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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2화 (12/120)

12화

“정말 믿기지 않지만, 미스 필로네와 밀회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심각한 고백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압박감에 베네딕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듯한 온기에 어렵사리 숙였던 고개를 드는 때였다.

“하하!”

싸늘하게 밀고를 듣던 킬리언이 실소를 터뜨렸다. 그대로 얼어붙은 베네딕트를 향해 눈을 좁혔다.

“붙일 거면 적어도 이성애자를 붙였어야지. 동성애자를 갖다 대고 모함을 하다니. 거트루드가 귀띔해 주지 않던가? 들켰다고.”

“증인이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비통한 표정으로 베네딕트가 문을 열었다. 잔뜩 겁에 질린 채 고개 숙인 소녀가 있었다.

“메, 멜리사라 합니다. 저하.”

부들부들 떠는 소녀를 보며 베네딕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삼 년 전,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공작께 로위나 필로네를 들이십사 오지랖 넓게 제안한 것이 거트루드의 커다란 실책이었다.

해외로 나가 있는 사이, 저하가 정부를 들이셨다는 말에 얼마나 기가 찼던가! 더 큰일을 하실 분이었다. 정부 따위가 생긴다면 발목만 잡힐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모르게 이 멜리사란 시골 계집애를 로위나 필로네 옆에 붙여 놓고, 로위나에게 우호적으로 굴었다.

만약 시간이 지나 저하께서 스스로 정부를 내쳤다면 아무런 수도 쓰지 않았겠지만, 로위나 필로네는 모든 면에서 예상을 뛰어넘었다. 시간이 갈수록 공작께선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그 관심은 날이 갈수록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지난 3년간, 그런 그를 옆에서 지켜보며 베네딕트는 초조함과 불안함을 억눌러왔다. 킬리언 막시밀리안 데본셔, 그의 영민한 주군은 누구에게도 휘둘려서는 안 됐다. 그가 그토록 추종하고 매료되었던 소년은, 아무에게도 지배받지 않고 모두를 지배하는 소년이었다. 하물며 그깟 여자에게야.

그러니 미스 필로네는 그의 주군에게서 멀어져야 하는 존재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 긴 시간 차근차근 기틀을 다져 치밀하게 준비한 함정이었다.

“멜리사 브라운.”

표정 없는 킬리언을 대신해 하녀를 부른 베네딕트가 엄숙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네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했지?”

“…예.”

“미스 필로네에 관해 보고할 말이 있지 않나?”

베네딕트는 느긋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제 가족의 안위가 달렸으니 돌아올 말은 하나였다.

“예…아가씨… 아니, 미스 필로네는…….”

눈물을 참으며 멜리사가 수긍했다.

“위, 윌리엄 씨와 부정을 저질렀습니다. 주변 시선을 피하기 위해 나, 남장까지 하시고요.”

킬리언 데본셔는 성인이 된 이후, 자신을 배신한 사람을 살려 둔 적 없었다.

그가 열네 살이 되던 해 그의 정보를 모두 여왕에게 팔아넘긴 유모도, 외국 유학 시절 그의 암살에 협조했던 동기도, 청백한 스승처럼 굴었으나 뒤로는 공작가의 후광을 얻으려 했던 전임 교수도.

모두 행방불명 처리되었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아니,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시신이 부패해 물 위로 떠오르면 신원을 알아보기 어려우니까.

거기에 예외는 없었다. 로위나 필로네의 말로도 마땅히 그러해야 했다.

가증스러운 얼굴을 망가뜨리고, 사랑을 입에 담던 혀를 잘라 내고, 감히 제가 아닌 다른 남자를 담은 눈을 도려내야 했다. 그런 다음 싸늘해진 몸뚱이를 미련 없이 바다에 내던져야 했다.

그러니 죽음은 사실 로위나 필로네에게 먼 이야기는 아니었다.

킬리언 데본셔가 로위나 필로네를 정부로 맞아들였을 때부터 그 여자의 머리 위로는 수없이 많은 죽음이 스쳐 지나갔다.

독을 먹고 죽거나, 괴한의 칼에 찔려 죽거나, 때로는 마차 사고로 죽거나, 화재 사고로 기둥에 깔려 죽거나.

그래서 지난 3년간 킬리언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눈을 뜬 사냥개처럼 주위를 견제했다.

잠시라도 방심한 순간 독사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의 정부를 갈기갈기 찢어 내리란 걸 알았기에.

그러니 그 손만 놓아 버리면 쉬운 일이었다. 여왕은 결코 기회를 놓치지 않을 테니.

하지만.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킬리언은 조용히 제 옆에 누운 여자를 바라봤다. 어슴푸레한 새벽빛 속에서 여윈 윤곽이 드러났다. 금사처럼 풀려 침대 위를 덮은 금발과 여름의 복숭아처럼 붉은 뺨, 둥글고 가녀린 어깨와 팔뚝.

보고 있노라면 코르티잔의 모습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천사의 낯이었다. 처음 만난 날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수줍게 웃던 시골 처녀의 얼굴이었다.

