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별일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녀가 물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처럼 급하게 킬리언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매끈한 손이 움찔했다.
“…화내지 마세요. 제발…….”
대답 대신 킬리언은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애원하는 여자는 필사적이었다. 그가 마치 금방이라도 뒤돌아서 늙은 여자 둘을 총으로 쏴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사실 마음 먹는다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당장이라도 두 여자를 죽이고, 주방 안쪽에서 숨죽이며 떨고 있는 하녀와 하인의 뒤처리를 할 수행원과 의사도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의 정부는 약한 여자였다. 평생을 눈에 새기고 괴로워할 것이다.
두려워하며 덜덜 떠는 걸 보는 건 좋았지만 그건 오직 그의 앞에서여야만 했다. 외줄 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침묵이 이어졌다.
“미스 필로네.”
로위나가 팽팽한 긴장을 더는 참을 수 없을 때쯤 그가 지시했다.
“지금부터 눈 감고 귀 막아요.”
로위나는 머리 위에서 들려온 경고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위로 올라가요.”
왜냐고 묻고 싶었지만 마주한 눈동자가 총구의 끝처럼 시퍼렜다. 눈두덩이를 내리누르는 손길에 로위나가 어깨를 움츠렸다.
명령대로 귀를 막는 순간 무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폭격에서 도망치듯 계단의 난간에 손을 얹은 로위나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층계참에 도착했을 때 걸음이 멈췄다. 귀를 뚫는 비명에 그녀가 뒤를 돌았다.
“아아악!”
“아, 실수입니다.”
로잘린은 제 뺨을 스치고 날아간 파편에 숨을 들이켰다. 얇게 그은 줄처럼 붉게 스친 자리엔 피가 뚝뚝 흘렀다.
“아아…….”
눈앞을 새카맣게 칠한 공포에 로잘린이 뒷걸음질 쳤다. 그러건 말건 킬리언은 또다시 현관 장식장에서 찻잔을 하나 빼내 들었다.
무심한 눈길이 품평하듯 그것을 내려다봤다. 여왕이 하사했던 찻잔 중 하나였다. 그의 어머니가 애지중지해 귀한 손님이 오면 내왔던.
“이, 이러지… 마라, 제발.”
목소리가 울음에 뭉개졌다. 짧게 웃은 킬리언이 대꾸했다.
“이 찻잔도 갖고 싶어 하셨잖습니까. 그러니 잘 받으셔야죠. 교육해 주신 대가로.”
“…….”
“이번엔 잘 받으세요. 대부인.”
말을 마치기 무섭게 찻잔을 쥔 그가 쓰레기를 버리듯 내던졌다.
“아아아악!”
벽에 맞고 산산조각이 난 파편에 눈을 질끈 감은 로잘린이 몸을 태아처럼 웅크렸다. 거트루드 또한 입술을 떨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원색의 공포 앞에서 체면이고 위엄이고 존재하지 않았다. 원초적인 광기며 분노였다. 제 영역을 허락 없이 손댄 것에 대한 경고였다.
현관을 장식하던 도자기들이 사정없이 깨지고 부서졌다.
“사, 살려…….”
“이런. 하나도 못 받으시면 어떡합니까.”
가차 없는 손길에 전부 박살 나자 킬리언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전에 보검도 탐내셨었죠?”
그의 시선에 들어온 건 벽에 걸린 검이었다. 장식용으로 벽에 붙박여 있었지만 칼날은 시퍼렜다. 그쪽으로 성큼 가는데 등 뒤에서 누군가 그를 끌어안았다. 거침없던 발길이 멈춰 섰다.
“그만… 그만 해요.”
개미 소리만큼이나 작고 힘없는 목소리. 두 팔을 벌려 끌어안아도 채 반 바퀴도 되지 않는 너른 등을 끌어안은 팔은 가늘고 연약했다.
“저를 봐서라도요…. 제발요…….”
등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벌벌 떨며 로위나는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무서워요…. 제발…….”
지난 삼 년간, 난잡하게 뒹굴고 나서도 언제 짐승처럼 달려들었냐는 듯 신사로 탈바꿈하던 그였다.
잘못 찾은 기차의 일등석 좌석에 앉아 있던 남자. 턱을 괴고 무료한 얼굴로 밖을 바라보던 옆모습. 소름이 끼칠 정도로 단정하고 조각 같던 이목구비.
강렬하게 박힌 첫인상은 지금까지도 로위나의 안에 킬리언 데본셔로 남아 있었다.
어느 순간에서도 침착하고 냉담한 남자.
그랬기에 지금 그의 모습이 두려웠다. 이성을 잃은 게 무서웠고 어디까지 갈지 알 수 없어 더 손이 떨렸다.
─미스 필로네. 당신 하나 때문에 킬리언의 명예가 더럽혀진 건 알고 있나요?
─한창인 나이대니 아무 여자나 찾는 것보단 나아 참아 주고 있는 겁니다.
─피임약은 꼬박꼬박 먹도록 하세요. 혹시나 그 비천한 배 속에 더러운 사생아를 밴다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우아하게 퍼부어지던 모욕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얼어붙던 순간. 그러나 가만히 받아들여야 했다. 여태껏 그래 왔듯이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여태껏 있는지도 몰랐던 반발심이 고개를 쳐들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그는 저를 소중하게 생각해요.
