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꿈, 꿈인가요……?”
“아닙니다.”
“정말…이요?”
떨리는 목소리가 애원하듯 물었다.
“정말… 현실인 거죠?”
대답 대신 킬리언이 턱에 맺힌 눈물을 마저 닦아 냈다. 그리고 로위나의 눈을 감겼다.
“뒤를 돌아요.”
거절은 선택지에 없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인 로위나가 일어서 그에게 몸을 돌렸다.
그녀의 손을 잡은 킬리언이 그녀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차가운 금속의 촉감에 놀란 로위나가 눈을 번쩍 떴다.
“저하……?
“킬리언이라 불러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뒷걸음질 친 로위나가 돌연 왼 가슴을 움켜쥐었다.
“킬리언… 이건…….”
그가 약지에 끼운 건 백금으로 되어 중간에 반짝이는 영롱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였다. 비록 왼손이 아닌 오른손이었지만, 그런 사소한 실수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선물입니다. 진즉 주었어야 했는데 늦어졌군요.”
“제게 이 반지를 주셔도 정말 괜찮아요……?”
“그럼, 내가 상대를 착각했단 말인가?”
가볍게 웃은 킬리언이 다정하게 핀잔했다.
“세상에……!”
가슴 깊숙이 북받친 심정을 참다못한 로위나가 그의 가슴에 뛰어들었다. 킬리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킬리언… 나는…….”
흐느끼며 로위나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 끝까지 차오른 감정에 말문이 막혔다. 이해한다는 듯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당신이 부은 뺨을 하고 나를 맞았던 날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이 있었습니다.”
“…….”
“부정하고 싶어 당신에게 잔인하게 굴었습니다. 그러나 부정해도 감정은 그대로더군요.”
“킬리언…….”
“지난 닷새간 깊게 생각했습니다. 내게 당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로위나가 고개를 들었다. 마치 동화 속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감히 우러러보지도 못할 정도로 높은 신분의 킬리언이, 가진 거라면 그를 향한 진심뿐인 그녀에게 청혼을 하다니. 아무도 모르게 가슴 깊이 품어왔던 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너무 꿈만 같아요. 정말, 정말 행복해요.”
생각지도 못한 청혼이었다. 다시금 눈물을 쏟는 로위나의 이마에 입을 맞춘 킬리언이 속삭였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섬으로 가죠. 그곳에서 함께 여름을 나는 겁니다.”
“같이 가나요?”
기대로 떨리는 목소리에 킬리언이 빙긋 웃었다.
“아쉽게도 나는 조금 뒤에 갈 겁니다. 이곳에서 마무리 지을 일이 좀 있어서.”
“킬리언…….”
“금방 갈 테니 별장에서 날 기다려요. 로위나.”
에버딘 은행장의 딸, 클로에 에버딘이 에셀우드에 입국한 건 이틀 후였다.
그녀가 록포드의 공작 킬리언 데본셔와 약혼을 앞두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로위나가 머무는 섬은 데본셔 가가 소유한 곳 중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섬이었다. 인구는 만 명 정도며 주로 진주 양식과 관광으로 수입을 얻었다.
땅만 컸지 원래는 불모지였던 섬을 개간하고 발전시킨 건 킬리언 대에서의 일이었다.
점점 발전해 나가면서 죽어가던 섬의 경제도, 멀리 떠났던 섬사람들도 돌아와 다시 둥지를 텄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으로 고향을 탈바꿈시킨 젊은 공작을 섬사람들은 점점 왕처럼 우러렀다.
평소 유능한 섭정관을 두어 관리할 뿐, 공작이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얼굴을 내비치는 수준임에도 그때마다 알현을 요청하는 섬사람들의 서류가 산같이 쌓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태도는 정식 부인이 아닌 로위나에게도 이어졌다.
섭정관의 보살핌 아래 데본셔 공작가의 별장에 머무르는 내내, 로위나는 자신을 향한 호기심 어린 눈빛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어린아이의 경우 그 관심을 더욱 솔직하게 표현했다.
“마님!”
맨발로 모래사장을 거닐던 로위나가 천진난만한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편하게 흘러내린 금발 너머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비늘처럼 반짝였다.
그녀를 불러 세운 건 섭정관의 아들이자 섬 소년들의 골목대장인 아홉 살 토미였다.
무릎을 접어 앉은 로위나가 아이와 눈을 맞췄다.
“마님이라 부르지 말고 그냥 로위나라고 불러도 된단다.”
“하지만 높은 분이니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된다고…….”
호기롭게 산책 중인 자신을 불러 세운 것 치고는 어물거리는 태도에 로위나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누누이 말했지만 난 높은 사람이 아니야. 토미. 섭정관님이 보내서 온 거니?”
