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제 이름은 비앙카입니다. 이 타운 하우스를 관리하는 관리자죠.”
“그렇군요.”
어색하게 웃은 로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통성명을 하기엔 이미 상대는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로위나는 다시 말을 잇는 대신 비앙카가 가져온 트레이로 눈길을 던졌다.
따끈해 보이는 수란과 바삭해 보이는 빵, 그리고 귤잼과 크림, 신선한 오렌지 주스. 앙증맞은 화병에 꽂힌 꽃 한 송이까지. 전부 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작게 감탄하는 로위나에게 비앙카가 슬그머니 물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필로네 님이 드실 식사입니다.”
“마음에 들어요. 감사해요.”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빙긋 웃어 보인 로위나가 발코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둥근 테이블과 의자가 보였다. 아마 그곳에서 먹으라는 걸까 싶었다. 일어나려는데 비앙카가 고개를 저었다.
“바깥바람은 몸에 해로우실 수 있으니 침상에서 드실 수 있게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어가 생략됐지만 이곳에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저하께선 지금 어디 계시죠?”
“섬의 섭정관과 올해 세금 문제를 논의하러 아침 일찍 출타하셨습니다. 점심 무렵에 돌아오겠다 하셨어요.”
부드럽게 대답한 비앙카가 허리를 굽히더니 트레이 아래쪽에서 베드 테이블을 꺼냈다. 그리고 그 위로 가져온 식사를 하나하나 옮겨 닮았다.
“협탁 위에 종이 있으니 언제든 필요하시면 부르시면 됩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시고요.”
정부를 대하는 거라기엔 너무도 정중한 태도에 로위나는 대답 대신 입을 벌렸다.
전에 있던 타운 하우스에서의 고용인들의 태도는 이렇지 않았다. 그녀를 무례하게 대한 건 아니었지만, 딱 적정선의 예의만 갖출 뿐 친절과 공손이란 찾아보기 어려웠다.
로위나 또한 그게 차라리 편했다. 자신은 그저 공작의 소유물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더군다나 저 여자는 공작가에서 일하는 중간급 고용인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젠트리 계급은 될 것이다.
거트루드 부인처럼 슬그머니 하대와 존대를 섞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이리도 깍듯하니 당황스러웠다.
“저…….”
“네?”
할 일을 마치고 나가려던 비앙카가 뒤를 돌았다. 로위나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렇게 깍듯하게 말 안 높이셔도 돼요.”
“…….”
“정말이에요.”
“아가씨.”
갑작스러운 말에 비앙카가 굳은 사이, 멜리사가 로위나를 눈으로 나무랐다.
“깍듯한 게 뭐 어때서요. 당연한 대우를 받는 건데요.”
“맞습니다.”
멜리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비앙카가 동의했다.
“저하께선 필로네 님을 모시는 데 조금의 부족함도 없게 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은 편안하게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 * *
킬리언이 돌아온 건 해 질 녘이었다. 일이 늦게 끝난 모양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을 열고 들어온 비앙카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보고할 일은?”
“특별한 일은 없습니다.”
조용히 대답한 비앙카가 그의 겉옷을 받아 드는 사이 킬리언이 돌연 위를 올려다봤다. 동시에 계단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던 로위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와 시선이 얽힌 순간 로위나는 놀란 토끼마냥 그대로 굳었다.
킬리언은 언제나 그렇듯 완벽한 모습이었다. 단정하게 쓸어 올린 검은 머리카락과 얼음처럼 색소가 옅은 파란색 눈동자. 넓은 어깨와 단단한 가슴, 쭉 뻗은 긴 다리.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을 바라보며 킬리언이 말을 걸었다.
“미스 필로네.”
“…저하.”
로위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어젯밤 일이 꿈인 것처럼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차갑고 단정하고 고저 없는 목소리.
“식사는 했습니까.”
“…안 했어요.”
“그럼 같이 들죠.”
“…….”
“당신이 좋아하는 곳에서.”
“…좋아요.”
로위나가 수줍게 대답했다. 담백하게 웃은 킬리언이 지시했다.
“그럼 준비하고 나와요.”
그들이 자리를 옮긴 곳은 수도의 젖줄이라 불리는 블로델 강변의 레스토랑이었다.
이 층짜리 건물로 부드럽게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볼 수 있어 환상적인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강변을 따라 이어진 가스등이 물결에 비칠 때면 고요히 흐르는 강 자체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로위나는 그것을 한없이 내려다보는 걸 좋아했다.
“로위나.”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테라스 석에 앉아 넋 놓고 강을 바라보던 로위나가 고개를 바로 했다.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밤이었다.
