가 ‘정부’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바뀐 것이다.

정작 당사자는 넋이 나가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서 더 비참하고 가슴이 아팠다. 무엇보다 이 모든 사달에 자신도 동조했다는 사실이 가슴을 내리눌렀다.

“아니…….”

“가요. 아가씨. 제가 방으로 모셔다드릴게요…….”

끝없이 고개를 젓는 로위나를 어르고 달래며 멜리사가 별장 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아무 말도 없이 길을 터준 섬사람들이 멀어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봤다.

작아지는 뒷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는 건 원인 제공자도 마찬가지였다. 높은 벽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킬리언이 섭정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한데. 에버딘 양의 방은.”

“아… 예. 물론 준비되어 있습니다.”

일련의 소동에 멍하니 서 있던 섭정관이 재빨리 대답했다. 동시에 마주한 얼굴에 살이 떨렸다.

끌에 간 듯 매끄러운 목소리와 달리 눈앞의 남자는 지금 마치 팽팽히 당겨진 현 같았다.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리면 가차 없이 끊어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다.

무심한 얼굴로 한 사람의 마음을 짓밟은 것치고 의외의 모습이었다.

섭정관이 남몰래 의문을 품는 사이, 클로에에게 고개를 돌린 킬리언이 부드럽게 말했다.

“내 정부가 배운 게 없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에두른 사과였지만 조용히 넘어가라는 말이었다. 속내를 알아차린 클로에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무례는요.”

킬리언 맥시밀리안 데본셔, 이 남자와는 애당초 사랑 따위를 바라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보다 서로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손을 잡은 사업상의 결합에 가까웠다.

“같은 여자로서 이해해요. 상심했을 테니까요.”

그래. 사업상의 결합. 정략혼.

측근들을 통해 무미건조한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직접 만나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다.

원래부터 자신은 무엇이든 놓친 적 없었다. 원하는 건 그게 뭐든 손에 넣어야 했다.

아버지의 사업도. 이 남자도.

“그나저나 별장으로 가기 전 섬을 한 바퀴 구경하고 싶은데, 안내해 주시겠어요?”

교태를 부리며 웃은 클로에가 부드럽게 단단한 팔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그의 말 한마디에 창백해지던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적인 자신의 앞에서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치다니. 얼마나 순진하고 어리석은가. 소문대로 만만찮은 적수일까 봐 긴장했던 게 맥이 풀렸다.

이렇게 잔인하게 버려지다니. 동정심이 들 정도였다.

가슴 한편에 남아 있던 찜찜함은 씻은 듯 사라져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 * *

약혼녀에게 섬 안내를 마친 킬리언이 별장으로 돌아온 건 저녁 무렵이 되어서였다.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 있던 로위나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확 눈을 떴다. 열린 문 너머로 들어온 빛이 어두컴컴한 방을 비췄다. 소리 없이 문을 연 인영이 침대로 다가왔다. 그림자가 침대와 한 걸음을 남겨 둔 순간, 갈라진 입술이 달싹였다.

“오지 마세요.”

“…….”

시트를 움켜쥔 로위나가 크게 심호흡했다.

속에서 불이 일었다. 수치스러운 죄를 지은 죄인처럼 질질 끌려가던 기억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머리를 움켜쥐고 싶었다. 멱살을 잡고 매달리고 달려들어 따지고 싶었다. 뺨을 때리고 싶었다.

하지만 학습된 위압 앞에서는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거듭 반복된 무기력이 온몸을 내리누르고 숨통을 틀어막았다.

제일 화가 나는 건 그의 느긋한 걸음걸이였다. 자신은 코끝까지 차오른 물속에서 익사하기 직전인데, 정작 저를 심해에 처넣은 남자는 너무나 태연했다.

“오지 마?”

짧게 비웃은 킬리언이 넥타이를 풀었다.

“건방 떠는 건 낮으로 충분해요. 미스 필로네.”

“…….”

“내가 준 옷을 입고 내가 준 음식을 먹으며 내 침실에 누워 있는 주제에.”

“다 필요 없어요!”

발작적으로 일어난 로위나가 쿠션을 집어던졌다. 날아간 쿠션은 안타깝게도 얼굴이 아닌 그의 가슴에 맞아떨어졌다.

떨어진 쿠션을 흘깃 본 킬리언의 눈썹이 꿈틀했다.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비척비척 일어난 로위나가 어딘가로 향했다. 같잖은 앙탈을 지켜보듯 팔짱을 낀 킬리언이 침대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지켜봤다. 거침없이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로위나가 제 짐가방을 꺼내 들었다.

“떠날 거예요.”

“떠나?”

두 손에 쥔 가방은 허탈하리만치 가벼웠다. 충격에서 벗어나자마자 싸 놓은 짐이었다.

그가 준 것들을 모조리 빼자 소탈한 옷 두 벌과 약간의 돈뿐이었다. 그나마도 겨우 이 섬을 나갈 수 있는 정도였다.

“더, 더는 악마 같은 당신이랑, 날 속인 당신이랑은…….”

말을 하면 할수록 목이 멨다. 로위나는 더듬거리면서도 끝까지 말을 맺으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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