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우산도 마차도 따로 준비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자주 보던 식당 직원이 호의를 베푼 게 발단이었다. 그대로 직원과 저택까지 함께 우산을 쓰고 왔던 밤은…, 여태까지 그와 함께했던 밤이 전부 장난처럼 느껴질 만큼 지독했다.
카페는 일주일 후 문을 닫았고 그 직원도 급하게 섬을 떠났다는 소식이 뒤따랐다.
―저하의… 뜻이었나요?
죄책감에 몸부림치다 용기를 내어 물어본 말에 돌아온 덤덤한 대답을 그녀는 잊지 못했다.
―네 주변에 일어나는 일은 모두 내 뜻이 아닌 게 없지.
이제 와 솔직하게 말하기엔 그가 너무 두려웠다.
그녀의 말을 믿어 주는 건 둘째치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또 희생시키는 건 막아야 했다.
윌리엄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아는지 몰라도, 만약 사실을 알았다면 이렇게 묻기보다 행동으로 보여 주었을 남자였다.
이렇게 묻는 걸 보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아마 사교계 일원 중 한 명의 이름이리라. 어차피 돈이 모이면 모두 밝힐 일이잖아. 그러니 당분간은 계속 비밀로 하자.
결심한 로위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잠시 생각하느라요. 생각해 보니… 모르는 이름이네요. 흔한 이름이라 혹시 아는가 싶었어요.”
“…….”
“제가 공작님께 뭘 숨기겠어요.”
태연해 보이려 안간힘을 다했지만 말끝이 떨렸다. 그 흔들림을 봤는지 킬리언이 표정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분노도 기쁨도 슬픔도 없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에 로위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대로 기이한 침묵이 이어졌다. 알 수 없는 무거운 공기가 어깨 위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로위나가 덜덜 손을 떠는 가운데, 그들의 테이블로 누군가 다가왔다.
“뭐 혹시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저하?”
잘 차려입은 지배인이었다. 옭아매고 있던 공기가 풀리자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빙긋 웃은 로위나가 고개를 돌려 대신 대답했다.
“없어요. 감사합니다.”
그게 그녀가 한 마지막 말이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지배인이 돌아가고, 급사들이 계속해서 다음 코스 요리를 차렸다.
마지막 후식이 나오는 동안에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불편한 분위기에 체할 것 같았지만 로위나는 최대한 식사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 * *
오붓한 분위기로 나갔던 두 사람이 타운 하우스로 돌아왔을 때는 한 시간여가 지난 후였다.
두 사람을 맞은 비앙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눈치 빠르게 행동했다. 킬리언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바로 목욕물을 준비하고 타운 하우스를 지키는 하녀들도 일찍 퇴근시켰다.
로위나의 시녀인 멜리사만 남아 주인의 목욕 시중을 들었다.
“아가씨. 몸이 안 좋으세요?”
부드러운 스펀지로 등을 닦아 주며 멜리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원래도 그다지 활동적이고 밝은 분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어딘가 잔뜩 긴장한 모습이 안타까웠다.
“아…,아니야. 그냥 너무 많이 먹어서 속이 조금 더부룩하네.”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제 어깨를 감싸 안았다. 마차 안에서도 이어졌던 냉기가 아직도 싸늘하게 그녀를 휘감았다.
이어진 침묵 속에서 입을 닫은 건 지금 한 마디라도 잘못 꺼냈다간 후회할 거 같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설마 킬리언이 계획을 알게 된 거라면…….
혹시나 싶은 생각에 심장이 철렁했지만 로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레스토랑에서도 든 생각이지만 그의 성격상, 만약 그런 계획을 알게 된다면 대놓고 행동하지 그렇게 떠보듯 물어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
땅을 파고드는 생각에 그대로 욕조 안에서 무릎을 끌어안는 때였다. 등과 팔을 닦아 주던 스펀지가 바닥에 떨어지더니 갑자기 멜리사가 벌떡 일어났다.
“멜리…….”
의아한 로위나가 뒤를 돌았다.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멜리사 너머로 시선을 던진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삐딱하게 벽에 등을 기댄 남자가 그녀를 굽어보고 있었다.
“저, 저하……!”
물살이 출렁였다. 화들짝 놀란 로위나가 가슴을 가리고 뒤로 물러섰다. 그래 봤자 욕조 안이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 외엔 없었다.
그 모습을 종잡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던 킬리언이 멜리사에게 지시했다.
“나가 봐요.”
“하지만…….”
새파랗게 질려 떨고 있는 로위나를 멜리사가 힐긋 곁눈질했다. 머뭇거리는 모습에 킬리언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부리는 이가 불복하는 것을 그냥 넘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로위나가 다급하게 멜리사를 불렀다.
“메, 멜리사…….”
“아가씨…….”
“나가 봐. 괜찮으니까.”
“…예.”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멜리사가 욕실을 나가자 흐릿했던 미소가 맥없이 풀렸다.
