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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도망친다-11화 (11/120)

11화

“누가 죽인다고 했지?”

“뭐……?”

탕.

“아아아아악!”

눈 깜짝할 새 발등에 구멍이 뚫렸다. 눈을 까뒤집은 남자가 몸부림쳤다.

“돼지 멱따는 소리 같군.”

처절한 비명을 짧게 일축한 킬리언이 창고를 나왔다.

“어떻게 할까요?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것 같은데.”

“팔다리를 자르고 소포에 넣어 보내요. 선물을 받았으니 답례를 하는 게 예의겠지.”

“대화로 풀어 나갈 여지가 아예 없지는…….”

“킬리언 막시밀리안 데본셔!”

제녹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남자가 금기시된 풀네임을 입에 담기 무섭게 눈썹을 치켜올린 킬리언이 뒤를 돌았다. 남자가 악에 받친 외침을 쏟아 냈다.

“내가 예언하지! 넌 끔찍하게 죽을 거다! 그리고 네 계집도 이놈 저놈한테 굴려지다가 비참하게…….”

“저하!”

쏟아지던 저주를 의연하게 듣던 킬리언이 ‘계집’이란 단어에 성큼 걸음을 옮겼다.

“크헉!”

제녹이 말릴 틈도 없이 의자를 걷어찬 킬리언이 되물었다.

“비참하게, 뭐?”

“…….”

“말을 시작했으면 끝을 맺어야지. 응?”

거듭된 물음에도 대답은 없었다. 뒷머리를 세게 부딪히며 기절한 모양이었다. 남자의 뺨을 구두 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확인한 킬리언이 남자의 이마로 총을 겨눴다.

“저하!”

탕.

말릴 새도 없이 총구가 불을 뿜었다. 시신을 내려다본 킬리언이 명령했다.

“생각이 바뀌었다. 시체는 조각조각 썰어서 항구에 내버려.”

* * *

데본셔 공, 킬리언은 여왕의 조카이자 에셀우드에서 가장 비옥한 땅인 록포드의 영주이며 귀족의 정점에 선 남자였다.

나라 안에 손꼽는 부호임에도 사치하지 않는 품위, 왕족임에도 귀족원 앞자리를 차지할 만큼 중립적인 행보. 빈민들을 위해 창설한 자선 기구까지.

그는 민중들에게도 이름이 오르내릴 만큼 유명했다.

음지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킬리언 데본셔를 완벽하게 숨기는 게 오른팔인 제녹 클리번의 역할이라면, 양지에서의 킬리언 데본셔를 보필하는 건 왼팔인 베네딕트 서섹스 남작이었다.

“제녹.”

화를 내리누르는 듯한 목소리에 제녹은 눈을 내리깔았다. 밑바닥 출신에서 기어올라 와 킬리언에게 모든 걸 바친 제녹과 달리, 베네딕트는 뼛속까지 귀족적인 인사였다.

“저하께서 남부 조직 행동대장의 머리에 구멍을 낼 때, 넌 뭐 하고 있었지?”

“…….”

“응? 뒷짐 지고 구경이라도 하고 있었나? 아무리 본데없는 똥개라도 옳은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은 구분할 줄 알았는데. 내가 자넬 너무 과대평가한 건가? 그래?”

퍼부어진 비난에 제녹은 잠시 숨을 골랐다. 상대는 늙은이였다. 그가 앞장서서 손에 직접 피를 묻힐 때, 등 뒤에서 서류나 뒤적이는 노회한 늙은이.

“이래서 내가 근본 없는 놈을 들일 때부터 안 된다고 했었는데.”

참으려 한 순간 쏟아진 혼잣말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손끝을 말아 쥔 제녹이 반박했다.

“그놈이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습니다. 일이 벌어진 뒤에 말로만 나불대는 거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나불대? 가진 것 없던 빈민촌 고아 출신 주제에. 할 말 못 할 말 가릴 정도의 머리도 없군.”

“…서섹스 경. 연세가 예순 아니십니까? 제 명 다 누리고 사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마음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호오. 드디어 이빨을 드러내는 건가? 이 들개 놈이.”

대화의 수위가 아슬아슬하게 높아질 때쯤 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주인에 언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냐는 듯 두 사람 다 입을 다물었다.

가운데 카우치로 다가간 킬리언이 긴 다리를 꼬아 앉고는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럼 앞으로 방향에 대해 논의하죠.”

치열하게 이어지던 논의가 끝난 해 질 무렵이었다. 자리를 파하고 일어선 킬리언의 뒤를 베네딕트가 쫓았다.

“저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하인에게서 외투를 받아 든 킬리언이 이어진 말에 눈 사이를 좁혔다.

“기밀리에 길리터스 사를 창립했지만, 아무리 조심히 움직인다 해도 뒤에서 정보가 새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심상치 않게 바라보는 시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여왕의 주선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 이야기는 예전에 끝난 거로 아는데. 나서서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미스 필로네 만큼 저하를 정말 누구보다도 잘 섬기고 생각하는 여성은 없으니까요.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래서 더욱 여왕께서 주선한 혼사를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베네딕트가 단호하게 말했다.

“예상보다 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점점 감시의 눈이 날카로워지고 있습니다. 만에 하나 오랜 시간을 들여 뒷세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걸 여왕께서 아시게 된다면, 미스 필로네 또한 안전하지 않을 겁니다.”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돌아섰던 킬리언이 멈춰 섰다.