뼈마디 굵은 손이 매끈한 뺨을 타고 내려가 목 언저리를 쓸었다.

로위나 필로네는 여태껏 죽여 온 이들과 달랐다.

이 여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의 것이었다. 온전한 그의 소유.

차라리 직접 목을 졸라 죽여 버릴지언정 다른 이의 손으로 시체가 된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무심한 얼굴로 킬리언은 제게 매달리는 로위나를 생각했다.

처음엔 무슨 상황인지 당황하며 그의 손을 잡을 것이다. 물론 대답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살려 달라 비는 몸 위에 올라타 두 손에 더욱 힘을 줄 것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헐떡이며 바르작거릴 때도 이 여자가 아름다울지 궁금했다.

“저…하?”

가볍게 한 손으로 목을 잡는 순간, 킬리언은 녹음처럼 생기 어린 눈과 마주했다. 손이 멈칫하는 사이 길게 하품한 로위나가 그를 불렀다.

“꿈인가요…?”

길고 곧은 손가락. 힘줄이 도드라진 손등. 단단한 뼈마디. 익숙한 촉감을 음미하며 로위나는 그의 손을 제 뺨에 가져갔다. 기분 좋은 서늘함이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해졌다.

“제 자는 모습을 보신 적 없으시잖아요…. 그러니 이건 꿈이죠?”

밤을 함께 보낸 다음 날 아침이면 싸늘해진 옆자리만 남겨 두는 사람이었다.

같이 있어 달라 부탁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는 또다시 그녀를 멋대로 취하고 방치했다. 나흘간이나.

“그래.”

나직하게 대답한 킬리언이 입을 다물었다.

역시 꿈이구나.

묘하게 부드러워진 눈가에 로위나는 천천히 입매를 끌어 올렸다.

“그럼 어리광부릴래요…….”

오랜만에 보는 그의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어쩐지 명치끝이 묵직했다. 코끝이 시리고 눈에 열이 올랐다.

빤히 로위나의 얼굴을 바라보던 킬리언이 물었다.

“어떻게.”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세요. 제가 잠들 때까지요…….”

잠시 눈을 깜박인 킬리언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긴 머리채를 쓰다듬었다. 로위나는 그의 손길을 음미했다. 조심스럽고 나붓나붓한 손길에 발밑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꿈인데…, 꿈이 분명한데……. ”

졸음에 머릿속이 이리저리 뒤엉켰다. 자고 싶지 않은데, 계속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면 평소처럼 텅 빈 옆자리를 보게 될 것 같았다.

“자.”

머리를 만지작대던 손이 그녀의 눈 위를 내리눌렀다. 로위나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킬리언은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아주 오랫동안.

* *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역시 혼자였다.

헛헛한 마음으로 몸을 일으킨 로위나가 화장대 앞에 앉았다. 넓은 침실에 홀로 머무는 건 킬리언이 이유도 없이 싸늘한 얼굴을 내보인 날 이후 오늘로 닷새째였다.

책을 내려고 했던 출판사는 그사이 문을 닫았고, 건물 관리인은 윌리엄 제넌이라는 남자는 알지도 못한다고 했다.

우울하고 지쳤다. 눈앞의 미래가 이리저리 엉킨 실타래 같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로위나가 푸석해진 얼굴을 보며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 문밖에서 누군가 노크했다. 들어오라 말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마침 잘 왔어. 세숫물은 잠시 협탁에 두고, 나 머리 올리는 것 좀 도와줘.”

당연히 멜리사겠거니 싶었다. 쳐다보지도 않고 머리를 한데 모아 묶으려는데 로위나의 손등 위로 단단한 손이 겹쳐졌다.

화들짝 놀란 로위나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거울 너머로 얼음같이 차가운 동공과 마주했다.

“고, 공작님?”

“미스 필로네.”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킬리언이 부드럽게 말했다.

“머리 올리지 말아요.”

“…….”

“푸는 게 더 어울립니다.”

“어제…….”

지독히도 낯선 얼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낯익은 얼굴이었다.

눈을 크게 뜬 로위나가 입을 벌렸다.

“어제 꿈이 아니었나요……?”

그녀는 서늘한 손으로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다정한 얼굴을 떠올렸다. 공단처럼 감기는 긴 금발을 한번 쓸어내린 킬리언이 가녀린 양어깨를 잡았다.

“꿈이었길 바랍니까?”

“……아니요.”

로위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빙긋 웃은 킬리언이 그녀의 정수리에 가볍게 입 맞췄다.

“그날 밤은 내가 경솔하게 굴었습니다.”

“…….”

“몸은 괜찮습니까?”

매끄러운 목소리에 로위나는 대답 대신 귀를 의심했다.

말도 안 돼. 아직 꿈인 걸까? 아까의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걸까?

감히 꿈에서나 바라던 모습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다정하게 자신을 부르는 킬리언.

소중한 것을 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킬리언.

상냥하게 말을 거는 킬리언.

“로위나.”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똑똑 떨어졌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킬리언이 검지로 그녀의 눈물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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