“아니요. 그건 아니고…, 그냥 보여서…….”
뺨을 붉힌 토미가 수줍은지 다리를 배배 꼬았다. 빙긋 웃은 로위나가 일어나더니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같이 산책하지 않을래? 날씨가 좋아서 걷는 중이었거든.”
“좋아요!”
냉큼 대답한 토미가 로위나의 손을 잡았다. 로위나는 한 손으로는 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밀짚모자를 고쳐 썼다.
순진한 얼굴이 그 모습을 홀린 듯이 올려다봤다.
아홉 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금을 녹인 것 같은 머리카락에 푸릇푸릇한 풀처럼 생기로운 초록색 눈동자.
처음 배에서 내린 그녀를 몰래 구경했을 때, 친구들과 입 모아 천사가 왔다고 흥분했었다. 게다가 아름다운 건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높은 위치임에도 로위나는 누구에게나 상냥했고 상대가 아이라 해도 절대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다.
로위나가 여기 오고 막 보름이 흘렀을 뿐이지만 이미 섬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아버지가 그랬는데 로위나는 공작님이 굉장히 아끼는 분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감히 올려다보지도 못할 분이 될 거라고요.”
토미가 재잘재잘 떠드는 동안 로위나는 철썩이며 흰 포말을 이는 바다를 바라봤다.
섬은 휴양 철에는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러 온 귀족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지만, 그 외에는 순박하고 착한 사람들이 오순도순 지내는 외딴곳이었다. 외지와는 거리가 좀 있었고 신문도 한 달에 한 번이나 받는 터라 소식도 늦었다.
킬리언에게서는 그동안 아무런 전보도 없었다. 금방 따라오겠다던 말과 달리 시간만 흐르자 마음은 초조해졌다. 그때 토미의 말이 상념에 젖은 로위나의 주의를 환기했다.
“아버지가 조금씩 준비하는 것도 로위나와 공작님의 결혼식이죠? 전 다 알아요!”
“결혼식……?”
멈춰 선 로위나가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이어진 다음 말이 더 놀라웠다.
“네! 그리고 오늘 공작님이 오신다고… 헙!”
“…….”
예상외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던 토미가 제 입을 막았다.
“혹시 서프라이즈였나요? 나도 모르게 말해 버렸…….”
흐려지던 얼굴이 만개한 꽃처럼 활짝 피는 모습에 토미는 말을 잊어버렸다.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정말 고마워, 토미.”
어느 때보다 더 환하게 웃는 얼굴로 토미와 눈높이를 맞춘 로위나가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결혼식 준비라니!
그간의 알 수 없는 불안함은 전부 기우에 불과했다. 가슴속에 스멀스멀 올라오던 불길함과 초조함도 그녀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것일 뿐 현실이 아니었다.
킬리언은 가진 것만큼의 의무를 진 사람이었다. 그러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건 당연했다. 로위나는 그 바쁜 와중에도 그가 이 먼 곳까지 자신을 보러 왔다는 것에 집중했다.
“로위나!”
붙잡을 새도 없이 몸을 돌린 로위나가 별장 쪽으로 뛰어갔다. 앞마당으로 가자 마침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멜리사가 보였다.
“멜리사!”
고개를 돌린 멜리사가 치맛자락과 발에 모래를 잔뜩 묻히고 온 로위나의 모습에 놀란 얼굴을 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으세요? 이렇게 뛰어오시고.”
“공작님이… 헉헉…, 공작님이 오신다고?”
급하게 뛰어온 터라 숨이 찼다. 로위나의 등을 토닥인 멜리사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그렇긴 한데…….”
“언제 오시는데? 점심에? 아니면 해 질 녘에? 왜 말을 안 해 준 거야?”
잔뜩 기대를 머금은 눈으로 로위나가 대답을 채근했다.
“빨리 말해 줘.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잖아.”
물론 섬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로위나는 수도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의식주 모두 가장 좋은 것들을 누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의 눈을 사로잡은 건 섬 그 자체였다. 천혜의 자연 풍광과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친절하고 호의적인 섬사람들.
그렇게 행복한 얼굴로 낮을 보내고 나면 텅 빈 침실에서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고 다정하게 이마에 입 맞추던 킬리언이 그리워졌다.
로위나의 얼굴에 기대감과 설렘, 그리고 행복으로 가득 찬 반면 마주한 멜리사는 무언가 두려워하는 듯도, 슬퍼하는 듯도 보였다.
의외의 반응에 로위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아래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님이 오셨습니다!”
홱 고개를 돌린 로위나가 맨발 차림으로 뛰어 내려갔다. 멜리사가 다급하게 그 뒤를 쫓았다.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