─…뭐라고?
─그러니까 아이를 갖는다면… 대부인 뜻대로는 되지 않을 거예요.
그녀를 모욕하고 짓밟는 건 괜찮았다. 이미 익숙해졌으니까.
하지만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를 쓰레기, 오물 취급하는 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이였지만 킬리언의 아이이기도 했다. 그들의 아이였다.
후작 부인의 얼굴이 일그러진 건 다음 순간이었다. 매섭게 날아온 손길이 날카롭게 뺨을 후려친 것도.
모든 게 그녀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의 충동으로 인하여.
“제가 잘못했어요…….”
빙벽처럼 가만히 서서 부정도, 수긍도 하지 않는 남자를 로위나는 생명줄처럼 부여잡았다.
“다 제 잘못이에요…….”
화병처럼 가슴을 내리누른 무언가가 기도를 막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의식이 흐릿해졌다. 손에 힘이 풀렸다.
“로위나!”
크고 단단한 손이 그녀의 등 뒤를 받쳤다. 그대로 의식이 가물어졌다.
“으음…….”
로위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힘들게 고개를 돌리자 머리맡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멜리사가 보였다.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극심한 갈증에 허우적거리던 로위나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멜…리사.”
“우음…….”
작은 소리였지만 다행히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눈을 비비던 멜리사가 화들짝 놀랐다.
“…아가씨?”
“……물.”
“아가씨! 맙소사.”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멜리사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숨이 막혔다.
“일어나셨네요. 다행이에요.”
“멜리사…….”
헛기침을 한 로위나가 맥없는 손으로 밀어내자 멜리사가 머쓱하게 힘을 풀었다.
“죄, 죄송해요. 기뻐서 그만. 물은 여기 있어요.”
멜리사가 건넨 물잔을 벌컥 마신 로위나가 주변을 눈으로 둘러봤다.
“괜찮아. 그보다…….”
모든 게 낯설었다. 지난 열흘간 머물렀던 손님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와 같이 쓰던 침실 또한 아니었다.
네 개의 기둥을 세워 다마스크 천을 늘어뜨린 장미목 침대. 기하학적인 문양이 수놓인 카펫과 천사의 장식이 양각된 벽난로. 그 위로 예스러운 태피스트리. 오른쪽에는 창문 대신 발코니로 이어지는 커다란 유리문이 있었다.
록포드의 컨트리 하우스 침실을 생각나게 하는 고급스러운 방이었다. 넋을 놓고 주위를 둘러보던 로위나가 조용히 물었다.
“여긴… 어디야?”
“아… 데본셔 가의 또 다른 타운 하우스에요. 저도 여긴 처음 와 봤어요.”
멜리사의 대답에 로위나가 눈을 깜박였다.
아마 세 채의 타운 하우스 중 또 다른 한 채인 모양이었다. 삼 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처음 온 곳이었다. 그녀가 머무는 타운 하우스보다 두 배는 넓어 보였다.
정신을 차린 로위나가 방 안을 둘러보며 감탄하는 사이, 물잔을 치운 멜리사가 슬며시 이야기를 꺼냈다.
“그나저나 어제는 깜짝 놀랐어요.”
“뭐?”
“역시 기억하지 못하시네요. 저도 여기 하녀들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어젯밤 공작님이 혼절한 아가씨를 안아서 이곳으로 데려오셨대요. 그리고 주치의를 부르셨대요.”
이후 주치의가 올 때까지 누구 하나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고 했다.
핏줄이 선 이마와 흉흉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 자칫 잘못했다간 이마에 구멍이 뚫릴 분위기였다며 어깨를 떨던 하녀를 기억했다.
그러나 여기까진 전해 주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결론 내린 멜리사가 뒷말을 삼켰다.
“그랬구나…….”
로위나는 자신을 받치던 단단한 손을 떠올렸다. 조금 잘게 떨리던 것도 같았다. 착각이었겠지. 고개를 저은 로위나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나저나… 후작 부인께서는 어떻게 됐어? 거트루드 부인이랑…….”
후작 부인에게 뺨을 맞았고, 그걸 거트루드 부인이 방관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킬리언에게 들키고 충분히 벌을 받지 않았나.
거트루드 부인은 킬리언에게 수족 같은 사람이고, 에식스 후작 부인은 피가 섞인 가족이었다. 자신 때문에 그들과 척지지 않기를 바랐다.
“아. 그건…….”
똑똑.
조심스러운 질문에 멜리사가 뭐라 입을 여는데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누구냐 묻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운을 뗐다.
“필로네 님.”
공공연하게 미스 필로네라 부르던 명칭이 바뀌었다. 놀란 로위나가 멜리사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멜리사 또한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문밖의 여자가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필로네 님. 일어나셨습니까?”
“아, 네. 방금 일어나셨어요.”
“그렇군요. 그럼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네.”
멜리사가 거듭 대답하기 무섭게 문이 스르르 열렸다. 단정한 차림의 여자가 트레이를 끌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는 서른 남짓 되어 보이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여자였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필로네 님.”
여자가 날카로운 인상과 다르게 붙임성 있는 태도로 말을 걸어왔다.