킬리언은 집 안에서처럼 편하게 앞머리를 내린 상태였다. 칠흑 같은 새카만 앞머리 아래로 얇게 언 강물의 살얼음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그녀의 주의를 사로잡았다.
“바뀐 잠자리는 어떻던가요.”
“…좋아요. 생각보다 많이 큰 곳이지만.”
이전에 지냈던 곳도 넓었지만, 바뀐 거처는 그 두 배 너비였다.
“비앙카와 하녀들은요.”
“다는 못 봤지만… 그래도 다들 친절하고 잘해 주시는 것 같아요.”
어색하게 웃은 로위나가 포크를 고쳐 잡았다.
오늘은 여러 가지로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제국 내에서 손꼽는 재력을 가진 것치고 검소한 편이던 공작이었다. 그녀에게 늘 최고의 것들만 안겼지만, 다른 귀족들처럼 호화로운 파티를 열거나 부를 과시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달랐다. 비워 놓으라고 지시했는지 테라스는 물론이고 2층 전체에 두 사람밖에 없었다.
흰 레이스 식탁보가 깔린 테이블 위로는 서민의 한 달 월급을 탈탈 털어야 먹을 수 있는 호화로운 식사가 놓였다.
“잘됐군요. 앞으로 사교 시즌엔 그곳에서 머물 겁니다.”
고분고분한 대답에 만족했는지 드물게 부드러이 말한 킬리언이 송아지 스테이크를 조금 잘라 그녀의 접시에 옮겼다.
“되도록 빨리 적응할수록 좋죠.”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확실했다. 갑작스러운 통보에 다시 식기를 내려놓은 로위나가 머뭇거리며 운을 뗐다.
“저… 그런데 공작님.”
“…….
“거트루드 부인과 대부인은 어떻게 됐나요?”
평화롭던 분위기도 잠시, 팽팽히 당겨진 실처럼 공기가 얼었다. 로위나가 테이블 아래로 치맛자락을 쥐었다.
생각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보던 킬리언이 조용히 대답했다.
“거트루드 부인은 징계했고 대부인은 반년간 요양하시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두 사람을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아. 그렇군요…….”
생각보다 유한 처분에 로위나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킬리언은 무표정한 모습으로 바라봤다. 그가 바라봤던 로위나 필로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여자였다.
순수하고 선한 시골 아가씨, 동시에 남자를 현혹하는 여자.
안도의 한숨은 꾸며 낸 게 아닐까.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궁금한 적도 있었지만 더는 아니었다. 저게 다 연기일지라도 상관없었다.
“로위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로위나가 고개를 들었다.
“네?”
킬리언이 긴 다리를 꼬아 앉았다.
“윌리엄이란 남자 알고 있습니까?”
추궁했으나 로위나가 정말 그와 부정을 저질렀다는 생각은 없었다. 펠릭스는 정보상으로 거짓말을 할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로위나가 윌리엄이라는 남자와 내연 관계라는 건 평소 그녀를 고깝게 보던 거트루드의 악의 섞인 진실일 터였다.
거트루드가 의도했던 것과 달리, 이번 계기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어젯밤 그녀를 안고 급하게 뛰었던 순간을 기억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던 소름 끼치는 감각.
이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있는 모습을 상상하던 때보다 더 강렬한 무언가가 가슴을 덮쳤던 순간.
―부정은 정말입니다! 진실입니다. 저하! 직접 물어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로위나 필로네는 버릴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는 지난밤 끌려가던 거트루드의 말을 무시했다. 그녀의 입으로 무슨 말이냐는 반문이 돌아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갑자기 윌리엄이란 이름이 나오다니. 무언가 눈치라도 채신 걸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로위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왜 대답하지 않죠?”
눈을 가늘게 뜬 킬리언이 다시 한번 추궁했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매끄러웠으나 숨이 꽉 조일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로위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출간 후 인세를 받게 된다면 스스로 밝힐 일이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몰래 책을 내려고 한다는 걸 들킨다면, 솔직하게 이야기해도 킬리언은 분명 그녀가 빚을 갚고 그에게서 벗어나려 한다고 오해할지도 몰랐다. 그 여파는 출판사 사장인 윌리엄과 멜리사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그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멜리사를 자르고, 출판사의 문을 닫게 할 남자였다.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 무심하게 굴다가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일을 벌이는 사람이니까. 이미 한 차례 전적이 있었다.
로위나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던 휴양지 섬의 카페를 떠올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바다를 내려다보고 책을 읽기 좋았던 곳.
일을 하는 동안 킬리언은 그녀가 무엇을 하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문제는 갑자기 비가 엄청나게 내리던 밤에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