“그래서 꼭두각시로 지내라는 말인가?”

“아니요. 역으로 이용하시면 됩니다. 저들이 원하는 대로 따르는 척하면서 여왕이 내미는 여자를 눈가림 용이자 방패막이로써 이용하시면 됩니다. 미스 필로네는 안전한 곳에 도피시키고요.”

대답 대신 싸늘한 눈빛이 돌아왔다.

서슬 퍼런 시선에 그대로 굳어 버린 적도 있지만, 데본셔 공작을 모신 지 어언 십여 년이었다. 숨을 고른 베네딕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음지에서 힘을 키우고 싶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누구도 좌지우지하지 못할 권력을 가지겠다고요.”

데본셔 공작가는 오랜 역사와 위엄을 가진 가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에셀우드에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시기는 오래되지 않았다.

선대 데본셔 공작은 얌전한 남자이자 유약한 남동생이었다. 누나인 여왕이 정해 주는 짝을 만나 정략혼을 했고, 이듬해 킬리언을 얻었다. 아들을 얻자마자 소임을 다했다는 듯 저택을 뛰쳐나간 그는 십 년 뒤, 정부와 함께 의문의 화재로 타 죽었다.

사고라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은 사건이었다. 중요 인물이 죽은 것 치고 금세 흐지부지된 수사 또한.

베네딕트는 그 모든 과정 한가운데 서 있었다.

전 데본셔 부부의 결혼 전 계약서를 직접 작성한 장본인이었으니까.

공작의 명백한 결함으로 인하여 공작 부인이 이혼을 요구할 경우, 위자료로 지참금의 두 배를 돌려준다는 조항.

선대 데본셔 공작이 죽기 전, 참다못한 공작 부인이 친정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면서 소문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 갔다.

국가 차원에서 막대한 위자료를 부담하기 전, 누나인 여왕이 남동생을 사고로 위장해 죽여 버린 게 아니냐는.

그 주장에는 마지막 조항이 뒷받침됐다.

단, 공작이 ‘불의의 사고’로 죽을 경우 공작 부인이 받을 위자료는 자연히 무산되며 대신 죽을 때까지 연금을 부담한다는 조항.

국가 차원의 은밀한 이야기가 오갔고 공작 부인은 합의된 ‘위로금’을 받자마자 도망치듯 제 나라로 돌아갔다. 언제 어떻게 죽임을 당할 바에야 연금도, 자리도 포기하고 친정으로 향한 것이다.

소심하지만 현명한 판단이었다.

여왕이 애초에 그녀를 지목하여 올케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리라고, 베네딕트는 생각했다.

여왕은 그렇게 홀로 남은 킬리언에게 많은 영토와 섬을 하사했다. 고아 아닌 고아로 만든 조카에 대한 죄책감과 어차피 제 손아귀에 있다는 오만의 결과였을 것이다. 어리고 힘없던 아이가 커서 제게 총구를 들이밀게 될 줄도 모르고.

베네딕트는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상속자가 된 고아 소년을 처음 보았을 때를 또렷이 기억했다. 지체 높은 소공작의 정치 스승으로 발탁되어 첫인사를 간 날이었다.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고개를 들려는데 불쑥 한 질문이 날아와 박혔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에서 내 뜻대로 살 수 있지?

―네?

―어떻게 해야, 감히 누구도 나와 내 주변을 지배하지 않게 할 수 있지?

이 나라에서 손꼽힐 정도로 고결한 신분과 어마어마한 재산이 있다 한들, 상대는 어린아이였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목소리와 달리 얼굴은 분노로, 혹은 두려움으로 물들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고개를 든 순간 커다란 충격이 밀려들었다. 소년은 분노는커녕 차분하고 평온해 보였다. 동시에 강한 깨달음이 베네딕트를 덮쳤다.

이분이었다. 오랫동안 염원하고 기다려왔던, 이 나라를 안정시킬 분이. 그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 분이.

그 이후 오랜 시간을 그의 곁에서 스승으로, 조언자로, 측근으로 살았다.

“달리 할 말이 있군.”

그저 흘러간 세월이 아니었다. 베네딕트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낸 킬리언이 그의 말을 기다렸다.

“네. 사실 미리 조사해본바, 여왕께서 내민 성혼 상대인 클로에 양은 교섭이 가능한 여성이었습니다. 보기와 달리 꽤 야심가더군요.”

“그래서요.”

“측근의 말로는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제 사업을 꾸리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두 손을 깍지낀 베네딕트가 노화한 얼굴로 덧붙였다.

“그녀의 욕망에 힘을 실어 준다면… 성혼은 서로에게 유익한 결합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미스 필로네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지 않고, 표면적인 성혼이 끝나는 날 그녀는 저하가 원하시는 자리에 앉을 수 있겠지요. 아무 잡음 없이.”

“내가 원하는 자리? 주제넘다고 생각 안 합니까?”

“죄송합니다.”

“여하튼, 클로에라는 여자를 직접 보기 전까진 모를 일이군요.”

결론 내린 킬리언이 외투에 팔을 꿰입었다. 가차 없는 말이었지만 조금 전보다 표정은 느슨해져 있었다.

“그놈은.”

“심문했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베네딕트가 무겁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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