성큼 다가온 킬리언이 간이 의자에 앉더니 손을 뻗었다. 익숙한 손길로 개를 쓰다듬듯 로위나의 턱밑을 만지더니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들어 올렸다.
“저, 저하.”
로위나가 몸을 떨었다.
곳곳에서 타오르는 램프 빛에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였다. 빙하처럼 투명한 벽안이 붉게 물든 순간, 로위나는 지옥에서 꺼지지 않는 불을 지키고 있다던 악마를 떠올렸다. 소름 끼칠 정도로 아름답고 잔인한.
“제가 뭘… 뭘 잘못했나요?”
“아니.”
무미건조하게 대답한 킬리언이 시선을 내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가던 로위나가 얼굴을 확 붉혔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는데, 나직한 명령이 그녀의 머리 위에 내리꽂혔다.
“손 치워.”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 엉망이 된 그녀를 내려다보던 킬리언이 옷매무새를 다듬더니 미련 없이 일어났다. 로위나가 그대로 뒤돌아 나가려는 그를 붙잡았다.
“킬, 킬리언.”
무시하고 나가려던 그가 멈춰 섰다.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른 건 오랜만이었다.
대답 없이 우뚝 선 뒷모습을 바라보며 로위나가 그대로 엎어지려는 몸을 땅에 손을 짚어 지탱했다. 머릿속에 가득 찬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날 사랑하나요? 날… 조금이라도 사랑하기는… 하나요?
그러나 대답을 듣기가 무서웠다. 여태까지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 생각했지만 믿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오늘 밤만 해도, 둘도 없이 달콤하게 굴던 연인에서 무자비하고 잔인한 주인으로 탈바꿈한 남자이지 않은가.
“제게…….”
“…….”
“질리신 건 아니죠…?”
절… 버리실 건 아니죠?
말끝이 두려움과 슬픔으로 떨렸다. 그녀의 손을 뿌리친 킬리언이 뒤를 돌았다.
“글쎄.”
“저, 저하.”
새파랗게 질린 로위나가 벽을 짚고 일어났다.
뒤틀리기 시작한 건 그 식당에서의 대화부터였다. 무슨 오해를 한 게 분명했다.
“저하. 사실은…….”
사실대로 털어놓자. 사랑한다 먼저 고백한 뒤 솔직하게 잘 말하면, 어쩌면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마른침을 삼킨 로위나가 용기 내어 입술을 달싹이는 때였다. 문으로 성큼 다가간 킬리언이 문고리를 돌렸다.
“당분간 조용히 지내요. 질리게 하지 말고.”
얼마 전, 그녀를 방치하기 전날 했던 말이었다.
* * *
“아아아악!”
귀청을 찢을 듯한 비명이 낡은 창고 안을 울렸다.
헤어진 소파에 앉아 킬리언은 조용히 묶여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처음의 기개는 어디로 갔는지 남자는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부하가 네 번째 손톱을 뽑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그냥 죽이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지겹게 계속 같은 소리만 반복하는군. 배후를 대라는 내 말이 그렇게 어렵나?”
손을 들어 고문을 막은 킬리언이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니면 그쪽이 생각보다 멍청한 건가?”
손을 뻗은 그가 기진맥진한 남자의 턱을 들어 올렸다. 땀으로 범벅된 얼굴은 거듭되는 고문과 불면으로 초췌해져 있었다.
쯧, 혀를 찬 킬리언이 손을 거뒀다.
“쥐새끼처럼 내 수하로 잠입해서 야금야금 정보를 빼 가려 했던 걸 보면 배짱도, 머리도 나쁜 편은 아닐 텐데 말이야. 안 그런가?”
질문의 방향은 시종일관 그의 뒤에 서 있던 부하에게 향했다. 비서이자 오른팔인 제녹이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저하.”
“사죄나 듣자고 내가 여기 있는 건 아닌데.”
간담이 서늘한 목소리에 주위를 에워싼 수행원들이 뻣뻣하게 등허리를 세웠다.
제녹의 입장에선, 변명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펠릭스와 함께 남부로 내려갔을 때 벌어진 일이니까.
하지만 일이 벌어진 이후 어떤 말을 주워섬겨도 의미가 없었다. 그의 주인이 형형한 눈을 하고 있을 때는 더욱이.
“뭐, 남부 놈들이 머리가 똑똑한 것도 있겠지. 설마 내가 나서리라는 걸 한발 앞서 계산했을 줄은.”
싸늘한 침묵 뒤에 씹어 내뱉듯 평한 킬리언이 어깨 뒤로 손을 내밀었다. 이를 악문 제녹이 품에 있던 권총을 넘겼다. 안전장치를 푸는 손에 기다렸다는 듯 남자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 날 죽여 봤자!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거다! 죽여 봐라!”
눈치껏 다가온 수행원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뺨에 튄 침을 닦아 낸 킬리언이 입매를 뒤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